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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 ㅣ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0년 7월
평점 :
어떡하나 이 작품 참, 붉고, 뜨겁고, 비리다.
킬킬거리며 재미나게 읽어서는 안 될 이야기지만 두어 번은 빵시레 터진 웃음으로도 모자라 배를 잡고 뒹굴었다. 웃겨서도 웃고, 웃기지도 않아서 웃고, 웃을 수 밖에 없어서 웃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이고 작가고 주인공이고는 온데 간데 없고 가슴이 도둑맞은 것처럼 헛헛해 졌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심정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애저녁에 흘러간 시간, 가버린 사람들 일텐데 미안함과 서글픔이 이렇게 뒤늦어도 되는 건지. 나도 그런대로 역사나 민족, 전쟁에 관한 이야기엔 그다지 호락호락한 독자는 아니건만 평소에 나름 쉬크한 시선은 어디가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한구석이 시크무레 짜르르 자려왔다. 김별아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영국시인 새뮤엘 존슨은 '작가의 가장 매력적인 힘 두 가지는 새로운 것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new things familiar)이고, 친숙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familiar things new)'이라 했던가. 내게는 무척이나 새롭고도 친근하게 느껴진 작품이니 위대한 작가의 말을 빌어 그녀에게 예를 표하고 싶다.
사투리나 비어, 속어, 은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문장이 참 찰지고 구수하다. 마치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나 시골마을에 등장하던 약장수의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는 기막힌 말빨은 요소요소에 해학이나 풍자, 희극적 장치를 전문적으로 배치하는 그녀의 세련된 글빨로 포장되면서 무엇보다 읽는 재미, 즉 소설의 흡입력에 가속도를 더해준다 할 수 있겠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꼭 그 시대의 사람(작가)이 동시대의 사람들(독자)에게 마치 일이 발생한 그 당시에(실시간 중계처럼) 이야기 해주는 것 같은 현장감은 작가의 섬뜩 하리만치 놀라운 이야기꾼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 시켜주었다. 새로웠지만 친근을 선사한 주요원인으로 생각한다.
또 하나,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라는 특수(?)가 문화, 예술 전반에 불어 닥쳐 역사, 전쟁이나 민족관련 컨텐츠를 넘치게 만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 나는 이 작품도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터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비교적 친근한 서사를 예견했었지만 그 나물에 그 반찬 쯤으로 생각했었던 독자적 쿠리터분함에 작가는 시원하게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그 역시도 이미 익숙한 컨텐츠를 신선하게 엮어내는 작가만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가미가제 독고다이』...가만히 제목을 두어번 읖조려 본다. 노랗게 뜬 보름달위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하얀 마후라를 둘러맨 청춘 위에 별처럼 떠있는 운명의 이름. 이 작품은, 아직은 일제 식민지였던 1940년대 태평양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하필 청춘이었던 한 젊은이가 어쩌다보니 일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자살특공대원이 되기까지의 우연과 필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어줄 되는 작품의 소재만 보아도 우리네 과거사가 늘 그래왔듯 참으로 기가 막히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편의 비극영화 일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작가는 남의 나라, 남의 전쟁에 목숨을 바쳐야 했던 이 기구한 비극적 서사를 가장 남루하고 희극적인 인물을 내세워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무엇보다도 희망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면서 자주 웃는다. 우습고 웃기고 웃다가 울다가 그렇지만 웃을 수 밖에 없고 그러기에 더 눈물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결국 배경과 소재는 비극적 상황이었으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피보다 진하고 뜨거웠다. 이 작품은 어쩌면 '피'에 관한 이야기 일 것이다. '피'로 이어져왔고, '피'에 맞선 '피'같은 이야기...역사적으로는 식민지라는 피할 수 없었던 시대의 '피'를, 신분으로서는 천민이라는 혈통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어진 '피'를 가지고 태어나기도 했고 살아가면서 생사를 가르는 전쟁이나 운명적 사랑과 같은 '피'를 마주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피'를 끝까지 부정하며 도피했고, 누군가는 물보다 진한 '피'를 인정하며 받아 들였고, 또 누군가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피'를 내놓는다.
운명으로 정해진 피와 운명처럼 마주한 피와 운명을 헤쳐가야 할 피는 모두 붉었고, 뜨거웠고 비렸다. 하지만 그렇게 슬플 것만 같았던 그들의 '피'도 우리 가슴에 '별'이 될 수 있다니. 붉은 피가 하얀 별이 되는 '가미가제 독고다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별이 되어 돋을새김한 이야기니 사설이 길었다. 피같은 별을 이제 어떻게 간직할까나.
이 작품은 사실, 주인공 하윤식이라는 젊은이가 일본의 전쟁에 징집되어 군대에 입대한 후 어떻게 자살특공대의 역할을 맡게 되는지 보다는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의 아버지, 어머니와 형, 그리고 그가 사랑한 여인과 관련해 먹이사슬 같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핵심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 얽힌 가족史나 자신이 그 속에서 자라온 성장史에 포커스를 두지는 않는다. 물론 이야기 하는 화자는 가미가제독고다이가 되버린 '나' (하윤식)이지만 객관적인 시점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굉장히 깊고 예리하다. 즉, 인물 한명 한명에 대한 밀도 높은 묘사, 극적인 구성, 인물 분석에 대한 집중력과 통찰력 때문에 가족 구성원 이라는 연대감보다는 개별적 인물로서의 존재감이 더 부각되어 보였다. 이러한 배경은 하윤식이 천하의 날나리 난봉꾼 꼴통임을 아무리 자처해도 결국엔 모두를 위해 언젠가는 한방을 터뜨려 줄 것을 기대하게 되는 무의식적 기대감을 높이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 그가 희생되더라도(희생된 사실을 확인하더라도)각오하겠다는 독자의 의지를 심어주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당연히 비극을 예상하고 울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들을 향해 또 한번의 반전을 시도하며 슬픔마저 계산적으로 준비하려했던 소심한 독자들을 향해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이라 돌이 아닌 '별'을 띄운다. 결국 우리는 울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웃어야 할 상황이지만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배반아닌 배신감을 맞보며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 했던 우리 자신에 패배감을 느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왜 ! 끝까지 살고자 하지 않았던가. 왜 희망을 찾지 않았던가. 웃기지도 않은 것들에는 그렇게 쉽게 웃어주었으면서 진짜로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는 우리는 비겁하지 않았던가.
주인공이 살아 남아서 기쁘지 않은 최초의 작품이었다.
다시 피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쇠날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가 백정이라는 천한 피를 결국 받아 들이게 되는 모티브가 된 것은 올미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할머니와의 피섞인 입맞춤이었다. 이들은 소의 피를 보고 그 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피는 부정할수록 삶이 두려워질 수밖에 없는 멍에인 것이다. 하지만 올미는 겁간을 당해 피를 쏟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시작려는 의지를 다짐한다. 올미의 의연함은 피(상처)에 대한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라 아무리 천한 피로 태어났어도 무력과 권력으로 더러워진 피에만큼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올미의 피를 나눈 쇠날이가 비로소 자신의 백정신분을 받아 들이게 되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장면은 그들이 피를 섞어 낳은 아들이 훕시이고, 다시 훕시의 아들이 하윤식이 되는 것이니 만큼 면면히 흘러 내려온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족으로서의 당당한 핏줄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라 할 것이다. 하윤식은 이러한 쇠날이 할아버지를 이해하는 유일한 핏줄로서 훗날 현옥과의 입맞춤(쇠날이와 올미의 그것처럼) 이후 비로소 삶에 대한 공포가 아닌 붉고 뜨겁고 압도적인 생에 대한 희망으로서 그 유전자를 꽃피운다.
훕시는 어떠한가. 그는 만세운동 때 눈앞에서 뿜어 나오는 동족의 피에는 무감했지만 자신이 백정의 핏줄인 것은 평생토록 부정해가며 혈통과 신분을 세탁하는데 피터지는 노력을 쏟는다. 돈은 없지만 양갓집 출신 신여성의 피를 수혈 받아 백정의 피를 희석시키려던 노력은 그 시대와 잘 어울리는 이해 할만한 발상이었다. 하윤식의 어머니인 최씨는 '피는 못 속인다'는 진리 앞에서 자신의 피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던 가장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단지 시기와 열등감을 느끼던 베스트 프렌드와 사귀던 남자 하계운(훕시)의 계산적 구애를 받아 들이며 겉으로는 열정의 피를 쟁취한 것 처럼 보이는 주인공으로 자존심을 회복하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피(동맥)를 끊음으로써 수혈(결혼)에 대한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된다.
훕시와 최씨의 두 아들, 하경식과 하윤식을 보자. 훕시의 전처 아들인 경식은 자신의 혈통을 알기 전까진 고매하고 우아한 인격의 '주의자'로 허허로운 집안을 탈출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피에 대한 비밀을 알고 부터는 오히려 자신을 기만하고 배반 하는 것으로 피를 자학한다. 혁명가로서 경식을 존경하며 위장부부로 행세해온 현옥에게 경식은, 아버지의 의처증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웃는 대신 새롭게 꾼 꿈이었다. 그녀는 경식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으로 다음 세대의 희망의 피를 이어간다. 동생 윤식이 어린 시절부터 늘 자신의 별이었던 형의 여자 현옥을 사랑하게 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 이었을까. 우연적 필연이었을까. 열일곱살 때부터 인생의 폐허 속에서 자신을 부지기수로 망가뜨려온 윤식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잠복해온 희망의 핏줄은 간절히도 갈망하던 핏빛과 다르지 않았다. 현옥과 형을 위해 죽으려 했지만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미치도록 살고 싶어지는 그의 뜨거운 핏기(血氣)에 가슴이 홧홧해진다.
일본 군대에서 우연히 조우한 자칭 조선민족 대표선수 시메스케(장성우)의 특공대 출격날 화장실에서 그를 위해 불러준 아리랑이 나지막히 들려온다. 시메스케는 엷게 웃고 있지만 왜 그런지 눈물이 난다는 쇠날이의 아들 훕시의 아들 윤식이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 누구집의 아들이었는가. 고려시대 거란을 막으려던 충신 하공진의 후손인지 임진왜란 때 우연히 백정의 집안에 흘러들어 양자가 된 혈족의 후손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의 피도 우리처럼 누구보다도 붉었고 뜨거웠을 것이라는 것.
우연의 운명을 믿느냐 했다. 우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의 어처구니 없고 생뚱맞고 기막힌 필연을 아느냐 했다. 우연적 필연이든 필연적 우연이든 피로 이어진 인연은 의미없는 피로 끝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비장함이 생겨난다. 아비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떨어진 사람도, 태어나 마주해야 할 운명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이 내게로 다가온 우연은 어떠한 필연으로 꽃피려나.
마음이 망망하다. 문득 윤식이 현옥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사한 연꽃 무늬에 쌓여있던 고무신이 향내롭다. 그녀처럼 우리도 포기 없는 삶을 지르밟고 한걸음 한걸음 비록 지옥같은 세상 일지라도 발걸음은 떼어봐야 하는 것일까.
죽기직전까진, 삶과 죽음의 복불복이 끝나는 그 순간까진 멈추지 말고 걸어는 보아야 하지 않겠나.
※ 작가의 능수능란한 의태어, 의성어 구사 솜씨가 참 신기하고도 매력적이어서 적잖이 흉내 내었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몇 번이나 사전에 검색해 봤다. 그동안 내 국어 실력이 형편없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고 덕분에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된 점 꾸벅 인사는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