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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어떻게 살아도 평생 바보는 아닐 줄 알았던 자신이 결국 바보일 수 밖에 없었던 당시 현실을 실컷 욕설하는 글이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욕보이는 능력을 타고난 존재이다. 존 케네디 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 작가는 아무래도 ‘문학’으로 자신을 조롱하며 ‘글재주’로 현실을 견뎌낸 것 같다. 뭐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겐 문학이 왜 희망이 되지 못했을까. 아니 왜 끝까지 희망으로 문학을 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다른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니 할 줄 아는 게 오로지 문학만 있었다면 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소설은 많이 아는 자가 많이 아는 것을 토로하는 거대, 거사의 현장이었다. 대체로 어떤 아비규환의 참사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나는 그의 지속적인 토악질이 고통스러웠다. 책을 덮고도 사건현장인 그곳, 그가 달아난 연민의 구덩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그건 페이지를 넘길수록 두터워진 슬픔의 더께때문 이었을까. 이 작품은 주인공이 웃길수록, 상황이 기가 찰수록 더더욱 쓸쓸해지는 구석이 있다. 불행히도 나는 오백 오십 페이지나 이 서러움을 견디고 참아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묵직한 알 수 없음의 실체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건 애환이 아니라 애증이었다. 전대미문의 애증후박(愛憎厚薄) 코미디, 미국은 이런 이야기가 대단히 잘 먹히는 나라였다.
허나, 여긴 미국이 아니고 나는 미국인이 아닌지라 이 작품이 전혀 웃겨주는 코미디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식으로 연출해보라 한다면 가족간 약간의 신파가 섞인 新조폭계(?) 블랙 컬트무비쯤 될까. 우리네 조폭코미디는 ‘컬트’라기 보다는 ‘컬투’에 가까운데 분위기는 오히려 시니컬한 비극쪽으로 이해되었다. 너무 웃기면 끝에 가서 눈물도 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당하고 나니 결국 눈물도 슬픔이 되는 것이었다. 그건 이 작품을 집필한 작가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더더욱 막지 못하는 어떤 목메이는 숙연함이라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美德)은 작가와 어머니의 실제 관계가 본 서사에 투사되었다는 그림자효과일 것이지만 그러한 작가는 정작 이 작품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자살하였다는 것 또한 충격적인 악덕(惡德)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끈질긴 투항으로 작가 사후에 출간된 이 작품이 퓰리쳐 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는 것은 다시 봐도 대견한 공덕(功德)의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우린 이 작품에 후덕(厚德)한 인심을 발휘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바보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정작 바보를 명백히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책에서 ‘바보’는 등장하지 않는다. 혹시 그들이 ‘바보’로 보였다면 그 바보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결탁’하지 않는다. 그 어떤 무엇을 결탁하여도 어짜피 바보 짓일텐데 그건 바보를 두 번 죽이는 일 아닌가. 그들은 그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차라리 온전한 바보였다면 조금 덜 슬펐을까. 그들은 딱 바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영리했다. 다만, 그들이 한데 모인 모양새를 보니 마치 대단한 인권신장을 위해 집회를 결성한 듯 보여지기는 했다. 이들의 탄탄한 결속력이야 어짜피 소설가의 몫일 뿐이었다. 다행히 검둥이, 뜨내기, 부랑자, 이방인, 퇴역 빈민등으로 구성된 뉴올리언스 프렌치 쿼터 구역의 주민들은 단지 모여들었을 뿐인데 ‘버번거리 광란의 사고’라는 기사로 대서특필된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흥행에 성공한 것이요, 스타로 탄생된 인물도 있었으니 ‘바보들의 결탁’은 이들 바보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젠 체하는 다수 ‘바보’들의 시각일 뿐이었다. ‘바보’는 부끄러운 오해였고 ‘결탁’은 치졸한 오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똑똑했으며 그 모임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모아놓고 보니 그들은 모두 인생의 패배자요, 하층민인 것은 더욱 분명해 보였다. 다만, 그들은 바보로 보였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결탁도 의미성을 부여받지 못할 것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성되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그 모임이 어떤 중요한 결정의 순간임을 암시하는 生의 갈림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도 모이고 보면 문학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바보도 그려놓고 보니 이토록 생생한 주연으로 탄생하였다는 것, 모임아닌 모임, 이 한 번의 결탁은 허구이상의 현실감을 제공하며 철저한 비현실속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하였다. 그것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갈 땐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덮고 난 후 서서히 밀려드는 웅장함이었달까. 바보에 압도된 중력의 힘은 마치 거구의 육체로 등장한 주인공의 쇼크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남들은 죽는다고 웃어 대지만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얼마나 죽도록 슬프단 말인가. 이 책은 바로 실컷 웃다가 천천히 울게 되는, 울다가 다시 살이 돋아나는 그런 책이다. 이 책에서 다양한 종류의 바보들이 결탁하여 앞으로 무언가를 펼칠 것으로 기대되는 최초 발기대회쯤으로 보이는 그들의 마지막 아우성은 애처롭게도 어리숙한 사복경찰의 검거로 중단된다. 잡으려고만 작정하면 모두 하나같이 잡혀들어 갈 이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우발적으로 모인 것이 필연적으로 흩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그네이셔스는 백화점 앞에서 그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불량한 행색 때문에 경찰의 불시 검문을 받지 않았던가. That's all right !, 그러므로 ‘바보들의 결탁’은 결과적으로 바보짓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단 한명 우리의 주인공 이그네이셔스는 가장 극적인 탈출을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 같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한다. 허나 그가 그곳을 탈출하였다고 과연 바보의 삶을 버리고 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짜피 또 다른 형식의 바보로 살아가기 위한 변장이나 회피의 연장은 아니었을까.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과거나 미래를 말하지 않는 작품이었다. 이그네이셔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바보가 되었으며, 과연 앞으로도 계속 바보로 살아갈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만큼이나 기구한 작가의 운명때문이기도 했을까. 바보는 탈출하는 순간 그러한 마음을 먹는 순간 더 이상 바보로 행복하기는 힘들다. 물론, 서사의 중간에 여자친구와의 튀는 학창시절이, 마찬가지로 여자친구와의 불안한 미래가 언급되긴 했지만 그건 통털어 지금의 이그네이셔스를 더 부각하는 참고사항 정도로만 인식되었다. 그는 아무리 돌아가고 아무리 나아가도 지금 제자리, 그 육중한 거구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를 것으로 보였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시점에만, 오늘의 시간에만 매달려 하루하루 살아가는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내일 희망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와 노동여건때문 만은 아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가는 마치 자신을 변호하듯이 이그네이셔스가 이렇게 된 이유를 꽤 사회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염된 미시시피강을 아버지를 대체하는 상징적 존재로 미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노력을 현실과의 소통 실패문제로 진단하며 전 예술분야에 걸친 미국의 이러한 위선때문에 자신은 소통이 부재된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설파하고 있었다. 자연의 진실마저 왜곡하고 변형하는 그들과 소통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은 옳고도 아름다웠다. 자연과 사회와 인간과의 소통에 실패한 이그네이셔스는 누가 뭐래도 초록색 사냥모자와 장밋빛 앵무새를 개성있게 코디하며 보란듯이 자신을 과장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회에 어울리는 유사색이 아니라 정반대의 보색으로 자아를 배색한 그는 결코 크리에이티브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그의 주변엔 하나같이 튀는 선글라스와 우스꽝스런 악세사리, 싸구려 텍스쳐의 옷감등으로 억압된 자아를 분출하는 지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를 참가하듯 각자 개성이 넘치다 못해 시각적 요소만으로도 공공질서에 피해를 주는 것으로까지 묘사된다. 동등하게 수상해 보이는 이들은 미국식 ‘버티기 정신’과 ‘요령’을 타고난 자들이기에 오가는 말 또한 자기중심적이며, 행동거지 또한 감정적이다. 속사포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는 이들 간의 대화는 1960년대 미국 뉴올리언스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진지하게 상기시키며 그들만의 독특한 지방색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대가 다르며 나라가 달랐던 내가 모두 공감할 순 없었지만 뭐랄까, 무엇보다 ‘바보’된 그들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보는 아니었지만 바보로 보여져 바보같아진 그 ‘마음’ 만큼은.
몇 가지 의미심장했던 장치들을 떠올려 본다. 표면적으로 그의 첫인상이 되 버린 ‘초록색 사냥모자’의 초록색, 그것은 왜 초록의 계절과 초록의 내일이 되지 못했을까. 이 책에서 이그네이셔스의 첫 번째 직장 ‘리바이 팬츠’사(혹시, 리바이스 청바지의 회사인가 싶었던)의 여든이 넘은 경리보조 미스 트릭시도 하필 초록색 셀룰로이드 챙모자를 쓰고 출퇴근을 한다. 그 외에도 작가는 서사에서 초록이나 파랑을 그다지 싱그럽게 묘사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 답은 바로 리바이 팬츠사의 안주인 리바이 부인에게 있었다. 도저히 60년대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그녀의 대저택엔 딱 하나 색상보정이 되지 않은 불량한 TV가 있었는데 그 화면에 등장한 배우의 얼굴은 온통 초록색이었던 것. 총천연색이 되지 못한 배우의 초록 얼굴은 흡사 시체를 연상시키며 공포스럽고 혐오스런 인간군상을 표상한 것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이그네이셔스의 모자나 곧 죽음을 앞둔 트릭시 부인의 모자나 미국의 보수기득권 층에서 보기엔 매한가지 초록의 흉물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가장 촌철같은 철학적 메시지로 자주 언급되는 철학서는 어떤 의미에서 이그네이셔스의 좌우명이자 우리네 삶의 아포리즘이 아니었을까. 중세사상의 기반을 닦은 철학서 <철학의 위안>에서 핵심개념으로 등장하는 로타 포르투나이rota Fortunae, 즉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 책을 덮고 나자 문득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바로 ‘우리의 운명은 행운과 불운이 주기적으로 번갈아 찾아온다’는 이그네이셔스의 말을 빌어 그의 탈출에 행운을 기원함과 동시에 내게도 운발의 전이를 소원하는 일말의 기대때문이었다. 여지껏 내 삶이 불운이었다면 앞으로는 행운일 수 있다는 희망, 오늘 잠시 행운이었다면 다음에 찾아 올 불운을 잊지 않으며 지금 오만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그것은 내가 오백페이지 넘는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따스한 잠언이었다. 이 책은 ‘바보’의 유머라기 보다 ‘현자’의 충고에 가까웠다.
겉으로 바보로 보였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지적이고 철학적이었다는 것을 일일이 증명이라도 하듯 작가는 이그네이셔스의 언어, 문학적 능력을 열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작중에서 그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인물로 표현되었는데 그는 주로 ‘대화’할 때 세계 언어를 쓰는 사람이었고, ‘저술’할 때 세계 철학을 반영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말빨과 글빨이 되는 문학적 소양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상의 대화에서 ‘벨탄샤웅(독일어, 세계관’), ‘세구로(스페인어, 물론입니다’), ‘레자프리캥(불어, 아프리카인들)’등의 외국어를 관용적으로 사용하며 언어의 유희를 일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친구가 된 이탈리아계 아주머니가 사용하는 이탈리아 방언에서부터 라틴어, 이디시어까지 때와 곳을 불문하고 자유자재로 튀어나오는 그의 언어구사력은 말들의 잔치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작가가 부여한 주인공의 능력은 혹시 작가 자신의 무기이자 매력은 아니었을지. 이러한 유희적 말장난과는 사뭇 다르게 그가 작정하고 연작한 근로청년의 ‘일기’나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글은 그의 사고가 마냥 엉뚱하고 터무니 없는 무지에서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일기는 무겁도록 철학적이었고 편지는 차갑도록 논리적이었다. 어떤 반전과도 같이 글로써는 누구보다 지적인 면모를 보여준 이그네이셔스의 ‘저술작업’을 읽는 일은 이 작품을 넘기면서 가장 흥분되고도 놀라운 참 기쁜 순간이었다.
특히, 이그네이셔스가 리바이 팬츠사에 취직해 사장의 서명으로 거래처에 보낸 짧은 서한은 그의 세계관과 논리체계를 한눈에 증명하는 짧은 뉴스였으며 이 책에서 가장 짜릿한 시놉시스였다. 그건 거의 작품의 주제였고 작가가 에둘러 하고 싶었던 속마음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고발장으로 눙쳐진 그의 농담에 허가 찔리기라도 한듯 나는 착잡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자사 제품의 바지기장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포목점 사장에게 그는 상대의 황폐한 세계관과 상업적 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뒤떨어진 마인드를 신랄하게 지적한다. 한낱 뭣도 모르는 치기로 비롯된 억지라 하기엔 진실로 아까운 문장들이었다. 그저 전통적인 방식의 바지 기장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벗어난 칠부 바지를 남성패션의 대명사로 만들지 못하는 기업은 광고, 판촉의 전략에 전혀 창의적 마인드가 없다는 것과, 디자인과 재봉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리바이 팬츠’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유통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 판매업자의 자질이라 꼬집은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처음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는 여타의 글에서도 대체로 투쟁적, 호전적인 성향을 유지하며 사상으로서는 누구보다 혁명적인 환타지를 논리화하곤 했다. 이것은 대부분 현실에 무능력한 자들이 글로써 세상에 항거하는 전형적인 무혈문학의 한 장르일 것이다. 그런데 반복되는 이 글들의 기저에 흐르는 하나된 공통점이 있었다. 책을 덮고 서서히 떠오른 단어,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보에겐 주어지지 않는 상대적 ‘박탈’이었다. 그는 혹시 새로운 발상, 새로운 형식을 수용하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을 향해 혼자서 바위에 계란 던지듯 미친 척하고 그까짓 종이 한 장을 휙, 날려 보낸 건 아닐까. 실패한 사람들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고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겐 무조건 편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자기식으로 울분의 펜을 휘갈긴 것은 아닐까. 그것은 혹시나 완성도가 높지 않았을지 모를(그러나 누구보다 새롭다고 생각했을) 자신의 원고를 문전박대한 세상에 대한 분노의 항거는 아니었을까. 그의 방바닥에 온갖 잡지사에 보내려던 그 많던 원고들은 쓰디쓴 시위의 각혈이 아니었을까. 그 서한이 오십만 달러의 소송에 휘말리게 될 운명이었던 것은 역으로 자신의 글이 오십만 달러의 값어치가 있다는 타당한 계산에서 비롯된 반증은 아니었을까.
비록 소설이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이그네이셔스가 어머니와의 갈등을 풀지 못하고 끝내 헤어지는 것으로(마지막 여자친구의 구원등판은 너무 허리우드적이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파멸의 주체이자 평화의 적군이었다. 그의 집 현관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이라는 문구가, 집 정면 벽에는 ‘선의의 인간들에게 평화를’이라고 써 있었다고 하던가. 악의가 아닌 선의를 가진 이그네이셔스가 평화를 얻기 위해 치룬 댓가는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는 것이 나는 가장 가슴아팠다. 그건 문학으로 부자관계를 이별시킨 마지막 자기예언으로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성공을 기대한 독선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갈등의 정점에서 그는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자살로 生을 마감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의 입신을 위해 마치 잘 짜여진 각본의 개성있는 조연으로 인상깊은 연기를 펼치신 한명의 배우와도 같았다. 그렇다. 소설가는 그 둘 중 하나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이번 비운의 소설가 한 사람과 뛰어난 배우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의 기이한 예술적 정신에 크게 감명받았다. 사악한 문명속에서 추락을 막아주는 안전장치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유문이 막힌다’는 그의 재치는 평소 ‘횡경막이 껄끄럽다’와 ‘십이지장에서 멈추었다’는 나만의 문장노트에 추가하고 싶은 애교였다. 그가 제시한 두 가지 트라우마, 배턴루지의 강사직 면접 탈락과 동거동락하던 개의 죽음은 한 인간의 내적, 외적 동기를 희석시키는 적절한 사건으로 구성상 치밀했다고 느껴진다. 그 외 검거실적이 없어 화장실에 감금되던 순찰경관 민큐소, 오프닝 나이트때 새와 함께 대박을 친 바텐더 달린, 포르노 유포검거에 큰 공로를 끼친 꼬마건달 조지, 부랑자와 검둥이, 청소부 사이에서 번민하던 뒷골목 자아 존스, 그들의 약점만을 공략하던 ‘기쁨의 밤’의 영업주 레이나, 이그네이셔스로 회사생활의 참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관리자 곤잘레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치매이었던 귀여운 바보 미스 트릭시, 아이들을 통해 남편을 조종하려던 리바이 부인, 또 그것을 적당히 속아 넘어가준 현명한 바보 리바이 사장, 철도회사에서 사십오년 근무한 퇴직연금으로 데이트하던 엄마의 남자친구 클로드, 그리고 그의 둘도 없는 천생연분 여자친구 머나, 이들 모두에게 나는 ‘미국에선 유죄로 밝혀질 때까지는 누구든 무죄’라는 이그네이셔스의 충고를 빌어 안부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바보가 그립다. 이제 바보도 전략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라는 바보 프로젝트가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합류한지 오래이다. 바보를 생각하자니 퍼뜩 자신을 ‘바보’로 낮추어 부른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워진다. 이 책에서의 바보는 그러한 따스한 바보가 아니고 성공하지 못한 부류, 돈없고 빽없는 그러나 자존심만 있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여진다. 스스로 자각하는 바보가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바보인 것이다. 모두 다 진정한 진짜배기 바보는 아닌 것 아닐까. 정말 바보들은 자신들의 자화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실제 바보가 아니면서 바보가 편할 때, 바보가 유리할 때, 바보가 좋아보일 때의 그 바보의 개념만 원했던 것은 아닐까. 오늘 내가 슬퍼지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스스로 생각하는 바보도 남들이 바라보는 바보도 아닌 나는 어떤 종류의 바보일까,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모든 욕심 버리고 바보같이 살고 싶다가도 한편 세상모르는 바보로 비쳐지는 것이 두려운 이 얄팍한 갈등 때문이다. 산다는 게 바보여야 할 때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현자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 합리화하며, 늘상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속세에 연연하는 이 미련을 그들을 통해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동감을 말하고 싶지 않은, 적당히 눈감아 주고 또 적당히 웃어주며 사는 것이 편하다는 충고를 해주고 싶은 비겁함 때문이다.
오, 포르투나, 그대 변덕스러운 여신이여. 이번엔 어느 차례의 수레바퀴이실 런가. 삼신할머니의 랜덤만큼이나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여. 나 오늘만큼은 그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려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복권을 바라는 일확천금의 유혹에서 벗어나 보고자 한다. 그건 행운이냐 불운이냐 눈감고 바퀴를 돌려대는 댁들의 일정일뿐 나의 계획표는 내 손안에 든 나만의 펜으로 작성하려 한다. 문득 이 책에서 한 번도 제대로 공연하지 못한 장밋빛 앵무새가 떠오른다. 장밋빛 꿈을 꾸던 그 새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앵무새를 슬그머니 두줄긋고 그 위에 파란 잉크로 ‘행복의 파랑새’라고 적어본다. 그리곤, 그 옆에 ‘바보’ 이렇게 새겨본다. ‘사랑해’ 말하고 나면 더 사랑하고 싶어지듯 ‘바보’ 하고 나니 바보도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혹시 그대에게도 이 바보짓은 유효할지 모르겠다. 그래 가끔은 바보도 하늘을 보자! 우린 서로를 바보라 불러도 행복해지면 되는 사람들, 저 하늘을 보며 바보처럼 활짝 웃어주면 그만인 사람들, 그렇게 결탁하여 오늘 못다한 혹시 행운일지 모를 내일을 맞이할 사람들, 그리고 남몰래 그들을 기다리는 바보같은 나, 정말 바보도 좋을 사람들이니까. 우리의 결탁은 한낱 바보짓만은 아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