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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ㅣ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평점 :
오해였었다. 이슬람도 그렇고 정육점은 더욱 더 제목부터가 벌써 엽기나 그로테스크한 살인에 어울릴 법하여 갸우뚱 했었고, 혹시나 역설을 이용한 유머가 짜릿할 것인가 나름의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모두 다 설익은 편견에 불과했고 오해를 한만큼 고개를 숙이도록 하는 진중함을 선사한다.
'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내 몸에는 여전히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 속에는 필연적인 '피'도 출현하고 흉측한 '흉터'도 등장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불편한 소재로도 의문스러운 편안함을 제공하고 마는 작품의 미덕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작가의 문체와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모노톤의 절제된 문장력도 있었겠지만, 소설의 서사와 서사를 이어주는 작가만의 논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진부하거나 평범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 놓지 않고 살짝 건드려 주었으면 하는 그 부분을 찬찬히 긁어 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피'는 결국 보이지 않게 연결된 내면의 '핏줄'일 것이며 그 결과로 각인된 흉터는 과거의 상처가 아닌 '미래로의 충동'으로서 아리게 돋아나는 새살일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작품 속 주인공의 상처와 흉터는 왜 끝내 우리들의 그것을 아물게 하는 힘을 가지는 것인지...그래도 많이 아프다. 그저 그러하고 말 것이 아니라 염치 없지만 이번에도 무언가 돋아나는 순간이길 바래본다.
작품에 마치 산을 내려와 일선에서 은퇴한 느낌의 이름을 가진 '하산'아저씨라는 터키인이 등장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전에 모 방송에서 6.25특집으로 방영한 '터키군 장교와 한국소녀의 60년만의 재회'를 다룬 다큐프로를 시청했다. UN군의 일원으로 6.25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전쟁고아인 5살 한국소녀 ‘아일라’(터키어로 달그림자)와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60년 동안 그녀를 위해 기도한 사연이었다. 장교는 1년 반 동안 부대 막사에서 아일라를 키웠지만 귀국명령을 받고 그녀를 한국의 고아원에 맡겼다. 제작진은 어렵게 그녀를 찾게 되고 결국 장교와 백발이 된 할머니 아일라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에선 가족 모두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군은 미국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파병되었기에 전사자 또한 많다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을 읽은 후 터키 참전 용사들이 당시 전쟁고아들을 하나둘 모아 직접 고아원을 만들기도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바로 그렇게 자신이 치른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데려다 살붙이로 정을 붙이며 살았던 하산아저씨가 어쩌면 실제인물인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고,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형제의 나라', '우리는 형제의 피를 나누었다'는 문구들이 새삼 온몸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흉터라는 비밀과 만나다
어쩌다보니 나는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했는데, 또 어쩌다보니 그만 내 몸에는 십센티나 되는 거룩한 칼자국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살면서 그다지 그 순간을 기억하거나 특별히 흉터라고 인식하지 않다가도 대중 사우나만 가면 나처럼 아랫배에 칼자국이 남아 있는 여자들을 잘도 골라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같은 상처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은 애초부터 서로 자석처럼 이끌리게 되어있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데 또 미안한건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이 반갑기는 커녕 될 수 있으면 저만치 떨어져 두번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새겨진 흉터가 새삼 창피하다기 보다는 고통을 알만한 사람들끼리 당시의 상처를 부러 회상할 것 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회피가 인지상정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흉터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꽤나 위로받을 만한 일이지만 만나서 들쳐보며 반추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고 싶다는 뜻이려니.
여기 그 끔찍한 흉터가 원인과 결과에 있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총상에 의해 부모님과 헤어져 고아가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나'와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인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모스크 근처 허름한 정육점을 운영하는 '하산아저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다른 국적, 다른 환경의 이방인 관계지만 같은 전쟁에서 총상에 의한 흉터가 같다는 표면적인 이유는 혈연이상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상호운명적인 비밀의 열쇠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들의 주변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인 야모스 아저씨와 한국 군인으로 참전했던 대머리 아저씨, 충남식당이라는 국밥집을 운영하는 안나 아주머니, 소설가가 꿈인 말더듬이 친구 '유정', 4차원으로 생각되는 '맹랑한 녀석'이 각자의 상처와 흉터를 간직한 채 한마을에 살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정확치는 않으나 전쟁직후와 비교적 가까운 시점에 이들이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상처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연 또는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소설 속 인물들의 상처는 곧 그 사람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처가 삶 자체가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지독한 외상후유증과의 싸움일 것이다. 하산 아저씨는 전장터에서 폭격과 동시에 우연히 날아든 사람의 살점을 달콤하게 한입 먹어버린 충격으로 오히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파는 것으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려 하고, 야모스 아저씨는 그리스 내전 당시 전투기를 몰다가 적병으로 오인한 사촌 일가를 죽인 죄책감 때문에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숨어 속죄의 삶을 살아가려 하고, 대머리 아저씨는 참호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후 전쟁 당시의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는 늘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불러대며 모든 전투 상황을 공부하여 자신이 참전한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으로 잃어버린 기억에 속죄를 구하려 한다. 이들은 전쟁의 결과로 가슴이나 어깨, 얼굴, 뇌에 치명적인 흉터가 남겨지게 되고 그것은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비밀로 자리잡는다. 이들처럼 흉터의 기원을 알지 못하는 '나'는 이들 앞에서 알 수 없는 비밀에의 매력만 감지 할 뿐이지 구체적인 탐구나 분석같은 건 해볼 수 조차 없는 공허한 흉터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비밀이 된 그들의 흉터가 늘 그립고 반가웠던 것은 아닐까.
미래와 공유하는 비밀을 알다
두렵긴 해도 비밀에 접근하고 비밀을 알아가는 '나'의 논리는 말더듬이 친구 유정의 말만큼이나 힘겹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감격적이다. 기억의 돌팔매질을 뛰어넘지 못한 고아원 담장에 대한 원망이나 누군가를 그리워 할 때의 심정과 흡사한 기분이라는 석유 사르는 냄새가 비밀에 다가가는 첫 걸음이었다.
'나'는 스스로 비밀을 알게 되기까지 운명론에 깨우침이 남달랐는데, 운명은 면식범처럼 우리주위에 기거하면서 호시탐탐 우리를 수렁에 처 넣으려고 기를 쓰는 녀석이기에 안다고 믿어 방심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최초이면서 최후인 발길질로 끝장을 내버린다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운명론에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그림자나, 흉터, 비밀, 고아를 따져보면 남루한 동네는 비밀마저 남루하다든가 죽기 위해서는 먼저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야 한다든다, 그림자가 어둡고 검으며 잿빛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가 하는 피해의식이 낭자하지만 그 흉터가 폭력에 의한 것이든 실수에 의한 것이든 혹은 선천적인 것이든 모든 흉터는 언어처럼 서로 관계를 맺는 다는것, 고아는 오래전 부모에게 피를 물려 받기는 했지만, 그 피가 누구에게 물려 받은 것인지를 날마다 상기시키는 피붙이가 없기에, 그렇게 녹슬어 버리는 존재라는 것,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지진의 진원은 과거이며, 행복이나 고통도 실내를 채운 공기처럼 공유 할 수 있다는 것에 이르면 그의 운명론은 필시 절망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앞선 흉터의 상징 3인방과 함께 치유를 상징하는 세 명을 다시 운명처럼 조우할 수 있다. 유머와 속담으로 인생을 낙관하는 안나 아주머니는 하산, 야모스, 대머리 아저씨를 해학적인 위로와 모성으로 감싸안는 인물이다. 남편의 부고를 듣고 트럭을 한 대 빌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교외로 나가는 소풍을 추진하게 되고 등장인물들 모두가 바람 속을 거닐며 소박하지만 자연과 서로에게 위로받는 치유의 장을 마련한다. 소설가가 꿈인 연탄장수의 아들 유정은 말더듬이지만 동물들과 의사소통의 매개체가 되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모든 일에 희망이 없어 보이는 맹랑한 녀석도 대머리 아저씨와 6․25 참전용사들의 모임에 다녀온 후 그의 상처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그의 군복 등속을 태우는 것으로 의리를 선사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이 아니라 머무는 동안 무얼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이라 말해준다.
등잔 밑이 어두운
흉터를 가졌으나 그렇다고 치유만을 바라지는 않았던 '나'는 잡지나 신문에서 사람 얼굴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 스크랩을 하기 위해 신문을 뒤적이면 매번 같은 얼굴을 만나고 그 안에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다 있었다. 그렇게 스크랩된 사진들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하나의 세계지도를 만들었더니 결국 인종이나 국가, 종교 등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는 없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하나의 표정으로만 인식되어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만 확인 할 뿐이었다. 나라와 성별, 생김새가 다른 얼굴만을 오려 스크랩하는 취미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후반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해 주는 친절함에 일말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형제란 그런 것이니까...결국 인간은 서로를 공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깨닫게 될 것이니까.
얼굴의 세계지도를 그려가며 그토록 만나보고 싶었던 인간의 표정이란 어떤 모습일까. 모든 사람들이 서로 깔고 앉았다 일어나면 생겨나는 하트모양의 엉덩이 자국, 바로 우리가 가장 수치스러워 하는 곳에 감춰진 비밀처럼 그 엉덩이 속에 있었던 것이라 말한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하산아저씨가 물려준 의붓아버지의 피에 '사랑'이라는 색깔을 칠해도 무어라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고 싶다. 의자에 남겨진 흉터는 인간에겐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사랑으로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리라. 작품에서 군대, 사회, 국가와 같은 것들에 맹렬한 증오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물 흐르듯 작가의 논리에 순응한 결과 얻어지는 최고치의 비밀이자 진실이라 할 것이다. 비밀은 여기, 우리 사는 이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