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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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름 있는 건축가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돈 많은 의뢰인이 올 때도 있었다. 이구치 씨는 ‘최소 이 년‘을 ‘최소 삼 년‘으로 바꿔서 방파제를 높인다. 그래도 괜찮으니 꼭 부탁한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으면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고 싶어하는 법으로, 집 짓는 것이 취미인 사람 아니면 부자일수록 기다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

나중에 유키코에게 물었더니 오전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역시 후대까지 기억되는 건축물을 만들지 않으면 주어진 역할을 다한 것이 못 돼. 그것은 관공서 시설관리과든 종합건설사든 똑같아. 전화국이든 우체국이든,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건축물이 있어. 건축가가 누군지 모르는 건축물이지만 안에 들어갔을 때 방문한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고, 언제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이것을 설계했는가 상상하게 된다면 정말 멋지지 않겠나?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디에서 수주하게 될지 모르지만,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플랜은 남겠지. 낙찰받지 못하더라도 젊은 건축가들이 이쪽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싶네. 건축가가 죽은 뒤에 완성되는 건물도 있으니까 말이지.

"램프에만 의지하는 밤도 좋지. 밝은 방보다 이야기하기 쉽고 말이야." 선생님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람들 얼굴은 바로 위에서 비추면 매력적이지 않거든. 흔들흔들한 빛으로 옆에서 비치는 것이 속이 깊은, 좋은 얼굴이 되지. 여자도 그쪽이 예뻐 보여. 조명은 밝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야."

아무것에도 쫒기지 않아도 되는 많은 시간과 엄청나게 많은 재력으로 사람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박물학과 생물학이 발달했다고 대학 강의에서 들은 것이 생각난다.

아이들 무덤은 어른하고 다른 장소에 있는 일이 많아. 부락에 공동묘지가 있어도 거기에 어린아이들 뼈는 거의 없다. 아이들 유골은 일부러 만든 옹기에 넣어서 집 근처에 매장되었다. 더 어린 젖먹이인 경우는 움막 출입구 부근에 묻기도 했다. 죽은 아이의 영혼이 그 위를 넘어서 출입하는 어머니 배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로 죽기 살기로 억지 부리는 사람은 얼마 없어. 대단한 탁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남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세상이 이런 것이니까,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야. 그런 사람들은 이쪽이 각오만 섰으면 밀어붙일 수가 있지. 물론 어디까지나 자기 아집을 관통시키려는 사람도 있어. 그런 때 건축가로서의 신념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는 평상시 어떻게 해왔느냐의 연장선상에 있어. 여차하면 저력을 발휘할 생각으로 있어도 평상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으면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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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6-14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도 이 책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