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paraphrase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는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꺼내도 꺼내도 안에서 좀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은 것입니다. 이토록 효율성이 떨어지는, 멀리 에둘러 가는 작업은 이것 말고는 달리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듭니다. 맨 처음의 테마를 그대로 척척 명확히, 지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이라는 치환 작업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 - P23

물론 직업적인 소설가 중에도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뇌 명석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세간에서 말하는 두뇌의 명석함뿐만 아니라 소설적으로도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그런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있는 햇수는 알기 쉽게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지요 기껏해야 십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 같은 몇 가지 전환 포인트를 제대로 뛰어넘은 사람은 작가로서 한 단계 거물급이 되고, 아마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것입니다. 뛰어넘지 못한 사람은 많든 적든 도중에 자취를 감추게 혹은 존재감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 P27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건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자, 그런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분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은 단 한 가지, 실제로 물에 뛰어들어 과연 떠오르는지 가라앉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난폭한 말이지만, 인생이란 원래 그런 식으로 생겨먹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당연히 마음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링에, 어서 오십시오. - P29

나처럼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다‘ ‘사회 시스템에 꼬리를 흔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었습니다. 찻 집, 레스토랑, 잡화점, 서점. 우리 가게 주위에도 비슷한 세대의사람들이 경영하는 가게가 몇 군데나 있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인 듯한 혈기 왕성한 이들도 근처에 자주 출몰했습니다. 사회전체에 아직 ‘틈새niche‘ 같은 게 꽤 많았던 시절입니다. 자신에게 맞는 빈틈을 잘 찾아내면 그걸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난폭하기는 해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대였습니다. - P35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이에 사회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배웠다‘라고 하면 지나치게 직설적이라서 어째 바보 같지만, 요컨대 어른이 됐다는 얘기입니다. 수없이 단단한 벽에 머리를 들이받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가까스로 뚫고 나왔습니다. 심한 욕을 듣고 심한 꼴을 당하기도 했고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 P37

하지만 그런 힘든 세월을 무아몽중으로 건너서 어디 크게 다치는 일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남아 조금쯤 툭 트인 평탄한 장소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숨 돌리며 주위를 빙 둘러보니 그곳에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그 풍경 속에 새로운 나 자신이 서 있었다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문득 깨닫고 보니 나는 전보다 얼마간 터프해졌고 전보다는 얼마간(아주 조금이지만) 지혜가 붙은 것 같았습니다. - P38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 P46

초고를 다 썼을 때는 야구 시즌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해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에서는 최고의 투수진을 거느린 한큐 브레이브스를 깨부쉈습니다. 그것은 실로 기적 같은, 멋진 시즌이었습니다. - P47

나는 정말 솔직한 얘기로, 그 원고를 《군조》 편집부에 보낸 것조차 까맣게 잊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썼고 일단 누군가의 손에 맡겨버린 것으로 나의 ‘뭔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이미 완전히 채워졌습니다. 나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나는 대로 술술 써낸 것뿐인 작품이라 그런 게 최종심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 했습니다.
원고 복사조차 해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일 최종심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 작품은 어딘가로 영원히 사라졌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소설 같은 건 두 번 다시 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이란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것입니다. - P55

학교 옆을 지나가는데 덤불숲 그늘에 한 마리의 전서 비둘기가주저앉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집어 들고 보니 아무래도 날개를다친 것 같았어요. 다리에는 금속제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비둘기를 가만가만 두 손에 들고 오모테산도의 오래된도준카이 아오야마 아파트(2003년에 헐리고 이제는 ‘오모테산도 힐즈‘가 되었죠) 옆 파출소에 데려갔습니다. 그곳이 가장 가까운 파출소였기 때문입니다. 하라주쿠의 뒤편 골목길을 따라갔습니다. 그사이 상처 입은 비둘기는 내 손안에서 따스하게 작게 떨고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의 무척 기분 좋은 일요일이고, 주위의 나무들이며 건물이며 가게의 쇼윈도가 봄 햇살에 환하고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그때 나는 퍼뜩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나는 《군조》 신인상을 탈 것이라고. 그리고 그 길로 소설가가 되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심히 건방진 소리 같지만, 나는 왠지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매우 생생하게. 그건 논리적이라기보다 거의 직관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 P56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껏 남아 있다는 것이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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