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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도 색깔이다
그리젤리디스 레알 지음, 김효나 옮김 / 새움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작가도 화가도 창녀도 아닌데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미 고인이 된 분에게 할 말은 아니나 참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인으로도 밥먹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만으로 아이들을 키우긴 힘들었을 것이다. 책을 덮고 생각했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문학이라기 보다는 수필형식을 취한 일종의 자서전이라는 느낌이 든다. 작품으로서 평을 하고 서사에 관여하기가 참 난감한 것이다. 그리곤 자꾸 인생에 관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가 무어라고 남의 인생을 평하고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도 위선이다. 웃긴 거다. 만약 내가 반기문이나 오바마의 자서전을 읽고 글을 쓴다면 본받을 점을 하나라도 찾아내어 내 인생에 책값 만큼이라도 도움을 얻고자 그들의 인생을 관찰했을 것이다. 작가는 창녀였고 소설은 창녀로 살아간 자신의 이야기이기에 멈칫하는 내 자신은 같은 여자로서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았을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시간들이 자꾸 다가오는 겨울마냥 떨리고 쓸쓸했다. 어느새 많이 추워지고 있었다. 추위를 준비하고 싶지 않은 미련이 어울리는 책이었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자꾸 두 손으로 애꿎은 어깨를 주무르곤 했다. 머리와 마음뿐 아니라 피부의 감각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마지막 한숨은 길고도 무거웠음이다. 딱딱하게 말라버린 살갗을 뚫고 나온 최후의 수증기 같은...모두 내 것인데 그 낯설음도 버거웠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사진으로만 판단하자면 줄리엣 비노쉬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딱 반반씩 섞은 묘한 얼굴이다. 강렬했다. 뭐랄까 프랑스식 자유와 미국의 실용이 적절히 배합된. 호기심에 이끌려 뒤져본 그녀의 사진은 투병중인 병원에서가 마지막이었다. 아무런 주석도 소개도 없다면 사진만으로는 전혀 직업이 창녀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넘치는 고결함이 느껴졌다.(그렇다고 창녀사진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선입견이 그 눈빛에 부끄러워지는 순간, 속에서 물컹한 무엇이 출렁였다. 책으로..글로만 엿본 그녀는 만신창이가 다 되어 형편없이 피폐된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한창 창녀일을 할 젊은 시기엔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함, 오드리 헵번의 깨끗함도 저리 가라 할 매력은 무어라 설명해야 하는지. 물론 사진이야 설정이나 웃음이 의도되었을 수 있지만 찰나의 짧은 순간도 그 시절 길고 긴 시간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 동영상을 찾아 더 살아있음을 느끼기로 했다. 어느 여름날 오후 귓가에 스치는 그녀의 목소리를 잊지 못하고 번역을 하게 되었다는 옮긴이의 말이 생각나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뒤지곤 그녀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작년에 그녀의 시신이 제네바 묘지에 이관될 때 그녀를 추모(?)한 어느 동영상에선 춤추는 그녀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름한 방에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예술을 하다 간 것이었다. 그림도 그릴 줄 알고 글도 쓸 줄 알았지만 혼자서 만끽해야 할 고독이 아니라 두려움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에 꽃을 피우는 창작활동을 한 것이다. 그래야 내가 덜 슬퍼질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직업을 당당한 하나의 예술행위로 생각했을 거라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은 다행히 그녀의 적성(?)에 맞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예전에 '직업체험관'이라는 프로젝트를 설계할 때 직업적성 검사 존(zone)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끼리 우스개 소리로 창녀도 어엿한 직업인데 적성에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필요한 능력이 있을테니 이색직업에 왜 넣지 않는 것이냐 농담따먹기 한 적이 있다. 아마 그리젤리디스가 우리 회의에 자문을 해주었다면 그녀는 일장연설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았을까. 우린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쳐대지 않았을까. 비록 굶주림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단지 그만둘 기회가 없어서 혹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창녀를 지속해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직업적 보람, 정당성, 의미부여면에서 결코 짧게 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되는,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 우리 발목을 잡는다.


검정도 마음이다 

저자는 여섯 살에 흰 가운을 입은 독일인 의사가 자신의 편도선을 떼어내는 동안 그 옆에서 손잡아준 흑인 간호사를 시작으로 흑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전 생애에 걸쳐 이어간다. 『검정도 색깔이다』라는 책의 제목은 실은 '검정도 사람이다'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검정색을 독립적인 색감으로 인식했다기 보다 흰색이나 검정이 아닌 나머지 색깔들에 대한 상대적인 색감으로서의 색성(色性)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한창 전쟁중이던 유럽에서 독일인을 향한 증오와 경멸에 대한 반대급부로 형성된 자연스런 가치관이었을 것이다. 성장한 후에는 기독교적 시각과 사회 계층적 시선에 대한 반기였을 것이다. 전쟁세대들이 빨간색을 빨갱이로 동일화하듯 색깔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다분히 이데올로기가 반영되 있다는 느낌이 든다. 허리우드 영화에서 주로 흑인은 범죄자, 빈곤층으로 등장하는 장면에 생각없이 노출된 우리로선 참 신선한 시작이었다. 그때 그녀가 흑인간호사의 무릎에 앉지 않고 동양인의 보살핌을 받았다면 그녀는 무어라 말했을까. 흑과 백의 대립이 주는 극적 재미가 반감되는 황인종은 그때부터 주연은 아니었던 것인가 보다.

그녀는 교사였던 부모 밑에서 엄격한 청교도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취리히 장식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스위스 로잔 태생이(기까지 하)다. 올림픽의 도시, IOC본부가 있는 로잔엔 올림픽 박물관(Le Musee Olympiqe)이 있다. 우린 공공디자인을 벤치마킹하러 로잔까지 날아갈 뻔 하기도 했다. 여기까지 본다면 당연히 프랑스로 유학하여 산업디자이너가 될 듯한 삶의 이력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녀의 인생은 로잔만큼 향기롭진 않았다. 반드시 한번은 꿈이 꺾이고 말았을 터, 그런 그녀...스스로 집시의 피를 물려받았으며 밤을 사랑한다는 예술가 성향을 지닌 그녀에게 검정은 일종의 꿈과 맞바꾼 절망의 색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희고 깨끗하면서 속으로 시커먼 위선을 감춘 자들이 아닌 겉으론 암흑과 구분되지 않는 어둠이면서 속으론 욕망에 깨끗이 승복한 자들의 진짜 마음색깔을 보게 된다. 물론 모든 검정이 다 솔직하고 문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걸핏하면 거짓과 폭력을 일삼는 주인공이 되어 그녀를 배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선천적으로 인간의 검은 본능에 이끌려하는 본능에 솔직함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크리에이티브가 있었다. 다시 검정을, 희망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인식해야 하기도 했지만) 예술가에게 검정은 하양이나 빨강, 파랑이나 초록과도 공평해야 한다. 그녀는 예술을 할 수 없었어도 예술적 가치만은 잃지 않고 검정을 사랑한다. 실은 자신을 향해 '검정도 색깔이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겠지만, 그녀는 부러 그렇게 한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더 보란듯이. 그녀는 백인에게서 아이를 낳았지만 파경 후엔 줄곧 흑인과 사랑을 하는 집착을 보여주기도 한다. 창녀일을 할 때엔 백인은 받지 않는 나름의 자존심으로 오히려 백인을 자극하고 조롱하며 복수하는 면모도 보여준다. 그녀에게 검정은 색깔이 아닌 마음깔 아니었을까.


검정도 사랑이다

 

그녀는 20세에 결혼하지만, 6년 만에 파경을 겪은 후 독일로 떠난다. 토끼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였다. 책에서는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있던 흑인 애인을 구해내어 같이 도망치는 모험을 감행하는 용감한 여성으로 등장한다. 사랑을 할 때 누구보다 뜨거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불 안가리는 예술가 특유의 광기어린 열정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특히, 그녀가 사랑하는 흑인들의 가슴에 안겨 사랑에 복받침을 노래할 땐 한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시적부력이 습관화된 작가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터라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서사시들이 반갑진 않았으나 그 문학적 표현력만큼은 목메이도록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온몸으로 뼛속까지 울어본 자 만이 토해낼 수 있는 외침이고 울음이었다. 폐부 깊숙한 상처로 피 흘려본 자만이 내뱉는 노래였다. 그녀는 현장을 묘사할 때도 사람을 그릴 때도 아주 색감좋은 물감으로 굵은 터치의 그림을 그리듯, 마치 원고지를 캔버스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강하고 볼륨감있는 회화적 문체는 책을 덮고도 잔상으로 남았다. 작가들마다 관용스러운 표현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녀의 인물묘사엔 유난히도 동물들이(불독, 황소, 코끼리, 고양이, 호랑이, 늑대, 까마귀등)자주 등장해 그 인물군상들이 동물의 사육제를 연상케 했다. 덩어리로 묘사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때론 야만스럽게 때론 원색적인 야성미를 제공해 주었다. 더불어 자신의 육체에 굉장한 자기애가 형성된 여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방광염이나 매독에 걸려서 육체와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에서도 심리적으로는 자기파괴가 일어나지 않아 절대 자신에 대한 패배감은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자부심이 직업적인 결과인지 그러했기에 직업적인 자괴감을 느끼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많은 남성들과 오가는 폭력적인 장면에서조차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가 두들겨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폭력을 한껏 조롱하고 비웃어 주는 것 같았다. 그때의 상처들을 이렇게 더 아픈 글로써 치유한 것은 아니었을지.

책에는 많은 흑인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그 모두를 최고로 사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흑인들을 만나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상처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성장한 듯하다. 정신병자 빌의 경우 어쩌면 지난한 도주와 인생 추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그를 증오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굶주림속에서도 자신의 학업과 취미, 교우관계에 있어 철저히 이기적인 태도를 보여준 빌이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말한다. 하늘색 캐딜락을 모는 흑인친구와는 헤어진 뒤에도 집시 야영장에서의 파란색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배신마저 하늘에 띄워 버린다. 그러한 순정을 아는 '새까만 쁘띠슈슈'라 불린 흑인은 그녀로부터 매독에 전염되었으면서도 오히려 다행이라 배려하며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가 선사한 다이아몬드 반지는 왜 그들의 영원한 사랑을 기약할 수 없었을까.

그녀가 그를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던 열아홉, 로드웰. 그녀는 로드웰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집시 야영장과 호텔을 전전긍긍하는 길거리 생활에서도, 로드웰이 군인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도, 자신이 7개월간 형을 살고 나왔을 때에도 좀처럼 헤어지지 않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었기에 그와의 이별은 사무치는 아픔이었던가 보다. 우연히 발을 들여 놓게된 마리화나 밀매를 왜 적절한 선에서 그만두지 못했는 지 창녀로서의 삶과 직업적 선택보다 더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었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마약의 원산지 모로코로 가야했는 지 돌아와서도 적당한 시점에 발을 뺄 수는 없었는 지 본인도 그부분 만큼은 통한의 후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쩔 수 있었는데도 끝까지 발을 빼려하지 않은 점은 화가 나도록 많이 실망스러웠던 그녀의 치명적인 과오...였다.


검정도 아름다움이다



그녀의 순탄치 않은 삶에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가족이상의 존재들. 그녀는 헝가리계 독일인 소냐와 집시들의 아버지 타타를 중심으로 한 집시들과의 소란스러우면서도 소박한 식사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마음과 몸을 부비고 한데 모여 정을 주고 받은 그녀의 집시야영장 시절이 한편의 영화처럼 낭만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녀가 '매춘도 혁명이다' 주장한 부분에는 온전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전후 당시 창녀의 사회적 역할에는 많은 기여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다. 그녀는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어를 하며 독일에서 살았다. 제네바는 국제적 매춘으로 유명한 도시이며 뮌헨은 전후 다양한 국적의 군인들이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이미 유명세를 탄 인사로서 1975년 '창녀들의 혁명'을 외쳤다. 그리곤 다시 제네바에 자료센터를 만들고는 병들어 왕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 시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남성들을 위로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국가에서 인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치면 그 공로는 우리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더 억만금일 터이다. 나는 그녀가 예술가로서 창녀를 부르짖고 예술로서 창녀의 역할과 권리를 말하였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불문율과도 같은 주홍글씨가 낙인이 아닌 감사패로 여겨질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우리사회에선 아무리 재능많은 예술가라도 사생활이나 도덕적인 부분에 있어 똘레랑스가 잘 허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인으로서의 책임이나 본보기를 더 강조하여 조그만 실수나 잘못이 감지되면 사회적인 맹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 책 외에 그녀의 작품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양한 방법으로 매춘을 표현하고 설득, 공감, 이해시키려 죽기 직전까지 활동한 듯하다.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매춘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남긴 많은 작품과 이야기들은 오히려 그녀의 매춘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감흥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머리로만 이해하고 끄덕이는 것은 공감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울리게 하는 그녀만의 가장 자신있는 방법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재능이 그녀의 쓸쓸했던 인생만큼이나 안타까왔다. 우리는 이 같은 발견의 행운만큼 그녀를 위로해야 하지 않을까.

많이 힘겹고 당황스런 독서였다. 책을 덮고 나면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고, 이전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가 있다. 이 작가에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냥 프랑스 팡테옹과 비교된다는 제네바 왕립묘지로 달려가 그녀의 이름앞에 꽃 한송이 바치고 싶다. 세상 누구보다 뜨겁게 살다 간 사람에게 다시 태어나도 그보다는 뜨겁지 못할 것 같은 존경의 인사는 하고 싶어진다.  

 

 

오늘 나는 작가, 화가,창녀라 쓰여있는 그녀의 묘지앞에 고개숙인다. 당신의 글은 당신의 그림은 당신의 사랑은 모두 검게 불타오르던 완전한 인생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캄캄한 하늘에 당신의 이름을 세 번은 불러보겠다고. 그 이름은 하늘보다 검더라도 분명한 색깔로 기억하겠다고. 그 색깔은 내가 아는 이 세상 어떤 색깔보다 아름다웠다고.
 




<덧붙임> 

사진출처:

http://rezo.photoshelter.com/image/I0000xjiH9eXVG1k
http://www.myspace.com/maggykills
http://www.rfi.fr/actues/articles/122/article_14405.asp
http://www.rtve.es/mediateca/videos/20090311/entierro-una-prostituta-ilustre/444729.shtml
http://www.rtve.es/rss/videos/noticias/TE_PSUIZA.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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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5 2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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