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단할 수 없는

놀라웠다. 온종일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소설을 많이 읽어온 나이지만 근래 이렇게 재미난 소설을 접한 기억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집요하도록 통속적이지 않을 수 있다니. 최근 우연히도 극찬을 받은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읽으면서 오래된 편견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확히도 이 책은 그러한 자기반성의 정점에 서있는 작품이다. 때로는 출판사나 언론의 홍보기사가 맞을 때도 있다는 사실, 아마도 나는 이번 리뷰에서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는데 그들보다 더 적절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며 내 한계에 부딪힐지 모르겠다. 이 책의 뒷면엔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당신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 질 것’이라는 뉴욕타임스의 상투적인 카피가 새겨져 있다. 한 술 더 떠 소설과 사랑에 빠지는 크나큰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독서를 한다면 이 책을 읽으라고 선동한다. 이 책은 풀 오스터의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말이다. 처음으로 책표지의 카피에 소름을 첨가해 끄덕여보았다. 그 유명한 <뉴욕 3부작>도 읽어 보지 않았으니 내겐 비교할만한 데이터도 없었다. 그저 이번으로 완벽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력이 넘쳐 흘러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시간이겠다. 이 모든 생각들이 진부하고 틀에 박힌 차별성 없는 표현이지만 나는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이 소설은 소설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품, 그동안 소설을 사랑해온 자신에게 비로소 보답하는 선물, 그래서 앞으로도 소설을 사랑하겠다는 야무진 다짐에 커다란 격려가 되는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서평을 쓰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글’은 아무래도 배치하고 정제시켜놓고 나면 들었던 ‘말’이나 실제 느꼈던 ‘감정’보다 더 과장되어 보일 때가 많다. 또 반대로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도 많다. 글로 적는 순간 이미 새로운 감정상태로 돌입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평이라는 것은 독서한 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독서하고 있는 순간의 느낌을 다시 되돌려 기억하고 정리하는 가공의 상태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독서할 때 느낀 것이 아닐지라도 글을 쓰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도 발생하고 그때 느꼈던 것을 놓치게 되는 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이 추가와 누락의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 작품 당 한 개의 서평은 결국 한 편의 ‘책 이야기’라기 보다는 책을 읽은 한 명의 ‘자신의 이야기’가 될 확률이 많다. 모든 서평은 책과 자신을 넘나들며 관통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작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 평론가가 아닌 우리들 동네 서평자들은 책과 자신의 경계에서 중심점을 잃지 않고 객관적인 비평을 해내긴 어렵다. 이른바 내 마음에 들었다면 좋은 작품이고 맘에 안 들었으면 꽝인 작품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고 또 그렇게 자유롭게 말하였다 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다. 단지 마음에 차고 안차고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부연할 수 있느냐의 정도차이일뿐 그것은 어쩌면 동네서평자의 권한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서평에 대한 장광설로 이번 서평을 시작하는 것은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객관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단점마저 매력이 된다. 그래서 두렵다. 이러한 극찬의 나열 역시 핵심에 다가가기 두려운 사랑에 빠진 상태의 초조함은 아닐까.

나는 이야기가 끝이 날까봐 초조했고 한편으론 빨리 끝이 나길 바랐다. 이 책은 긴장이 해소되는 국면이 없어 끝까지 팽팽함을 유지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서사에 대한 몰입이나 집중력, 흡입력이라 붙여질 이름의 파워일 것이다. 도저히 한 순간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으며 자꾸 넘어가는 페이지를 중단해야 할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표면상 나누어진 4부의 단락마저도 휴게소 역할을 하기는 커녕 빨리 다음이 궁금한 지점에서 흐름을 끊게 하는 얄미운 드라마를 생각게 할 정도였다. 슬쩍 작품소개를 보니 ‘스토리텔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서술되어있는 점으로 보아 내가 느낀 이야기의 재미, 서사에 대한 몰입은 바로 이야기꾼의 천부적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싶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평이했다. 갓 스물을 넘긴 미국의 대학생이 어느 봄날 뉴욕의 파티에서 ‘어울려 보이지 않는’ 커플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파티에 왜 가게 되었는지 장소가 어디였는지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모두 정확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생에 있어 대수롭지 않게 시작된 한 번의 만남, 그 우연성에 대한 절대성을 말하려 했을까. 그것은 40년 전의 일이고 글을 쓰는 시점은 수상한 커플과 만난 후 40년이 지난 시점이니 대학생은 일종의 회고록 형식의 글을 노년기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덮기 전까지 나는 노년을 맞이한 주인공이 1967년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그 후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보는 내용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서사가 진행되는 40년 전의 시점과 지금 글이 쓰여지는 40년 후 시점사이에서 정작 40년 동안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 작품은 1967년, 그때 그 사건만을 돌아보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40년 후라는 의미는 이 작품의 마지막, 1967년엔 알지 못했던 진실이 비로소 40년 후에 밝혀진다는 그러니까 40년 동안 비밀은 묻혀져 왔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그것도 책을 덮기까지 느끼지 못한)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나서야 비로소 1967년 후 흘러버린 40년의 세월을 감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40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소상히 기록한 주인공은 그 후로도 절대 1967년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한 인간의 불행이고 비극이었다. 그런데 나는 소설속에서 주인공의 비극에 공감하기 보다는 1967년의 당시 결말에만 매달려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비극은 1967년에 끝이 난 것으로 착각을 했다. 하지만 40년 후에도 비극은 계속되고 있었고 새로운 형태의 비극도 출현한다는 사실, 아니 40년 후가 더 큰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결론은 이야기에만 빠져있던 내게 이 작품의 반전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소설 속 소설이라는 액자소설이 가지는 진부함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독특하게 직조해낸 이야기의 완벽함이었다. 처음부터 물흐르듯이 나는 우연성에 매료되었고 그런 만큼 충분히 속아들었다.(세상만사가 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 아닌가) 악수로 시작된 우연의 촉발은 도대체 어디서 끝이 나는 것인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을 즈음 이 소설은 끝이 났다.(세상만사의 끝 역시 이러하지 않은가) 심지어 나는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 같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끝은 독자가 생각하는 마지막이 아니고 작가가 연출하는 결말도 아니고 그저 물리적인 페이지의 중단, 편집자의 무례한 마감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역으로 소설이 진행중인 시간들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상기하는 증거였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끝날 수 있단 말인가.

우연으로 존재하는

소설은 우연한 마주침이 생성한 효과를 필연적인 결과물로 제시하며 막을 내렸다. 한 번의 우연이 한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버린 이야기를 덮고 나서 나는 우발성이 필연성의 논리에 우선한다고 주장한 들뢰즈를 떠올렸다. 들뢰즈에 의하면 사람은 ‘우연적인 마주침들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즉, ‘우리’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았던 만남, 의도되지 않은 마주침의 총합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나’라는 존재는 결국 무한한 우발적인 마주침의 결과 이자 우연한 만남들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우발성에 따른 결과를 미국의 한 대학생을 모델로 실험한 데이터가 아닐까. 그동안 나는 들뢰즈식의 우발적 운명론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억울함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이번 소설을 읽고는 모든 숙명적인 사건은 결국 우연에서 출발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가끔가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불규칙성이 아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평한 공통분모였다. 작가는 마치 우연성의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 낱낱이 자료를 모아 실례를 제시하고 검증을 거쳐 연구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단지, 문학하는 방식이 소설이었을뿐 그것은 자연법칙을 증명하는 연구서이자 그것을 정리한 철학서였다는 생각이다.

우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그 역할이 미미한 사람들은 없었다. 분량과 상관없이 그들의 존재감은 각자가 오롯했다. 주인공 애덤 워커는 40년 전에 컬럼비아 대학생으로서 시를 좋아하고 문학이라는 예술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대개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기 전까지 모범적이다. 그의 가정환경은 30년 동안 유대인 푸주한을 지낸 할아버지와 수퍼마켓을 하는 아버지, 일곱 살에 호수에 빠져죽은 남동생, 그리고 쌍둥이처럼 친했던 누나로 요약되었고, 인물이 수려한 학생으로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장래가 촉망되는 1960년대 보통의 건강한 미국 청년이었다. 막연한 짐작인데 아마도 이러한 반듯하고도 유리알같은 미국계 유대인 대학생이 주인공으로 간택된 데에는(미국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들이 성공을 향한 열망만큼이나 실패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적 조건을 타고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서술되진 않았지만 주로 이들의 부모들은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경제적 고통속에서도 자식만큼은 끝까지 공부시킨다. 이들의 자녀들은 대개 뛰어난 두뇌와 몸에 밴 엄숙주의, 준법정신을 무기삼아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고 50년대의 한국전쟁, 60년대의 베트남전쟁에 투입되지 않는 한, 적어도 큰 일탈없이 중산층에 진입하는데 성공한다. 만약 이들이 불행해져야 한다면 그 비극의 씨앗은 주로 가족의 사연에서 비롯된 내부적 동기인 경우가 많다.(이들은 외부환경을 훌륭하게 절제하는 훈련을 받아왔기에) 그리고 개인의 상처에 해당하는 내부적 요인은 전쟁이나 경제적 문제같은 외부환경요인보다 훨씬 우발성의 법칙에 지배당할 확률이 높다. 무의식은 바로 인간의식의 억압된 사연을 쌓아놓은 ‘보이지 않는’ 창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바로 애덤 워커의 ‘보이지 않는’ 내재된 욕망이 우연이라는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 유혹에 무너질 수 있는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듯 하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인간이 겪게 되는 특별한 우연의 파도. 그것은 곧 우리네 ‘보이지 않는’ 인생과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 평범한 대학생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보이는’ 소설로 말하면서 우리 역시 소설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에 자기방식의 위로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기실, 모든 소설은 보이지 않는 삶을 보이는 이야기로 부활시키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연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삶을 보이도록 하는 필연적 장치가 아닐까.

그 유혹의 첫 번째 손짓으로 나타난 보른이라는 국제정치학 교수는 하필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죽은 자로 등장하는 베르트랑 드 보른이라는 프로방스 시인과 같은 이름으로 설정되었다. 지옥같은 벌을 받고 머리를 잃어버린 시인(베르트랑 드 보른)은 훌륭한 시인으로 이름을 떨쳐 보겠다는 워커의 망상같은 야망에 숨겨진 욕망과 두려움을 표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드 보른은 바로 당시 전쟁과 폭력에 희열을 느끼는 시인이었고 그러한 파괴적 열정은 독자를 매료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약속이나 한 듯이 교수 보른 역시 ‘전쟁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순수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놓은 것’이라 미화한다. (드 보른의 부활이었다) 여기서 워커는 직관적으로 보른이 위험한 사람임을 감지했지만 보른이 가진 욕망과 열정의 불씨에 본능적으로 끌리게 되고 만다. 욕망은 바로 금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에. 워커는 저도 모르게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며 자신의 두려움을 밝히게 되고 보른은 군대도 감옥도 안 간다면 무엇을 할 거냐며 워커를 시험한다. 눈앞에 닥친 전쟁에 참여할 용기도 없고 감옥에 갈 정의도 없어 보이는 젊은 친구가 돈 안되는 ‘글쓰는 예술’을 계속하며 나름의 결실을 맺겠다는 포부를 펼쳐 보인다. 그 순간 비밀정보원으로서 국가적 온갖 음모에 조력해온 보른은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아니 보른에게 워커는 어떤 의미였을까. 자신이 절대 가져보지 못한 보기드문 순수한 영혼이라 부러워했을까. 아니면 자신은 이미 지나온 청춘이니 비현실적 계획에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을까. 이 작품은 철저하게 워커의 시점으로 서술된 글이기에 보른의 페르소나 이면의 정확한 심중을 파악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 혹 악마적 본성을 숨기고 철저히 계획된 페르소나로 자신의 삶을 살아온 보른에게 풋내기 워커는 보기 좋고 먹기 좋은 행운의 먹이감은 아니었을까. 자기가 아는 세상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건네주고 싶고 위협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보른은 표면적으로 국제정치학 교수라는 사회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가 터득한 국제사회의 논리는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닌 분쟁을 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평화를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분쟁을 조정하며 위치를 공고히 하는 패권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껴져 서늘했다. 혹시 운이 좋아 국제사회의 전쟁에 징병되지 않아도 교수를 앞세운 이러한 전쟁수호, 유발자를 만나고 그의 음모에 노출된다는 것은 어쩐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회적 우연을 피했다 해도 개인적 우연을 피할 수 없다면 인간은 비극이라는 필연을 끝내 피할 수 없다. 모든 우연이 다 비껴간 행운의 주인공들만이 살아남아 그들의 우연을 애도한다는 것이 서글퍼지는 인물, 보른은 우연의 예외자였기에.

우연으로 완성되는

문학잡지 발간을 미끼로 워커의 미래를 유혹한 보른은 자신의 동거녀 마고를 앞세워 애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뜨리려 했다. 보른은 정의를 상실하고 권력을 신봉하는 인물이었기에 사소한 대화에서부터 의미있는 제안까지 워커의 절제력, 판단력, 도덕성을 시험하는 인물이었다. 놀라웠던 건 상징적으로 이 작품의 악마역할을 맡은 보른이 그다지 사악하거나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그건 다른 인물에서도 감지되던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세련됨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를 기만하거나 배신을 하거나 고백을 하는 등의 극적인 서사의 순간에도 작가는 인물을 보편화하려고 노력했다. 각자가 보편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 더 선하거나 악한 감정을 투사하지 않았다. 동일한 비중으로 영리하고 비슷한 밀도로 심각했다. 달리 말하면 매순간이 클라이막스고 매순간이 긴장스러웠다는 뜻과도 같은데 나는 작가의 고집스러운 일방통행의 연출이 의도된 장치인지 작가 특유의 작법인지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다. 인물에게 공평한 위치를 조율하는 서사의 효과는 단연 주인공의 변화하는 심리묘사에 더 치중하도록 했다는 생각이다. 소설속 이야기의 시시콜콜한 사건전개보다는 그러한 스토리를 끝내 엮어서 포장해내는 워커의 내면, 즉 심리전개가 더 인상깊었다고도 생각된다. 매순간 자신이 느끼던 세세한 감정을 치밀하게 기록해낸 워커의 회고록은 결국 작가가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소설이었다는 점에서 워커의 심리전개야 말로 작가의 탁월한 서사연출력이었던 것이다. 워커의 1967년도 회상에서 출연한 배우들은 철저하게 워커의 마음의 동선을 따라 등장하고 사라졌다. 이 동선의 추적을 통해 워커는 그들이 존재했던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자신조차도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독자를 능숙하게 교란시켰다. 소설읽는 재미란 이런 것이다, 과시하는 듯 했다. 이 의문은 훗날 워커의 회고록을 마주하게 된 그의 누이의 결백증언과 회고록을 최종적으로 출간할지 고민하는 친구 짐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에게 되묻는다. 워커와 그의 누나는 죽은 동생을 향한 죄책감을 근친상간의 육체적 교감으로 극복하려 했다. 워커의 회고록이 대부분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지만 유독 누나와의 육체행위만 상상이었을까 하는 질문과 그 판단을 독자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나는 이 미치도록 완벽한 작가의 작위적 센스에 독자된 기쁨을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질문을 친구 짐의 입을 통해 이 모든 것은 이야기(일뿐이)라고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작가는 애덤의 대변인에서 작가의 대변인이 된 짐을 이용했다. 하지만 작가는 우리를 기만하기 보다 다음의 카드를 내밀었다. 잠시 작가를 잊고 있었던 내게 작가는 의문을 상쇄시키기 위한 새로운 증거, 워커를 사랑했던 세실의 일기장을 종결부의 휘날레로 제시했다. 세실의 일기장은 워커의 이야기의 진실여부를 결정짓는 실마리가 아니라 오로지 워커가 몰랐던 새로운 비밀이 밝혀지는 소설의 완결장치였다. 작가는 워커의 이야기가 거짓인가 진실인가보다는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매력적이고 완벽한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라 말하는 듯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나이니 당신들은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일종의 전문화된 자신감이었다. 처음으로 작가의 완벽함에 패배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짜릿함을 느꼈다. 명품옷을 입었다고 명품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듯 명작을 읽었다고 근사한 글을 써낼 순 없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매끈함은 고난도의 복잡한 공정을 거쳐 탄생한 심플한 디자인의 절제미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각적 만족을 제공하며 심미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소설이 주는 쾌락이라함은 혹 이런 것은 아닐까. 작가는 독자가 느끼도록 얼마든지 매력적이어야 했다.

또 하나 특이했던 것은 회고록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난 워커의 글이 주제마다 시점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의 3부로 이루어진 원고는 각각 1인칭, 2인칭, 3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었다. 봄에서 ‘나’인 워커는 여름에서 ‘너’로 가을엔 ‘그’로 등장한다. 모두 1967년 일년 동안의 일이고 각각의 계절엔 그 계절의 특징을(봄-만남, 여름-격정, 가을-이별) 상징하는 주요사건이 벌어지는 형식이다. 1부인 ‘봄’에서는 워커가 이상한 커플을 만나 보른의 엄청난 제안을 받고 마고와 육체적 관계를 맺으며 보른이 정당방위 이상으로 흑인소년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으로 소설의 발단을 이끌었다. 보른과 마고를 통해 워커는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의 인간이 아닌 것에 심한 충격을 받으며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1부의 원고를 친구 짐에게 보낸 후 워커가 자신의 심경을 편지로 고백하는 장면에선 2부에서 막혀버린 글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짐은 소설의 인칭변화를 권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걸음 물러서라는 충고를 한다.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자신을 질식시키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기 보다 글쓰는 나와 글속의 나에 공간을 두는 것이 더 자신을 발견하는데 수월하다는 것이다. 놀라웠다. 워커의 심리를 짐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하고 원고의 시점변화를 자연스레 유도한 후 친절하게 설명까지 한 것은 마치 워커의 소설을 해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1부의 글이 워커가 짐에게 보낸 원고였다는 것도, 어짜피 완성될 소설이지만 그 시점에서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워커가 짐과 상의를 한다는 것도. 나는 어쩌면 워커가 백혈병 때문에 원고를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한 염려는 소설에 더 매달리게 되는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형식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의 인칭변화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색다른 재미이기도 했다. 친구의 충고대로 ‘여름’의 주인공은 2인칭인 ‘너’로 변신하며 독자로 하여금 1부에서보다 조금은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도록 만들었고 ‘가을’에선 ‘그’나 이니셜로 변신하며 마치 이별을 예고하는 듯 차차 멀어져갔다. 특히 ‘여름’의 내용상 한 살 차이 누나와 여름을 나누는 방법은 이 작품에서 가장 수위높고 충격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너’로 변신한 워커 덕분에 사실에 대한 충격은 완화되고 상상에 대한 의심은 더 커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누나와의 개인적 사건보다는 ‘너’로서의 타자화된 워커의 심리가 더 부각되 보이기도 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 불안과 우울의 나날속에서 워커는 ‘너’로 변신해 동생의 상실을 인정하고 둘만의 금기된 의식으로 부활하고자 한다. 이 때 공유한 비밀의 성역은 훗날 워커가 여성을 욕망할 때 본능을 조절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워커는 파리에서 재회한 마고와 보른의 약혼녀의 딸 세실을 여성으로서 대할 때 누나로부터 누나와 비교함으로써 그 결과를 도출해낸다. 보른이 워커의 숨겨진 폭력과 분노를 향한 욕망이었다면 누나 그윈은 워커에게 금기시된 여성을 향한 본능이었다. 이로써 워커가 보른과 그윈을 받아들인 것은 욕망의 수용, 즉 유혹에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그런데 봄과 여름이 지나 워커가 프랑스 파리에서의 ‘그’로 더 멀어졌을 때 ‘가을’의 원고는 마치 예정된 비극의 수순처럼 몹시 촉박하게 느껴졌다. 죽음을 앞둔 자의 서두른 심리가 글에 쫒긴듯 이니셜로 표기된 인물과 폭로와 추방으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상황설명은 또하나의 볼거리였다. 그리고 ‘가을’이 사실상 이 작품의 소설속 소설, 즉 워커 원고의 종결부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가을이 가버린 소설속 시점은 너무나 허탈했다. 왜 ‘겨울’이 없단 말인가. 워커의 인생은 1967년까지가 봄, 여름, 가을이었고 그 이후 40년간은 온통 겨울이었단 말인가. 그는 결국 40년간의 겨울을 말하려고 1967년 한 해의 나머지 세 계절을 회고했단 말인가. 그는 혹시 기나긴 겨울을 이미 예상하며 그 해 가을을 파리로 정한 것은 아닐까. 워커가 이상한 커플을 만난 것은 우연의 시작이었지만 그들 때문에 그들과의 기억을 피해 뉴욕에서 도피한 곳은 정작 그들이 주거하는 파리였다는 것이 잘 치루어질 비극의 조건인양 인식되었다. 혹시 워커는 의식적으로 그들을 피한다면서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날아간 것은 아닐까. 한 번의 우연을 겪은 워커가 또다시 우연을 무시한다는 건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그건 우연으로 촉발된 다음 순서의 예정된 필연은 아니었을까. 워커는 거짓말처럼 파리에서 마고와 보른과 재회하며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돌파하고자 몸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워커가 시도한 복수는 예상대로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고 작가가 주장하는 우연의 법칙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보른이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인의 딸 세실이 우연찮게도 워커를 사랑하게 된 것. 워커는 뉴욕에서의 끔찍한 살인범이 보른이라는 사실을 그들 모녀에게 폭로함으로써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끝내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마고와 세실과는 강제적 이별을 겪게 된다. 워커로서는 ‘가을’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혹독한 ‘가을’의 실패는 영원한 ‘겨울’을 불러왔던 것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생각해본다. 워커가 원한 것은 진정 보른의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었을까. 시를 버리고 정의를 찾고자 한 워커는 혹시 자신의 정의를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자신, 점점 멀어져가는 시점과 인칭만큼이나 자신을 찾기 어려웠던 워커는 유언을 하듯 40년 후 그들은 유령만큼 실체가 없다고 자신 역시 그들 사이에서 거닐게 될 것이라 예언하며 회고록을 마무리 한다. 보이지 않는 자신을 미리 예감한 워커의 마지막은 혹시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될 자신이 두려워 준비하게 된 방어책은 아닐까. 보이지 않게 될 자신이지만 지금도 자세히 보이지 않는 자신이지만 ‘보이지 않는’ 자신을 이겨보려고 이토록 보이는 소설로 가시화한 그가 우리에게 당부하고 싶었던 말은 자신이 보지 못한 자신을 우리만은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는 뜻으로 읽혀졌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다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보았다고 해서 자신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때로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의 나를 보이도록 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나 이었던 그 시절을 다시 그려내 복원하는 일뿐이었다고. 보이지 않는 자신을 자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필한 워커의 집념은 이야기의 재생이 곧 한 인간의 부활임을 증명하는 작가의 고집으로도 생각되었다. 그것은 모든 작가의 숙명이기도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나는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기에. 하지만 우린 살아있는 한 이 작품의 워커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다. 우린 우리 앞에 거울이 없으면 절대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면에서 특별한 노력없이도 나를 보고 있는 타자들은 그래서 보이지 않는 나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거울인 것이다. 워커는 소설속 인물들을 통해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자신을 비춤으로써 ‘보이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자신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보이는 자신을 확인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들뢰즈라는 거울을 통해 비추어본다면 우연은 보이지 않는 자신을 보게 하는 존재의 필연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보너스로 생각된 세실의 일기장은 꼭 이 작품의 특별부록 같았다. 이 작품에서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은 결국 문학이었다. 소련의 이중첩자생활을 해온 보른도 오지에서 재회한 세실에게 제안한 것은 자신의 회고록이었다. 다만 보른의 회고록은 ‘보이는’ 자신을 ‘보이지 않는’ 자신으로 은폐함으로써 자기인생의 우연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오지에서 밝혀지는 비밀도 우연이 아닌 이미 정해진 숙명적 음모였음을 암시함으로써 이러한 보른의 고집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세실은 진실을 알게 된 보답으로 보른의 고집과 심리적 폭력에서 탈출한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을 모른 채 엄마와 첫사랑은 죽었고 회고록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새로운 의미부여의 시점과 마주친다. 세실에게 주어진 최종발언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 작품에서 가장 완벽한 환상의 심미성을 연출한 장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불모의 땅을 탈출해 눈앞에 펼쳐지는 신비한 광경. 태양이 내리쬐는 불모의 땅위에서 5,60명의 남녀 흑인이 땀흘리며 돌을 두들기는 순간. 먹고 살기 위한 일념으로 망치의 속도를 유지하며 일정한 음률의 음악을 생성해내는 그들의 살아있는 리듬. 세실의 귓전에, 머릿속에, 가슴속에 울려퍼지는 돌들의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오늘의 교향곡이었을까. 그것은 지금까지 우연적인 마주침이 있어 왔기에 앞으로도 새로운 마주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거대한 종소리는 아니었을까. 지독한 슬픔을 주는 사람을 만났듯이 환희에 찬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우연의 희망, 희망의 우연은 아닐까. 이 작품은 이렇듯 세실의 마음속에 영원히 울리게 될 ‘돌들의 음악’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희망의 여운을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실이 떠나게 될 새로운 여행이란 다시 그 우연성에 의지하는 나머지 生의 기다림, 그 희망의 기대일 것이다. 세실은 다시 워커와 같은 사랑을 만날 수도 보른과 같은 원수를 만날 수도 있다. 그때까진 뜨거운 태양아래 온몸으로 돌을 깨며 땀을 흘리듯 주어진 역할에 기뻐하며 자신을 견뎌내는 수 밖에는 없다. 그것만이 수많은 우연이 모여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연을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문득 이런 내 글을 우연히 읽게 될 누군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생은 단 한 번의 우연이 여러 번 모여 필연적 삶이 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우연의 주체라 한다면 나는 오늘 발생할 우연에 잠시 설레여보고 싶다. 이 우연이 혹시 이 책을 선택하게 하는 뜻밖의 행운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우연이 그 사람에게 어떤 개인적 필연으로 발전한다면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기는 커녕 그 책임이 퍽이나  막중했던 것이다. 부디 나와 같이 소설의 재미, 문학의 쾌락을 동감하는 당신이었길 바라본다. 그것은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사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우연은 우리가 나눈 유일한 소망이었기에. 행운을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