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부부관계를 늘 부끄러워했다. 그들은 애무는 고사하고, 서로에게 다정하게 구는 적도 없었다. 내 앞에서는 마치 피치 못할 의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는 양 머리를 불쑥 움직여 상대의 볼에 키스를 하곤했다. 그는 종종 일상적인 얘기를 하면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웃음을 억눌렀다. 나는 커가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성적인 암시들을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종종 <내게 사랑의 말을 들려주오>라는 노래를 흥얼댔고, 그녀는 가족들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여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내 몸이 있어요>를 몹시도 절절하게 불러 댔다. 아버지는 부모의 가난을 답습하지 않기 위한 핵심적인 조건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여자에게 〈넋을 빼놓지> 않는다는 거였다. - P37
반은 상인이고 반은 노동자인, 다시 말해서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아버지는 고독과 불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L…………에서 시가행진하는 보수 재향 군인회와 그의 재산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공산주의자들을 똑같이 두려워했다. 개인적인 생각들은 속에 묻어 두었다. 장사를 하려면 그런 건 가져선 안 돼. - P43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상태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외상 거래는 그들을 식구가 많은, 다시 말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 가정들과 묶어 주었다. 다른 이들의 결핍을 이용해 살아가는 처지였으나 그들을 이해했고, <장부에 달아 놓자〉고 부탁할 때 거절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대책 없이 빚만 쌓아 가는 이들에게는 따끔한 교훈을 안겨 줄 권리가 있다고, 일주일이 지났는데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돈도 안 쥐여 준 자식을 대신 보내 장을 보게 하는 어미에게는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네 어머니에게 가서 밀린 대금 갚을 생각 좀 하라고 해라! 안 그러면 앞으로 다시는 외상을 안 주겠다고 말이야!] 그들은 이곳에서가장 굴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 P43
카페 겸 식료품점은 결코 문을 닫는 법이 없었다. 그는 유급 휴가일에도 서빙을 하면서 보냈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다시 찾아왔고, 그때마다 잘 대접 받았다. 그들은 주물공이나 철도청 직원인 매형들에게 부족한 것 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했다. 사람들은 등 뒤에서 그들을 부자 취급했다. 다시 말해서 욕을 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노동자라기보다는 상인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정유 공장에서 그는 십장으로 승진했다. - P46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빠져나온다. - P47
물론 내가 들은 말과 문장들을, 때로는 이탤릭체로 강조까지 해가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제시하려 애쓰는 이런 종류의 시도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 말들을 고딕체로 제시하는 것은 거기에 이중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거나, 향수든 애잔함이든 조롱이든 독자에게 공모의 쾌감을 안겨 주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을 거부한다.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말과 문장들은 내 아버지가 살았고, 나 또한 살았던 한 세계의 한계와 색채를 있는 그대로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말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 P48
그는 리지외 대성당 앞 계단에서 보따리를 옆에 두고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장모와 처형들과 상봉했다. 그 계단에는 성당 앞 광장과 마찬가지로 피난민들이 새카맣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거기 있으면 보호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독일군이 거기까지몰려오자 그는 다시 L…………로 돌아갔다. 식료품점은 피난 가지 않은 사람들이 싹 쓸어 가서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곧이어 어머니도 돌아왔고, 그다음 달에 내가 태어났다. 학교에서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 선생님들은 우리를 전쟁동이라고 부르곤 했다. - P50
1944년, 노르망디의 이 지역에 끊임없이 반복되던 폭격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식료품을 사러 갔다. 노인, 식구 많은 가정 등 암시장을 이용할 형편이 못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조금 더 없어 달라고 애걸해 가면서, 라 발레에서 그는 보급의 영웅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른 거였다. 훗날 그는 어떤 역할을 했다는 이 시기에 진정으로 살았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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