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paraphrase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는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꺼내도 꺼내도 안에서 좀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은 것입니다. 이토록 효율성이 떨어지는, 멀리 에둘러 가는 작업은 이것 말고는 달리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듭니다. 맨 처음의 테마를 그대로 척척 명확히, 지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이라는 치환 작업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 - P23

물론 직업적인 소설가 중에도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뇌 명석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세간에서 말하는 두뇌의 명석함뿐만 아니라 소설적으로도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그런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있는 햇수는 알기 쉽게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지요 기껏해야 십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 같은 몇 가지 전환 포인트를 제대로 뛰어넘은 사람은 작가로서 한 단계 거물급이 되고, 아마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것입니다. 뛰어넘지 못한 사람은 많든 적든 도중에 자취를 감추게 혹은 존재감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 P27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건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자, 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당연히 마음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링에, 어서 오십시오. - P29

나처럼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다‘ ‘사회 시스템에 꼬리를 흔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었습니다. 찻 집, 레스토랑, 잡화점, 서점. 우리 가게 주위에도 비슷한 세대의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몇 군데나 있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인 듯한 혈기 왕성한 이들도 근처에 자주 출몰했습니다. 사회전체에 아직 ‘틈새niche‘ 같은 게 꽤 많았던 시절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빈틈을 잘 찾아내면 그걸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난폭하기는 해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대였습니다. - P35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이에 사회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배웠다‘라고 하면 지나치게 직설적이라서 어째 바보 같지만, 요컨대 어른이 됐다는 얘기입니다. 수없이 단단한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가까스로 뚫고 나왔습니다. 심한 욕을 듣고 심한 꼴을 당하기도 했고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 P37

하지만 그런 힘든 세월을 무아몽중으로 건너서 어디 크게 다치는 일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남아 조금쯤 툭 트인 평탄한 장소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숨 돌리며 주위를 빙 둘러보니 그곳에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그 풍경 속에 새로운 나 자신이 서 있었다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문득 깨닫고 보니 나는 전보다 얼마간 터프해졌고 전보다는 얼마간(아주 조금이지만) 지혜가 붙은 것 같았습니다. - P38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 P46

초고를 다 썼을 때는 야구 시즌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해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에서는 최고의 투수진을 거느린 한큐 브레이브스를 깨부쉈습니다. 그것은 실로 기적 같은, 멋진 시즌이었습니다. - P47

나는 정말 솔직한 얘기로, 그 원고를 《군조》 편집부에 보낸 것조차 까맣게 잊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썼고 일단 누군가의 손에 맡겨버린 것으로 나의 ‘뭔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이미 완전히 채워졌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나는 대로 술술 써낸 것뿐인 작품이라 그런 게 최종심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 했습니다.
원고 복사조차 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일 최종심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어딘가로 영원히 사라졌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소설 같은 건 두 번 다시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이란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것입니다. - P55

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덤불숲 그늘에 한 마리의 전서 비둘기가주저앉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집어 들고 보니 아무래도 날개를다친 것 같았어요. 다리에는 금속제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비둘기를 가만가만 두 손에 들고 오모테산도의 오래된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2003년에 헐리고 이제는 ‘오모테산도 힐즈‘가 되었죠) 옆 파출소에 데려갔습니다. 그곳이 가장 가까운 파출소였기 때문입니다. 하라주쿠의 뒤편 골목길을 따라갔습니다. 그사이 상처 입은 비둘기는 내 손안에서 따스하게 작게 떨고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의 무척 기분 좋은 일요일이고, 주위의 나무들이며 건물이며 가게의 쇼윈도가 봄 햇살에 환하고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그때 나는 퍼뜩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나는 《군조》 신인상을 탈 것이라고. 그리고 그 길로 소설가가 되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심히 건방진 소리 같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매우 생생하게. 그건 논리적이라기보다 거의 직관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 P56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이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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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 문학을 읽었다. 또 앙리 드 레니에의 <행복이란 빈손으로 걷는 어떤 신이다……… 같은, 나의 <영혼과 나의 삶의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문장이며 시구(詩句)들을 베껴 쓰곤 했다. - P88

그는 더 이상 내게 자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다. 나 역시 더이상 그에게 내 공부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미사에서 복사(服事)를 한 덕분에 조금 알고 있는 라틴어 외의 다른 과목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어머니와는 달리 그것들에 흥미를 느끼는 척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중략)
그리고 내가 결국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다. - P88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가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나를 루앙의 그로 조를로주 거리로 데려가 물건을 사고, 셰 페리에라는 제과점에 들어가 조그만 포크로 케이크를 먹곤 했다. 또 <심심풀이 연애>, <그는 도사야!> 같은 내가 사용하는 말들을 자기도 써보려고 애를 썼다.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 P91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아무 할 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P93

난 런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는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애정으로 환원되었다. - P99

그에겐 아직 가게와 집을 번듯하게 만들기 위한 계획이 몇 가지 있었지만,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혁신에 대한 아이디어는 점점 줄어들었다. 단지 저 옷 입은 꼬락서니 좀 봐라고 말하는 듯한 여자 점원의 슥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중심가의 새하얀 식료품점들에 질려 버린 고객들로 만족했다. 더 이상 야심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게가 자신과 함께 사라지게 될, 과거의 잔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 P101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열광하지도 않았다. 스무 살이 넘은 처녀가 아직도 학교 책상에 앉아 있는 상황을,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이상하고도 비현실적인 삶을살고 있는 상황을 아버지는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 P102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의 정원이며, 자기 혼자 힘으로 지은 차고등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이 청년이 자신의 가치도 인정해 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가 청년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예의 바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내 부모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자질이었고, 동시에 가장 얻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어떤 노동자가 사위 후보로 왔다면 그가 용감한지, 술은 마시지 않는지 따위를 알려고 했겠지만, 내 친구에겐 그러지 않았다. 지식과 예의 바름은 내적인 탁월함, 즉 생득적인 탁월함의 표시라는 깊은 확신이 있었던것이다.
어쩌면 몇 년 전부터 고대해 왔던 무언가가 이루어진 거였는지도, 큰 걱정을 하나 덜게 된 거였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아무나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울리지 않는 사내와 결혼한 여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신혼부부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과 사위 사이에놓인 교양과 힘의 간극을 그저 한없는 베풂으로써 보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 P106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는 걸 자존심으로 여기는 그였다. 감정 같은 것은 호주머니에 넣고 그 위에 손수건으로 덮어 놓는 거야. - P111

그는 가게를 파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가게 옆에 붙어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기리라. 옛날에 가게와 함께 사두었던 것인 듯한 그 집에는 방 두 개와 부엌이 있었고, 포도주 저장 창고도 하나 있었다. 좋은 포도주들과 통조림들은 가져가리라. 신선한 달걀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우리라. 또 오트사부아에 사는 딸애 부부도 보러 가리라. 또 그는 예순다섯 살이 되면 사회보장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흐뭇해했다. 약국에서 돌아올 때면 테이블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건강 보험 청구용 증지를 하나하나 붙이곤 했다.

그는 삶을 점점 더 사랑하고 있었다. - P112

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찾은 것은사람들이 역 대합실에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방식, 그들이 역 플랫폼에서 아이들을 부르고,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방식 가운데에서였다. 아무데서고 마주칠 수 있는 익명의 존재들은 그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힘이나 굴욕의 징표들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이들에게서 난 아버지의 조건의 잊어버린 실체를 되찾을 수 있었다. - P113

돌이켜보면 그때 난 아직 모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세가 그렇게 깊지 않다는 걸 보여 주려고 그렇게 말한 거였지만, 이렇게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달라붙으려는 노력 자체가 거기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 P121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 P125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 P126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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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일요일의 카페는 가족이었던 셈이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꼭 필요한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었다. <저 사람들이 항상 저렇진 않았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꼴이되어 버렸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축제와 자유의 장소를 제공한다는 의식 말이다. - P56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들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는 우리의 행복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의 조건을 둘러싼 굴욕적인 장벽들(<우리 집은 그렇게 잘 살지 못해>라는 의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복인 동시에 소외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순의 이쪽에 닿았다, 저쪽에 닿았다 하며 흔들흔들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이다. - P57

한번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 중 하나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이건 진짜 노르망디식 전통 가옥이라며, 아주 예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녀가 단순히 예의상 그렇게 말한 거라고 믿었다. 안뜰의 식수용 펌프나 노르망디식 콜롱바주 같은 우리가 가진 옛날 것들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들의 의도야 뻔했다. 수돗물이 나오는 싱크대나 새하얀 단독 주택 같은, 자기들이 이미 소유한 현대적인 것들을 우리는 못 가지게 하려는 속셈일 터였다.

그는 담벼락과 토지의 소유주가 되기 위해 돈을 빌렸다. 여태까지 그의 가족 중에서 그런 걸 가졌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60

이러한 행복 밑에는, 서둘러 획득한 여유 있는 삶에 수반되는 답답한 긴장이 웅크리고 있었다. 난 팔이 네개가 아니잖아! 도대체가 변소 갈 시간도 없다니까! 몸살도 걸어다니면서 앓아야 할 정도야! 등등. 이런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 P61

그러다 보니 물건들은 어쩔 수 없이 신성시된다. 그리고 모든 말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들이나 내말들 가운데에서, 선망과 비교를 의심한다. 내가 <어떤 애가 루아르 강변의 고성을 구경 갔대>라고 말할라치면, 그들은 곧바로 화를 내면서 <너도 나중에 얼마든지 거기 갈 수 있어! 네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알아야지!>라고 쏘아붙인다. 항상 느껴지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결핍감. - P62

수칙 : 예절 바르게 행동하고, 자기 의견을 내놓지 않고, 지금 상대가 언짢은 기분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핌으로써 상대방이 우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갖지 않게끔 끊임없이 신경 쓸 것. 아버지는 정원의 채소들조차 삽질 중인 정원 주인이 미소나 툭 던지는 말로 간접적으로 권유하지 않는 한,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오라고 하지 않는 이상 찾아가는 법이 없었다. 상대방이 우리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어떤 호기심이나 선망의 감정이 드러날 수 있는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이거 얼마 주고 사셨어요?>는 금지된 문장이었다.

나는 여기서 자주 <우리>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나 역시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걸 언제 멈추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 P65

의사나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대화 중에 <부인께선 건강이 괜찮아요> 대신 <부인께선 방귀를 뿡뿡댈 정도로 근력이 넘쳐요〉 같은 노르망디 코 고장 특유의 표현을 끼워 넣으면, 아버지는흐뭇한 얼굴을 하고는 그 의사가 쓴 표현을 되풀이해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이렇게 세련되고 우아한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공통적인 뭔가가, 즉 약간의 열등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표현들을 내뱉는 거라고 믿었다. 왜냐면 그가 생각하기에,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제대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사든 사제든, 제대로 말하기 위해선 애를 쓰고 자기 자신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예를 들어 자기 집 같은 곳에서는 말이 제멋대로 풀려 버린다는 것이다. - P67

학교 여선생님이 내 언어를 고쳐 주곤 했으므로, 나 역시 나중에는 아버지를 고쳐 주고 싶은 마음에<나뒹그러지다> 혹은 <15분 남은 11시>라는 표현은 프랑스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그는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또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도ㅊ있었다. "엄마, 아빠는 항상 그렇게 엉터리로 얘기하면서, 어떻게 내가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길 바라는 거야!" 나는 흐느꼈다. 아버지는 침울해졌다. 내 추억 속에서, 언어에 관련된 모든 것은 돈 문제보다 훨씬 더 큰 원망과 언쟁의 동기였다. - P69

이들 세부적인 것들의 의미 규명은 이제 내게 하나의 절대명령으로 다가오며,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지금껏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확신하며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모욕당한 기억만이 그것을 간직해 올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욕망에 굴복해 왔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저아래 세계의 추억을 마치 뭔가 천박한 것인 양 잊게 만들려고 애쓰는 이 세계의 욕망에 말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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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부부관계를 늘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애무는 고사하고, 서로에게 다정하게 구는 적도 없었다. 내 앞에서는 마치 피치 못할 의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는 양 머리를 불쑥 움직여 상대의 볼에 키스를 하곤했다. 그는 종종 일상적인 얘기를 하면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웃음을 억눌렀다. 나는 커가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성적인 암시들을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종종 <내게 사랑의 말을 들려주오>라는 노래를 흥얼댔고, 그녀는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여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내 몸이 있어요>를 몹시도 절절하게 불러 댔다.
아버지는 부모의 가난을 답습하지 않기 위한 핵심적인 조건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자에게 〈넋을 빼놓지> 않는다는 거였다. - P37

반은 상인이고 반은 노동자인, 다시 말해서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아버지는 고독과 불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L…………에서 시가행진하는 보수 재향 군인회와 그의 재산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공산주의자들을 똑같이 두려워했다. 개인적인 생각들은 속에 묻어 두었다. 장사를 하려면 그런 건 가져선 안 돼. - P43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상태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외상 거래는 그들을 식구가 많은, 다시 말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 가정들과 묶어 주었다. 다른 이들의 결핍을 이용해 살아가는 처지였으나 그들을 이해했고, <장부에 달아 놓자〉고 부탁할 때 거절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대책 없이 빚만 쌓아 가는 이들에게는 따끔한 교훈을 안겨 줄 권리가 있다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돈도 안 쥐여 준 자식을 대신 보내 장을 보게 하는 어미에게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네 어머니에게 가서 밀린 대금 갚을 생각 좀 하라고 해라! 안 그러면 앞으로 다시는 외상을 안 주겠다고 말이야!] 그들은 이곳에서가장 굴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 P43

카페 겸 식료품점은 결코 문을 닫는 법이 없었다. 그는 유급 휴가일에도 서빙을 하면서 보냈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다시 찾아왔고, 그때마다 잘 대접 받았다. 그들은 주물공이나 철도청 직원인 매형들에게 부족한 것 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다. 사람들은 등 뒤에서 그들을 부자 취급했다. 다시 말해서 욕을 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노동자라기보다는 상인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정유 공장에서 그는 십장으로 승진했다. - P46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빠져나온다. - P47

물론 내가 들은 말과 문장들을, 때로는 이탤릭체로 강조까지 해가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제시하려 애쓰는 이런 종류의 시도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말들을 고딕체로 제시하는 것은 거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향수든 애잔함이든 조롱이든 독자에게 공모의 쾌감을 안겨 주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거부한다.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 P48

그는 리지외 대성당 앞 계단에서 보따리를 옆에 두고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장모와 처형들과 상봉했다. 그 계단에는 성당 앞 광장과 마찬가지로 피난민들이 새카맣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거기 있으면 보호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독일군이 거기까지몰려오자 그는 다시 L…………로 돌아갔다. 식료품점은 피난 가지 않은 사람들이 싹 쓸어 가서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왔고, 그다음 달에 내가 태어났다. 학교에서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 선생님들은 우리를 전쟁동이라고 부르곤 했다. - P50

1944년, 노르망디의 이 지역에 끊임없이 반복되던 폭격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식료품을 사러 갔다. 노인, 식구 많은 가정 등 암시장을 이용할 형편이 못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조금 더 없어 달라고 애걸해 가면서, 라 발레에서 그는 보급의 영웅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른 거였다. 훗날 그는 어떤 역할을 했다는 이 시기에 진정으로 살았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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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모든 준비가 아버지와는 무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아버지는 모종의 이유로 불참하게 될 어떤 의식일 뿐이었다. - P13

그 후 첫 발령지를 기다리며 여름을 보내고 있을때, 〈이 모든 것을 설명해 봐야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소녀 시절에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距離)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계층 간의 거리, 하지만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특별한 거리였다. 헤어진사랑의 그것처럼 말이다. - P20

제대한 그는 더 이상 <농사일culture)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땅을 가지고 하는 일을 항상 그렇게 불렀는데, 이 culture란 단어가 가진 또 다른 의미, 즉 정신적인 의미는 그에겐 불필요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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