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쪽이 더 슬플까

 

 

요즘 아예 ‘놀토’가 없어졌다. 토요일은 그냥 모두 언제나 노는 날이 된 것이다. 우리 땐 토욜 4교시도 참 기다려지는 날이었는데 주 5일 문화는 이제 공교육에까지 확대되었다. 덕분에 아이와 같이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아이들은 공부에서 해방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요즘 토요일에 영화관에 가보면 아침부터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린 사람들 붐비는 게 싫어 늘 조조영화를 보아왔는데 지난 토요일도 아침부터 만원이었다. <코리아>를 좀 뒤늦게 본 편인데 영화는 아이와 함께 보기 재미있었지만 약간 뻔 한 구석이 많아 감동의 수준은 ‘우생순’이나 ‘국가대표’ 급에 못 미친 것 같다. 하지만 배두나(리분희)의 절제와 몰입에 놀랐고 김응수(북한측 조감독)의 멱살 잡히는 장면, 한예리(유순복)의 실감나는 사투리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하지원 연기는 사투리고 스포츠고 워낙 익숙해서 이제 여간해선 감동을 받기가 힘이 드는데 그래도 마지막에 버스 떠나는 장면에서 울며 매달리는 특유의 우는 연기는 찡했다. 실제 상황이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우린 항상 버스타고 떠나는 북한사람들을 버스 밑에서 울면서 보내는데 익숙하다. 두 가지 다 해보았는데 확실히 떠나보내는 쪽이 더 안타깝고 눈물이 많이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울음이 터져버렸기 때문에 또 뒤돌아서 잘 일상에 복귀하지 않았을까...

 

 

 

#2. 어느 쪽이 더 솔직한 걸까

 

 

나는 사람마다 울 때 내는 흐느낌의 소리는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슬픔에 복받쳐서 우는 소리는 연기로 조절하기 상당히 힘든 영역이 아닐까. 왜냐하면 극도로 슬퍼야지만 나오는 그 사람만이 가진 목소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웃어야지만 나오는 소리가 있고 아파야지만 나오는 신음소리가 있듯 울 때 나오는 목소리는 울어야지만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표정, 흐느낌의 패턴은 다른 사람이 따라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바꿀 수는 없는 듯 하다. 이것은 신체의 각 조직이 반응하며 일어나는 복합적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고유성의 영역에 속한다. 어떤 사람은 울 때 꼭 입을 막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꼭 이불을 뒤집어 쓰는 것도 연차적인 행동반응이다. 그런데 우는 건 웃는 것 보다 일반적으로 더 솔직하고 속일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우는 연기가 다양하다면 연기의 고수가 확실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우는 연기가 다양하려면 다양한 상황에서 울어봤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우는 연기의 달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웃는 것도 참 억지로 못할 일이지만...

 

 

#3. 많이 운다고 예술이 더 깊어질까

 

 

그런데 가수나 배우들을 보면 인생의 경험과 나이와는 상관없이 감동을 선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모두 연기의 달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일까.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게 연기와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마 나이 들어서도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연기력은 그대로인 중견배우들을 보면 예술이 꼭 인생의 경험과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예술이 탄탄해질 수는 있겠지만 예술가의 역량이 높다고 산전수전 다 겪은 건 아니라는 말씀.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썩 반갑지가 않다. 계속 노력하다보면 무언가 되겠지... 하는 생각에 회의가 많이 든다. 한 살 더 먹었다고 더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더 많이 이해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더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다. 내가 가진 조그만 재능이 더 빛을 발하긴 커녕 한계만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우울한 요즘이다.

 

 

 

#4. 얼굴이 예뻐야 주연을 하는 걸까

 

 

주말이 지났지만 자꾸 생각나는 배우가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배우였기에 우린 어렵지 않게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기억해냈다. 알고 보니 짧게 나왔지만 미친 존재감만은 강렬하게 기억된 배우였다. 아이와 나는 공교롭게도 그녀가 출연한 <하모니>와 <퀵>을 보았다. <퀵>에서는 폭주녀로 잠깜 나왔는데 이민기에 키스를 한 누나뻘 옛날 불량애인?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사진을 못찾아서 아쉬웠다. <여인의 향기>에서도 재일교포로 나왔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이 김재화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한눈에도 개성 있는 조연을 하기에 적당한 외모를 가졌고 약간 올라간 눈꼬리와 광대뼈 덕분에 중국인 역할에 딱인 포스이다.

 

 

 

- 중국의 덩 샤핑(영화에서는 덩 야령)을 연기한 김재화. 내 기억으로 덩 샤핑은 아주 단단한 체구의 단신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중국인으로 보이는 강렬한 인상이 얼마나 중국인으로 보이고 싶어했을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모니에서 권달녀 역으로 출연한 김재화. 맨 오른쪽 뒤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사람. 교도소에서 짧게 나왔지만
존재감만은 최고였다. 완전 범죄포스에다가 욕설이나 행동도 재소자에 빙의된 모습... 노래는 어찌나 또 오버해서 하던지...

 

 


-여기저기 프로필 사진들을 찾아 봤더니 이 사진이 꼭 동남아시아 항공사(싱가폴이나 홍콩)
스튜어디스 같아 슬쩍 가져왔다.

 

 

 


- 전혀 다른 눈빛이 너무 강렬해 오래 매력을 기억해두고 싶었다.

 

 

 

그녀는 알고보니 중앙대 메릴스트립으로 불리던 한 연기 하던 연극배우였다. 80년생인 것에 비해서는 얼굴이 좀 노안이긴 하다.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김윤석, 황정민의 공통점은 연극바닥에서 발성과 연기를 익힌 배우들. 그러니 그녀도 대성할 배우의 자격쯤은 갖춘 셈이다. 이제 여자 배우들도 저런 개성강한 얼굴이 당당히 주연으로 등극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신문에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하지원'이고 가장 연기 잘한다 생각하는 배우는 '전도연'이었다. 하지만 남자로 가면 얼굴이 매우(?) 잘 생긴 배우는 이제 하향세로 돌아섰다. 감독이 남자라서 그런 것일까? 관객이 예쁜 배우를 보기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제작자가 그림이 좋은 것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나도 스크린에 예쁘고 섹시한 여배우가 연기까지 잘하면서 등장하면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언젠가는 김재화라는 배우가 주연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아니 꼭 주인공이 되어 칸느에서 주연상도 타길 바란다. 본인이 칸느 카펫을 밟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서 하는 말이다. 실력이 능력이 되고 그것을 실력만큼 인정받길 바란다. 이상하게 그녀와 친분도 전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하고 우울하다. 책이 재미가 없다. 글이 허무하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이 생각 저 생각

잡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 기분이다.

 

 

 

 

 

 



 
 
마노아 2012-05-22 00:16   댓글달기 | URL
아, 하모니에 나왔던 배우군요! 이렇게 사진을 보고 나니 알아볼 수 있겠어요. 마지막 사진은 특히 강렬합니다. 저도 이 배우가 칸의 레드카펫을 당당히 밟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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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강렬합니다. 색상이 진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도 인상은 강렬했어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저자가 여러 방향으로 에둘러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 핵심을 전달하는 어법이었습니다. 인문서를 읽다보면 보통 처음에 정의를 하고 부연 설명을 하거나 반대로 설명을 이어가다 마지막에 결론을 내는 방법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방대한 다른 이야기로만 중심을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놀이기구로 말하자면 하이라이트는 없지만 전체를 둘러보는 식의 투어형 탑승기구를 상상하게 됩니다. 모두 둘러보았더니 출구에서야 모아진 하나의 그림이 남겨지는 것. 여행은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습니다. 호흡도 길고 끝까지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들었다고 꼭 끝에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진 않은데 그 하나의 그림을 무언가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해설이 참 고맙더군요. 평소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가졌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독자에겐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저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1979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주제를 미리 소개하는 세 차례 강연 모음집입니다. 강연은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이루어졌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경어체에다 설명위주로 구성되었어요. 강연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가 출간되기 전에 이루어졌지만 이 책은 원저 못지않게 자주 인용되며 경제사회학 분야를 비롯한 여러 강의와 세미나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원저는 너무나 방대하여 일반 독자외에 전문가로서도 힘겹다고 하더군요.

 

저자는 프랑스 역사학자인데 15-18세기 세계 경제사를 30년에 걸쳐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30년 세월의 결론을 그려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저술 하는데는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책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저자는 1985년 사망했는데 그렇다면 40대 후반부터 인생 말년기를 통털어 자본주의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집요하게 천착한 것이 됩니다. 바로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닌 ‘역사가’였다는 것이 이 책을 꿰뚫어보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듯합니다. 저자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변하지 않고 오래 지속(장기 지속)되는 것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말합니다. 아주 핵심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전제조건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거의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것, 인간의 명료한 의식 밖의 역사, 인간이 능동적 존재라기보다 피동적 존재로 놓이게 되는 역사’ 를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는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 생활을 지탱해주는 습관 같은 관행을 ‘물질생활’이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있는 삶이며, 인류의 삶은 절반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고 보았어요. 예를 들어 화폐와 도시는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일상적인 생활의 뼈대를 이룬 구조물입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표층의 역사’가 아니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 지속하는 ‘심층의 역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을 결정하는 구조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좀 섬직한 이야기도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 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존재이지만 역사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 200년, 10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그 역사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기나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일뿐. 자본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텐데 그렇다면 그 언제를 정확하게 말하려면 인간 생활의 변화부터 포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는 14-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약 400-500년 동안 유럽에서의 경제를 해부했어요. 이 책이 의미 있었던 건 현재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 뉴욕 이전에 서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의 흐름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그 시기 서유럽을 살펴보았더니 맨 밑에 물질생활, 그 위에 시장경제, 그리고 맨 위에 자본주의가 위치한다는 구조를 발견했어요. 400년 이상 서유럽에서 장기 지속했던 이 구조의 특징은 바로 상업자본주의의 주된 특징들(운송, 상인, 화폐, 무역의 역할 등)이었고 이 오래된 역사가 사실상 자본주의를 탄생케 하였다고 본 것이죠.

 

당시 교환메커니즘은 중국이나 이슬람등 유럽 외에도 있었지만 거래소와 다양한 신용 형태같은 우월한 장치와 제도 덕분에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유럽경제가 다른 곳보다 앞서 있었다고 합니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한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이 슬프긴 하지만요. 그런데 저자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와는 구별되는 시대의 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라 주장합니다. 시장경제는 늘 역사가들이 무대의 중앙에 배치했던 주제이잖아요. 브로델은 역사가로서 애석한 점이 바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구분하지 않는 점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최하층에서 자본주의 실체가 맥박이 뛰는 것이 아니라 최상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시장은 공정하게 경쟁하는 게 아니라 독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일어난다고 보았어요. 장기 지속하는 역사를 보았더니 자본주의는 결코 경쟁에 바탕을 둔 게 아니라 경쟁을 없애는 반시장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반대되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늘 자동반사적으로 시장은 경쟁하는 것이 자본주의다 외워왔으니까요. (그런데 독점을 자본주의 본성으로 보는 것은 요즘 동네빵집을 잠식하고 있는 대기업 제과 프랜차이즈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아닌 독점으로 시장을 장악한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수직적 위계의 교환의 세계에서 상인자본가들은 선주이면서 보험업자이면서 대부업자, 차입자, 금융가, 은행가이기도 했어요. 한편 농장의 경영주이기도 했죠. 외려 하층은 전문화 되어 있는 반면 최상층은 전문화가 거의 없어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먼저 손에 자본을 손에 쥔 상인들의 기득권이 곧 선점효과였고 그것이 전문성 없이 유지되어온 배경이었어요. 당시 원거리 무역이 일어나면서 자본가들은 그들이 축적한 자본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고 해당 시대의 굵직한 국제사업을 장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즉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과정은 곧 최상층의 상거래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브로델에 의하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경쟁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데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그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죠.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본질적 요소인데 이 ‘불평등의 힘’, ‘소수 특권층의 힘’은 단지 경제 활동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수준으로 뻗어 나간다는 게 자본주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영국이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운 좋게도 전 세계가 도와주었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사회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어야 하는데 영국은 바로 그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안팍으로 갖추어졌기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나서 기초적 경제의 힘과 활력이 넘쳐났고 그러한 배경이 산업 자본주의를 받쳐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당도하는 ‘밤의 손님’이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좋아서 하고 싶다고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역사가는 ‘왜?’라는 문제보다는 ‘어떻게?’라는 문제를 더 편하게 접근합니다. 또 커다란 문제의 근원보다는 결과를 더 잘 알아 봅니다. 물론 그 때문에 역사가는 더욱 더 그 근원을 찾는데 열광합니다. 비록 그러한 근원들이 역사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를 자주 비껴가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 p94


역사가라는 직업이 원래 유럽에서 발달했잖아요.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는 건 항상 자신들의 과거였구요. 저자가 보기에 15세기엔 베네치아, 17세기엔 암스테르담, 18세기엔 런던, 그리고 19세기 뉴욕까지 자본주의는 상부구조에서 발달했고 지속적으로 세계의 불평등을 만들어냈다고 말합니다. 불평등을 조성해내는 과정은 당연히 권위적이었을 것이구요. 브로델은 자신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를 통해 유럽이 팽창했고 더불어 유럽의 경제계들이 자본주의적 과정을 거쳐 왔으며 이들 전형적인 경제계가 유럽자본주의를 낳았고 이것이 다시 세계 자본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결론 냅니다. 유럽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미국. 크루즈 여행으로 보면 자본주의 탐험은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결론은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경쟁이 아니라 독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자본주의이고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최상층의 존재라는 것. 자본주의의 특징과 강점은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하고 그 변화하는 국면에 따라 수도 없이 새로운 방법을 강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변화무쌍함의 와중에도 비교적 자본주의의 고유한 본질에 충실한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또한 자본주의 특징이라는 점. 그래서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고 언제나 자본주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자본주의가 곧 멸망할 것 같아도 어느듯 다시 생환해 있잖아요. (지금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읽고 있는데 몇번의 위기를 거치며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살아나던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정리할 계획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의 부제인 ‘브로델이 들려주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같은 뱀이죠. 머리가 9개 달린 괴물의 머리를 한 개 떨어뜨릴 때마다 두 개의 머리가 생겨났다고 해요. 바로 자본주의를 불사의 영속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독하고도 끈질기며 탁월한 유연성과 적응력으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역사가 아니라는 것. 소름이 끼쳤습니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목격할 때 이제 곧 자본주의는 사라진다는 기사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본주의는 필멸한다며 다음 세대를 위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들자는 책도 보았습니다. 세계의 경제계는 지금 이 시각에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기 위해 얼마나들 노력하고 있습니까. 몇 백 년 전부터 이미 형성된 자본주의의 역사가 새삼 두려워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대안도 중요하겠지만 변하지 않았던 과거의 원대한 흐름을 뒤돌아 보는 것도 오늘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좋은 거울이 될 듯 합니다. 무엇보다 한 평생 자신들의 과거만 연구한 역사가의 충고가 너무나 명징하기 때문입니다.

 

“ 수백 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들어옵니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처럼...”


프랑스의 역사가가 그려낸 세계지도는 과거의 강물이 현재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어쩐지 우리의 미래를 더 입체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아 그림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마치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사진처럼요.

 

 

 

덧붙임)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그림이 궁금해 찾아보니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작품 중 일부를 확대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산 루이지 교회에 그려진 그림 중 하나인데 제목은 <성 마태의 소명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이다. 마태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된 인물이다. 이 그림은 바로 세리(세무관리)인 마태가 예수의 부름을 받는 순간을 은유해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일생이 뒤바뀌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잘 보면 오른 쪽에 나타나 ‘나를 따르라’고 손짓을 하는 이가 예수이고 놀란 눈을 한 채 왼손으로 ‘나 말입니까’하는 인물이 마태 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책에서는 세금 징수업자였던 마태가 아닌 고개 숙여 돈을 세고 있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어 표지로 한 것일까.

 

 

 

 


자세히 보면 표지에서 돈을 향한 손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언뜻 보기엔 돈에 눈을 맞추고 있는 인물의 손 같지만 위에 손은 바로 마태의 손이고 아랫 손만 고개숙인 인물의 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면 마태는 왼손으로는 자신을 손가락질 하고 있지만 오른속으로는 계속 하던 일인 돈을 세고 있는 것이었다.

 

악덕업자로 불리던 세금관리는 그 시절 무척 안정된 직업군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의하면 16, 17세기 이탈리아는 자본주의를 태동케 한 일등공신이다. 자본주의가 일부 소수 특권층에게만 일어나는 최상층의 현상을 상징한다고 보았을때 이 그림에서 돈을 가리키는 손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표상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정확히 세고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와 상관없이 경쟁을 비껴나와 독점으로 향하는 히드라와 같은 괴물. 그렇다면 아마도 고개를 숙인 청년의 눈은 돈에 눈멀어 자본주의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나쁜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혹 사람의 욕심은 아니었을까...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진원 옮김 / 김영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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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바보를 위하여

 

이 책을 덮은 느낌을 단 한마디로만 말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부끄럽다’고 할 것이다. 두 마디로 가능하다면 ‘부끄럽다, 그리고 놀랍다’ 일 것이다. 세 마디까지 허용된다면 다음에 붙여질 한마디는 아마도 ‘내 자신에 대해 실망했다’, 정도가 될 듯하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생각의 오류를 낱낱이 해부한 책이다. 나름 생각이 너무 많아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과 비례해 꽤 합리적인 인간이라 자처했던 나로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해온 것들이 그저 불합리, 불공정, 비현실적인 사고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충격이 적지 않았음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러한 내 사고방식이 여지껏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해보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치 그동안 건강하리라 여겼던 오장육부에 대한 정밀검사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 나는 재미있고 인상 깊고 여운이 많아 감성을 자극하는 책을 많이 집어 들었다. 사고를 유도하는 책보다는 사고를 막아주는 책을 원했다. 물론 어떤 책도 그런 책은 없었다. 책을 쓴 사람은 이 책이 아무런 내용이 없다는 사실조차도 강렬히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이 반가우면서도 내심 두려운 마음이 많았다. 어쩐지 기존의 내 사고체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받게 될 것 같아서 였달까. 이 책은 분명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원하는 분들에겐 금상첨화일 듯하다. 더 나은 선택은 당연히 개인의 행복과 삶의 질과 관련이 있다. 틀린 생각, 잘못된 선택,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누구에게든 치명적인 불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이처럼 직접적인 내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책은 만나기가 어렵다. 누구나 책 한권 읽었다고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는 힘들며 그렇다하더라도 또 다른 책에 의해 언제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 책이란 그 책을 읽는 동안엔 그 책이 전하는 세상이 전부인 관계로 책과 소통한다는 것은 사실상 해당 저자가 그려준 그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책 밖으로 나오면 그 책과 반대되는 논리와 상황은 너무나 수두룩하다. 내 경우 두 권 이상을 동시에 읽지 않는 이상, 그리고 몰입을 전제로 한다면 보통 책 한권이 곧 한 사람의 한 가지 주장이라 여기게 된다. 그 한 가지 주장을 잊지 않기 위해 리뷰를 써놓으면 마치 내가 그 책을 더 잘 소화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유익한 순간은 곧 다른 책과 다른 리뷰로 대체되고 독서의 경험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아마 이 책도 세월이 흐르면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겠지만 내 기억 속엔 분명 여지껏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익한 책이었다는 인식만은 영구 저장될 듯하다. 그 저장된 라이브러리에서 가끔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의 종류를 다시 꺼내어 나의 선택과 판단에 적용해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듯 하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다른 이의 생각이나 책에서 펼쳐지는 논리를 따져보고자 저자의 주장을 다시 뒤져볼 것만 같다. 유익한 책이란 이 순간의 유익함이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는 절대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나는 감히 이 책이 유익하지 않은 독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이고, 그렇지만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만큼 논리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생각하는 바보, 그 인간의 바보 같은 생각을 다루었다. 이 책에 의하면 바보가 되지 않을 사람은 딱 한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하고 누구보다도 행복할지 모른다.

 

 

편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을 말할 때 흔히들 사고가 편향적이다,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인 비판에 해당한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평가를 듣지 않으려고 상충되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려 하고 내 판단의 근거를 찾아 제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객관적인 노력을 증명하려 애를 쓰곤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일일까? 관점을 이동시켜 사고한다는 것의 실현가능성, 그 완벽한 일치를 백으로 보았을때 결과는 반도 되지 않을 듯하다. 그저 피상적으로 가늠할 뿐인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누가 뭐래도 편향의 동물이고 편향은 직관이 추종하는 제 1의 천성이라고. 그저 자기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으로만 추론하는 휴리스틱으로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해온 존재였다고.

 

쉽게 말해 저자는 우리의 직관이 편향을 만든다 말한다. 그리고 이성은 편향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편향은 착각이 되고 고정관념이 되고 나아가 확신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전문가일수록 사고 체계의 오류에서 벗어난 판단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저자는 여러 실험을 통해 전문가들도 편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며 일반인과 전문인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전문가는 자신의 편향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인정하지 않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유일한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저자는 이 결론을 보다 흥미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시스템 1과 시스템 2(이하 S1, S2)라는 가상의 등장인물을 내세웠다. S1은 노력이나 통제 없이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직관에 해당하는 자아이며, 이 책의 주인공에 해당한다.(저자는 직관의 강력함을 증명했다) S2는 노력과 통제를 수반하여 느리게 진행되는, 의식하고 추론하는 자아에 해당한다. S1과 S2는 모두 우리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린 그들의 존재가 분리되어 활동하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S1이나 S2는 모두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상의 체계를 말하는 것이지 사후 반응 혹은 사고 후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일어난 후 한 사람이 감정상으로는 슬프지만 감정을 통제하여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는 행위를 감성 대 이성의 대결로 보고 이 구조가 S1과 S2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직관 대 이성은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빠르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 느리게 생각하여 판단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사고주체이다. 흑인으로 제시된 살인범의 몽타쥬를 보고 바로 혐오감을 가졌다면 S1이 작동한 것이고 범인이 여러 정황상 흑인일 것이라는 기사를 읽고 타당성을 따져보는 것은 S2가 작동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S1은 단순하고 S2는 복잡하며, 간혹 S1이 내 사고를 지배하더라도 잘 학습된 S2가 있어 결국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혹은 반대로 S2가 내 논리의 근거를 이룬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때로는 S1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경우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의 직관은 마치 무당이나 역술인처럼 예지능력을 의미하는 나만의 경쟁력이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관은 직관대로 나의 장점이며 사고력은 또 깊은 대로 나의 능력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혹은 ‘처음부터 난 예감 했었어’, ‘무슨 일이 터질 줄 알았어’, ‘그 팀이 우승할 줄 알았어’, 이런 말들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틀림없이 스스로의 직관을 꽤 대견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자신의 지식에 자부심이 있다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자신이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터이다. 간혹 실수나 착각을 하긴 해도 크게 봐선 논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해칠 만큼은 아니라 생각하며 그건 전체 생산총량 대비 불량률정도로 치부해왔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간혹 일어나는 실수에 해당하는 사고불량률이 가뭄에 콩 나듯 발생하는 합리적인 경우이고 나머진 대부분 실수와 착각과 오류로 얼룩진 시간이라 설명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과 결과만 해도 몇 십 개가 등장한다. 이 책의 예문을 읽고 정답을 추론하는 일은 흥미롭긴 해도 꽤 머리 아픈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배워 온대로 이성을 합리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며 살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살아갈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왜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을 의심하지 않을까, 였다. 논리는 지속적으로 의심하고 반론을 만들어 자기 이론의 타당성을 구축하면서 직관은 그러려니 해 버리지 않는가. (직관은 그것이 작동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혹은 직관으로 치부하기 싫은 심리때문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직관은 언제나 진실보다는 익숙함을 택하고 익숙함은 호감을 낳으며 호감은 기억의 패턴으로 굳어진다. 가장 허탈한 예로 한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 판사는 배고팠을 때가 식사가 끝났을 때보다 가석방 요청을 거부하는 비율이 크다. 의사 또한 피곤한 상태에선 오진을 할 확률도 수술에서 실수를 할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도 잘 갖추었다.

 

우리는 미모의 상담원, 인상이 좋은 영업사원이 권하는 보험이나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 가장 최근에 감동받은 영화,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상 깊은 책이 내가 경험한 가장 작품성 있는 컨텐츠로 대체된다. 잡지의 화보를 본 기억 때문에 그리스 해변 가에 살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광우병 소식 때문에 갑자기 소고기를 사지도 먹지도 않게 된다. 노인에 관한 문장, 노후에 관한 기사를 보면 느리게 걷게 된다. 돈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변한다. 발음이 쉽고 철자도 쉬운 회사의 주식에 끌리게 된다. 같은 결과라도 병원에선 생존률 보다는 사망률에 반응한다. 선거에선 객관적인 능력보단 자기 마음에 드는 외모를 보고 후보를 결정한다. 행복감은 언제나 현재의 마음 상태만이 기준이 된다. 혜택은 과대평가하고 비용은 과소평가한다. 복권은 아무리 당첨률이 낮아도 상금을 타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당첨 가능성 때문에 계속하여 사게 된다. 테러나 가스폭발은 위험률이 매우 낮지만 걱정하느니 마음 편하게 보험을 들게 된다. 쓰나미나 지진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내가 여행을 갈 땐 중요한 변수이다. 새로 생긴 식당에서 메뉴를 추천받았지만 후회할까봐 주문을 하진 않는다. 미래의 휴가는 마지막 휴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결정이 된다. 비싼 입장권을 내 돈 주고 샀기 때문에 눈보라나 폭우를 뚫고서도 야구 경기장으로 향한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며 손해를 보아도 다 경험상 좋은 실패였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옳고 좋은 판단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판단의 패턴은 반복되며 여간해선 수정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까. 저자는 의심을 지속하기 보다는 확신에 빠지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라 말한다. 내 생각엔 직관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보다 익숙한 그림을 택하는 이유는 그 선택이 인간을 더 편하게 만들기 때문인 듯하다. 즉, S2는 S1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인간은 좀 더 쉽고 편한 S1을 자꾸 지향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일부러 그러려고 느리게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받아 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몸이 편한 것을 선호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주의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사고도 편한 방식을 좇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 편한 대로 생각하는 무책임한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자기기만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그 내러티브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어떤 이야기에 인과성이 부여되면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개연성은 물론이고 타당성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좋은 일만 하고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고 나쁜 일만 한다는 무책임한 직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비난했다면 그 사람은 비난의 대상을 직관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논리는 차후에 직관을 정당화하려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사실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느닷없이 황당한 종류의 비판을 당하는 경우 이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방법과 자료가 없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경우 직관을 증거로 말하면 아무도 신빙성 있게 받아주지 않는다. (대개 함부로 오해하지 말라고 비이성적이라는 핀잔만 듣게 될 것이 뻔하다) 그만큼 직관은 그저 막연한 느낌이나 불확실한 심증정도로 과소평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인간관계뿐만이 아니라 운 때문에 발생한 일들에도 인과성을 부여해 정합성을 구성하길 좋아한다 말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장 말이 안 되면서도 자주 목격되는 예는 바로 장례식장에서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그 사람이 직전에 행했던 일들이 모두 사망의 원인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이가 죽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나봐... 그이가 그 일을 한 건 며칠 후 죽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 이런 판단은 사후편향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사람은 이미 발생한 사실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저자는 이러한 인지적 착각이 내 자신은 물론 내 인생까지 속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고한다. 바로 과거를 모두 이해했다는 착각이 우리 스스로 미래를 예견하고 통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나중에 보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사후에 평가하는 생각의 오류를 미처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이 심리는 미래가 불안 할 경우 더욱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방어기제가 되는 듯하다. 현재, 과거를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나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착각은 당연히 지금 위치의 자기 능력을 과신하게 만드는 조건이 될 것이다. 긍정을 지나 낙관이 꼭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위험이 닥치기 전까지 낙관은 현재를 버티는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산 주식이 판 주식에 비해 더 좋은 수익률을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실험결과에 의하면 투자자가 판 주식이 산 주식보다 수익률이 높게 나타났다. 저자는 가장 적게 거래하는 투자자가 가장 좋은 성과를 내며 여성이 남성보다 투자성과가 좋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주식에 있어 낙관은 그저 잘못된 직관의 하나의 유형일 뿐인 것. 대다수의 펀드 매니저는 포커게임이 아닌 주사위게임처럼 주식을 선택해 추천하고 거의 모든 주식투자자는 운에 좌우되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회사가 운을 기술로 착각하고 보상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주식을 투자할 기회는 있었으나 주변에서 이득을 본 사람을 보지 못해 실행에 옮기진 않아 왔다. 저자는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라서 그런 것인지 손해와 이익을 비교하는 데이터가 많았고 이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무척 흥미로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심리중 하나는 선택을 하는데 있어 ‘위험회피’를 지향한다는 심리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달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150달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보다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득보다는 손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골프 선수들이 보기보다 파 퍼팅을 할 때 성공률이 더 높은 이유는 손해를 두려워하는 심리가 강해져서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손실을 막고자 하는 이 심리는 자기가 가진 좋은 재화(예를 들어 와인이나 카메라, 자동차 등)를 포기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똑같이 좋은 재화를 얻음으로써 얻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슬픔이긴 하다. 이미 가진 것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는 심리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자들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득을 얻기 보다는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세상과 조직과 사람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된다. 저자는 그래서 방어하는 쪽이 이길 승산이 많다고 보았다. 최소한의 변화만 선호하는 우리 사회 보수지향자들이 왜 확실히 눈에 보이는 혜택보다 손실이 적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지지하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다.(이 논리는 이번 진보당 사태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비주류 진보주의자들이라 해도 그 속에서는 기득권과 비주류가 또 나뉘어 진다. 최소한의 변화만 원하고 손해가 적길 바라는 심리는 진보나 보수나 매 한가지라는 뜻이다. 사회가 진보적이길 바라는 것과 자기 생각이 진보적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와서 좀 충고해주었음 좋겠다. 이 책을 덮으면서 더욱 우리는 인간에게 실망해야지 진보에게 실망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곧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서 얻는 결과보다는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발생한 후회에 더 민감하다는 심리와도 연결된다. 지난 4.11 총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해온 대로 새누리당을 지지해서 결과가 좋을 것이라기 보다는 민주당을 지지해서 후회를 할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S1이 직관이고 S2가 이성이라 보았을 때 보수는 직관에 호소하고 진보는 논리에 호소했다는 사실도 내겐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S2는 대부분 S1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기려면 S1을 더 의심하고 더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진보주의자들이 꼭 탐독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생각에 관한 생각들이 개인의 삶과 행복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S1과 S2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생활하는 ‘경험자아’와 점수를 매기고 선택하는 ‘기억자아’의 출연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실제 느끼고 체험했던 시간의 경험보다는 그것을 기억하고 훗날 평가한 결과 치에 더 비중과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결혼을 보아도 만약 이혼한 사람에게 당신의 결혼생활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사람들은 좋았던 시간의 ‘경험자아’를 무시하고 마지막에 불행을 초래한 ‘기억자아’만 우대하여 결혼생활 전체를 평가하고 행복의 유무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삶의 질이 경험자아에 있으니 행복의 의미를 기억자아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결론은 S1와 S2, 그리고 경험자아와 기억자아, 사고하는 자신과 행동하는 자신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선택을 위해 S2에 더 많은 도움을 구하고 자신의 S1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 그것만이 바보 같은 생각을 줄이고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않는 길이라 조언한다. 생각보다 생각을 잘하는 인간이 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생각을 한다고 다 생각다운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수두룩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을 잘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는 일은 그다지 인간답지 않은 일일지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하길 싫어하고 잘못 판단하길 좋아하며 그러는 자신을 가장 편안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보다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완벽한 모순의 존재인 듯하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는 동안은 불변하는 딜레마일지 모른다. 생각은 그 자체로 미완을 의미하진 않으나 언제나 미완성의 결과로 인간을 곤경에 빠트린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그 곤경에서 탈출하는 방법 또한 생각하는 일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는 비인간적인 사람만이 완성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비인간적일 필요가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임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더욱.

 

 

 




 
 
마녀고양이 2012-05-18 15:58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의 글을 보면 참 합리적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논리 정연하고, 이론도 제대로 끌어다 쓰고, 자신이 주장하고픈 주제를 비판합니다.
그런 글을 언뜻 보면 S2를 제대로 활용한 것 같지만, 실은 S1이 먼저 작동되어 S1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을 타당화시키기 위하여 S2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S1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1은 편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이 잘못 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S2를 이용하여 포장하는 때도 있죠.

깨어있는다...........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쉼없이, 이렇게 노력하는 한사람님이 저는, 항상 좋아보이고 멋져 보입니다.
즐거운 주말 되셔요.

한사람 2012-05-21 11:04   URL

글로는 얼마든지 논리적이고 멋져 보이는 글 쓸수가 있죠...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글처럼 살지는 않죠.. 그렇게 살수도 없고.
글처럼 살려고 노력을 할 뿐인데 현실의 나와 글 속의 나 사이의 간극은
글쓰면서는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는 거 ㅠㅠㅠ

요즘은 글이 참 재미가 없어져요 ㅠ

가연 2012-05-18 20:28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들어왔다가 이 글을 읽네요. 요즘은 거의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으며 소일하는 경우가 많고.. 이렇게 로그인도 잘 안하는 편이라 그동한 뜸했습니다. ㅎㅎ 어쨌든..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아야겠네요

한사람 2012-05-21 11:07   URL

스마트폰으로 읽는게 편할 때가 많더라구요.
전에도 말씀 드렸는데 이 책 좋아하실 듯한걸요^^
서점에 나갔더니 이 책이 경제및 경영 분야에 전시되 있더라구요.
갸우뚱 했습니다. 경제학상 탔다고 그런걸까.. 내용이 그런 실험이 많아서 그런가..


된장 2012-05-19 05:36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배운 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바보짓을 해요. 사람들은 '느낀 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들어져요. 아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까닭은, 아이들은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아닌 '몸과 마음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든 믿음이든 늘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데, 사랑이라면 이렇게 되야 하거나 믿음이라면 저렇게 되야 하는 듯 자꾸 한쪽으로 내모는 '교육을 제도권에서 주입'시키고 '책으로 읽히'며 '지식으로 가두'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배울수록 바보가 돼'요.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말'고, 스스로 손에 호미를 쥐어 들판에서 몸을 놀리며 풀내음 흙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물내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익혀'야, 비로소 '마음을 슬기롭게 쓰며 착하고 참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깨달아요.

한사람 2012-05-21 11:09   URL

저도 사랑을 생각할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돼...사랑한다면 이럴수 있어야 해.. 이런 생각을 참 많이도 했던거 같네요 ㅠㅠ

'풀내음 흙내음 햇살내음 바람내음 물내음'이라는 말씀이 참 정겹네요~
결국 그 모든 자연의 내음을 느끼고 삶을 익혀야 인간의 내음이 물씬한 사람이 되겠죠^^
 
자연의 농담 -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 
마크 S. 브룸버그 지음, 김아림 옮김 / 알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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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괴물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연의 ‘농담’은 단도직입적으로 ‘기형’이고 ‘괴물’을 말한다. 라틴어로 두 다리가 없는 염소로 태어났지만 그런대로 걷게 된 동물을 루수스 나투라(lusus natura), 자연의 농담이라고 불렀다. 괴물이라는 단어도 라틴어로 ‘경고하다’라는 뜻인 모네레(monere)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농담 중에서도 가장 뼈있는 자연의 농담은 경고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인간에 경고하는 신호라 보아도 좋을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반인에게 기형은 불행이고 비극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과학자에게 기형은 ‘선물’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연 안에서 존재하는 유별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생명의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자가 말하는 농담이 모두의 불행이 아닌 행운의 기회가 되길 바라는 책이다.

 

사전적 의미로 전형(典型)은 모범이 되는 본보기이며 이형(異型)은 보통과 다른 모양이고, 기형(畸形)은 보통과 다르면서 비정상적인 모양이다. 그러므로 전형과 기형 사이에 이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주장은 어떠한 변이를 일으켜 이형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비정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 오답인 이유는 전형이 정답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오히려 이형이야 말로 진화를 위한 새로운 선택을 의미하지 않느냐 질문한다. 전형이라는 고정관념이 완성과 미완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선택의 편견을 낳게 되는 건 아닌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착화하는 것은 아닌지 제고해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만약 괴물을 만드는 발생적 메커니즘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해서 다양한 종류의 발생적 이형이 왜 다양한 괴물의 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기형이 유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그 바탕에는 진화와 DNA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찍이 위대한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의 범주를 넘어 다른 많은 학문 영역들은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도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감히 이렇게 말하련다. “진화의 개념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의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고.”      - p. 20,  최재천 <다윈지능> 中에서

 

저자도 언급했지만 우리는 자연이 완벽하며 더불어 진화론도 완벽한 체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설계와 조절 및 통제능력을 갖고 있어 동물이 조립되어 가는 설계도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DNA를 잘 계획된 프로그램이나 조리법, 청사진 등으로 은유하고 발생적 이형은 돌연변이에 의해 갑자기 나타나는 급작스런 사건으로 치부한다. 통섭학자 최재천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보잘 것 없는 DNA라는 화학물질이 단세포생물을 거쳐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살아남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니며 내 생명의 주인은 꼭 나만 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다. 도킨스는 끊임없이 그 명맥을 이어온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른다. 이 완벽해 보이는 이론은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듯이 공존, 공생의 개념을 떠올리는데 유용하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의 관점에서만 재해석한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바로 이형의 발생, 이어지는 기형이라는 판단의 소용돌이이다.

 

예를 들어 남녀가 각기 다른 자세로 소변을 보는 것은 본능인가 유전인가 학습인가. 신체적 형태가 달라 다른 행동이 나타나는 차이는 유전적 행동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평범한 외부요소의 상호 영향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뇌에 유전적으로 배선된, 계획적으로 특성화된 행동 유전자와 연결 짓고 싶어 한다. 발가락이 네 개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발가락 네 개 유전자로 기형이 된 것이 아니다. 발가락 갯수는 사지가 처음 자라나는 뿌리인 사지싹의 발생과정과 크기와 관련이 있다. 괴물 같은 팔다리 기형이 가장 빈번한 동물은 양서류인데 이들은 유전적 돌연변이 때문에 팔다리 기형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투과성이 용이한 피부특질과 표피 없는 알의 특성 때문에 배아가 이루어 질 때 환경적 요소가 보다 쉽게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팔다리 없는 양서류가 많이 출현한다면 환경의 오염도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딱정벌레의 경우도 뿔이 크면 혼자서 공급하는 똥이 많기 때문에 유충이 더 잘 자라게 도움을 준다. 결과적으로 몸집이 큰 아비 밑에 큰 새끼가 자라나게 된다. 이는 유전적 요소가 진화를 이끈 것이 아니라 발생을 특징짓는 상호작용의 속성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유전과 DNA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후세에 더 좋은 쪽으로 진화한 것도 유전이요, 더 나쁜 쪽으로 대물림 된 것도 유전이라는 식이다.

 

저자는 DNA를 모든 발생을 위해 원료제공을 돕는 분자 정도로 인식해야지 통제 가능한 만능 프로그램으로 인식하지 말라 충고한다. 이 책은 불완전한 자연과 그 속에서의 진화보다는 발생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었다. 전통적인 다윈주의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유전자 중심적의 사고방식을 경계한다. 유전적으로 예정된 산물보다 발생적인 과정에 더 집중하는 후성설을 자기 이론의 근거로 사용한다. 과학적인 평가는 전문영역이겠지만 DNA 만능이론에 안주하던 독자들에겐 의미 있는 반론인 듯하다. 무엇보다 기형이 유전이 아닌 발생의 문제라면 괴물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 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공동으로 인식해야 할 인재일수 있으며, 어쩌면 괴물이 괴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괴물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어쩌다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 괴물은 그다지 운명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우린 괴물을 그다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2. 괴물은 인간인가 초능력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산모였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이미지는 흉측한 기형아의 모습이 많았다. 고대 로마인들은 기형아들을 티베르강에 익사시켰다고 한다. 산모는 한번쯤 자신의 태아가 기형아인 꿈을 꾼다고 한다. 만약 태아가 기형이라는 결과를 받았다면 충분히 낙태를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상이 아닌 것을 혐오하고 공포스러워 하는 심경은 이해가지만 정상이 아닌 이유가 곧 죽거나 불행해야 할 조건인가는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알려준 외눈증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가 말하는 정상의 경우는 외눈증과 두얼굴 증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한 경우의 수 일 뿐이다. 새로운 형태라고 무조건 돌연변이라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싶어진다. 정상인 얼굴이 더 완성된 것이고 더 완벽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면 대답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에 손을 들고 싶다. 외눈증이 비정상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기형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저 전형의 관점에서 다르게 생긴 이형일 뿐이다. 이러한 발생적 이형은 배아 초기에 가해진 어떤 원인에 의해 드러난 복잡한 발생의 연쇄적 산물일 뿐 신적인 유기체가 있어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된 계시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것이다. 저자는 머리 하나를 생성하는 가능성을 진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연히 머리 두 개의 가능성이 진화한 것이라 부연한다. 머리가 하나일 확률이 많아지면 마찬가지로 머리가 두 개일 확률도 많아진다는 것이 진화론에 입각한 논리 일 것이다.

 



 

- 외눈증에서 정상적 형태를 거쳐 두얼굴증에 이르는 와일더의 전체 '코스모비아'계열.
두얼굴증 너머에는 두머리증이 보임. 두머리증은 두얼굴증이 심화된 형태가 아니라 결합쌍둥이의 변형된 형태 -

 


저자는 이처럼 난자가 수정된 직후의 초기 배아에서 일어난 ‘무차별적 순간’, ‘최고의 순간’을 기형을 유발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다.

 

이 시점은 “무언가 중요한 발생학적 단계가 빠르게 진행 중이거나 빠른 변화로 막 진입할 예정이어서 특정한 부분의 발생이 다른 부분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p 80

 

역으로 이 시점에 수많은 환경적 조작을 가함으로서 다양한 기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시점에 환경적 손상을 입히면 어떤 특정 기관의 발생도 괴물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다. 병아리 배아단계에서 온도나 화학처리 같은 부화환경을 조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한다. 어떤 종은 온도를 달리할 경우 성별이 달라지는 것도 있다. 따라서 진화와 발생은 분리 될 수 없으며 어떤 기형도 유전이나 환경 하나의 요인만으로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발생 메커니즘을 알면 진화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무엇도 정해진 발생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이는 곧 괴물로 정해질 운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괴물일수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 괴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발생에서의 실패자일 뿐이다. 무차별적인 괴물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공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 좋게(?) 괴물이 된 후엔 어떻게 생이 달라질까.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난 아이는 두 팔로도 걷기를 배우고 다리를 두 개만 가지고 태어난 염소는 절룩거리며 두 다리로만 걷기를 습득한다. 기형이 된 다음에도 얼마든지 정상은 가능하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없는 채로 태어난 아이는 우리가 보기에는 불구이지만 생애초기부터 두뇌는 새롭게 조직화되고 사지가 없는 신체에 연관된 행동적 적응을 포함한 특별한 발생 경로를 겪기 때문에 외려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팔로도 잘 걸어 다니고 세심한 동작을 해낼 수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두뇌의 조직화를 통해 다른 감각이 더 발달하게 되는 보상작용이 이루어진다.(장님이지만 청각이나 촉각, 후각이 정상인 보다 더 발달한 이유가 대뇌피질의 재조직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달리기나 수영하기 같은 움직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이는 타고난 능력이 아니고 신체 각 부분 발생적 대화와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이다. 생명체에 있어 발생의 각 단계는 여러 선택의 나열로 구성될 뿐 최후의 완성된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의도적 과정이 아닌 것이다. 이는 삶의 단계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스스로 발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절대로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유전적으로 조절되는 본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제 괴물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부족한 조건으로도 자기 발전을 이루었으니 우리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인 것은 아닐까.

 

3. 괴물은 친구인가 적인가

 

 

마지막으로 저자는 선과 악, 유전자와 환경, 진보와 보수 등 이분법의 구분이 익숙한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적 모호함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단성unisexual, 간성, 다중성multisexual에 대한 개방성을 강조했다. 세상에 성별이 남성과 여성만 존재해야 한다는 시각은 자연이 어떠해야 한다는 인간이 만든 선입관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이 부분에서 '동성결혼' 찬성의 입장을 밝힌후 지지율이 하락했다는 오바마를 떠올렸다. 등을 돌린건 우파 여성이었다.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어느 성별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는지 새삼 궁금하다) 환경에 따라 성전환이 가능한 열대어의 사례는 충격적이기 보다 부러웠달까. 저자는 인간과 동물계에 존재하는 가지각색의 성적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모호한 생식기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나 사회의 관점으로 일방적인 수술을 하기 보다는 아이의 성정체성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사례에서 보았듯이 태어난 직후 시행한 성 재지정 시술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정체성의 결정에 더 이성적이고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충고가 선뜻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이형이나 기형이 그 전과는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후성유전학적인 관점으로 발생기간에 형태와 기능이 상호작용한다는 인식은 신선하고도 인상적이다. 기형에 대한 동질감까지는 아직 이지만 적어도 혐오나 공포감은 많이 사그라든 느낌이다. 자연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을 놀라게 한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것이 ‘결코 자연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보다 더 놀라울 수 없다’는 저자의 깨달음이 새삼 자연 앞에 숙연해지는 시간을 제공한다.

 

자연은 괴물을 만든 적이 없지만 인간만이 인간을 괴물이라 부른다. 인간이 괴물을 창조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괴물이 아닌 것에 감사한 적이 있을까. 살아가면서 실은 괴물이 아니었던 사람이 더 괴물이 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아닐까. 신체가 멀쩡하다고 해서 꼭 정신도 같이 정상이라는 법은 없다. 대개 정신적 괴물은 신체가 정상인 사람에게 더 빈번한 후천적 발생과정인 듯하다. 그렇게 보자면 어차피 괴물은 서로에게 적대자가 아니라 친구일 수밖에 없으며 누가 누구의 조연이 아닌 각자가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거울을 보며 거울 속 우리 자신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겠다.

 

우리는 수많은 부분과 과정의 총합이며 생식기의 성장을 촉진하고 두뇌의 기능을 조절하는 유전자와 생식선, 호르몬분비 간 연쇄효과의 산물이다. 이 모든 요소가 협력해 거울 앞에 보이는 우리 자신을 만든다. 게다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궁극적으로는 가족과 문화 안에서, 시대 속 개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을 만들어간다. 거울에는 단 한 명의 모습만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셈이다. -p 212

 

우리는 지금 나 아닌 괴물, 그리고 옛날에 나 일수도 있었던 괴물, 앞으로 나 일지도 모를 괴물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 존재이다. 괴물은 곧 나이고 당신이고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괴물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같은 인간이니까. 그러므로 괴물이 아니라 좋아할 것도 괴물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다. 괴물이 아니라면 괴물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괴물이라면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공평하다. 농담은 아마 우리 모두가 괴물이기도 하고 또 모두가 괴물이 아니기도 하다는 괴물 같지만 괴담은 아닌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지금 잠시 어떤 이유로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 할 자격도 없다. 인간은 괴물이 될 가능성과 괴물로 변할 잠재력을 이 세상 어느 존재보다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괴물이 되지 못한 인간만이 괴물이 된 인간을 손가락질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한번만 손가락질을 해보자. 우리가 가리키는 방향이 의심할 수 없는 괴물을 향한 것이라면 그 방향은 아마도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괴물의 얼굴은 아닐까. 그때라면 지금처럼 웃으며 농담이라 말할 순 없지 않을까.

 

 

 

 

 

* 이 리뷰는 yes 24와 조선일보에 먼저 게재된 글입니다.

 




 
 
차트랑공 2012-05-18 09:51   댓글달기 | URL
물리적 이형 혹은 기형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허약한 사람들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망케해야 한다고 주장 하던 플라톤과 그의 시대보다
현대는 좀더 포용적인 개념의 시대에 와있어보입니다.

또,
말씀해주신 정신적 이기형은 그 수가 더욱 증가하는 듯 합니다만...
오늘은 저의 손가락을 거울을 향해 한 번 찔러보겠습니다 ㅠ.ㅠ
이거...생각을 많이 해봐야겠는걸요 ㅡㅠㅡ.

한사람 2012-05-18 15:23   URL

문제가 될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다음 세대를 위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우성학적인 관점에서 긍정화되는 나라, 시기, 과학자, 정치인이 있었죠.
모든건 너무 유전자를 광신하는데서 비롯되는 듯해요.
일단 생겨난 생명체가 점점 발달해 나가면서 변할거라는 생각은 잘 안하는,
모든게 운명이다는 식이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괴물이 후천적으로 양성되는 케이스를 더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ㅋㅋ
예를들면 어떤 바이러스같은게 있는 사람은 나중에 특정 물질과 환경으로 인해
괴물이 된다...뭐 이런 ㅋㅋ

재미난 책입니다^^
차트랑공님 주말 잘 보내세요~~~

차트랑공 2012-05-19 16:44   URL
말씀해주시니 기억이 납니다.
언제나 페이퍼를 써놓고도 잊고 있었더군요 ㅠ.ㅠ.
그것도 물과 얼마전에 말입니다 ㅠ.ㅠ

자연의 농담이 농담이 아닌가 봅니다요.
재미있는 책이라구요..?
그럴 것 같아요..그것도 아주아주..

 

 

 

#1.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아이는 과학자가 꿈이다. 어쩌면 저렇게 나와 틀릴까, 나는 아이를 보며 매번 놀라곤 한다. 유치원 시절 과학관련 전시관에 많이 데리고 다니긴 했다. 일학년 때 어느 과학관에서 행사하던 과학 잡지를 6학년인 지금까지 구독하고 있다. 알라딘에서 검색하는 유일한 책은 ‘내일은 실험왕’이다. 기타 추리소설에 열광하고 영어도 특히 사이언스 과목 선생님들과 친분이 깊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시작된 의학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최근 ‘싸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주말 예능 할 시간에 EBS에서 하는 건강, 생로병사, 암, 한국인의 밥상 같은 다큐멘타리를 스스로 챙겨본다. 책상에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리 드라이버, 펜치, 망치, 기타 알 수 없는 종류의 공구들이 박스로 가득하다. 여섯 살 때 잠긴 안방 문을 옷핀으로 열었다. 그래서 손에 맨날 상처투성이다. 욕실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 슬그머니 열어보면 샴푸와 린스를 비율에 맞춰 실험용기에 자기 스타일대로 섞고 있다. 향수도 섞고 화장품도 섞고 음식도 섞고 도대체 왜 섞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섞어 본다. 요즘도 재활용쓰레기를 제발 버리지 말라고 다 쓸 때가 있다고 해서 매주 월요일이 되면 실갱이가 벌어진다. 스티로폴이나 페트병은 망치기 좋은 실험재료이기 때문이다.

 

<현실, 그 가슴뛰는 마법>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아이와 추상적, 은유적 대화를 선호하는 엄마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나는 과학을 제일 싫어했다. 생물과 화학은 거의 암기과목이어서 그런대로 잘했지만 물리와 지구과학은 정말 싫었다. 달과 별과 해가 왜 뜨고 지는지 나는 그런 게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계절이 왜 바뀌고 무지개는 왜 뜨고 지진은 왜 일어나는지 세상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참으로 무심했다. (달을보며 아이는 저 달이 상현달이지? 묻지만 나는 그저 반달일 뿐이다.) 그렇게 공부고 일이고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무슨 악연인지 사회에 나와서는 과학관 사업만 계속 맡게 되었다. 하필 전공이 과학교육을 어떻게 하면 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를 수 있나, 그런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무지개의 원리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면 사람들이 더 빨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까, 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자들이 설명하는 방식으론 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과학 선진국에 나가보면 우리처럼 어렵고 재미없게 과학을 가르치는 나라도 드물다.

 

과학 공부를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면 도대체 왜 자신들이 이해하는 현상을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까 궁금해 한다. 그래서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이라 말한다.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설명을 안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겐 설명이 필요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천재에 가까울수록 설명은 바보 수준이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분명 잘 가르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러나 잘 가르치는 재능을 타고 났다 해서 그 사람이 꼭 많이 아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얄궂은 운명인가 보다. 나는 많이 알면서도 아주 쉽고 재미나게 가르치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일단은 내가 정확하게 알아야 가르치는 방법도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사회에서 가끔 그런 분을 만나면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는데 과학관 일을 하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최재천 교수였다.(나는 최재천 교수야 말로 마법사라 생각하는데 아이가 닮았으면 하는 모델이기도 하다. 욕심이 너무 큰 것일까) 당시 최교수는 서울대에 재직중이었고 지금처럼 유명하진 않았다. 문과냐 이과냐 하는 이분법에 익숙했던 나로선 문학적 수사가 가득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분이 과학자인가 작가인가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다. 왜 산에 나무가 있어야 하는지를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스토리텔링기법을 구사하셨다. ‘지속가능한 생태계’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결론이 구체적인 영상으로 표현되려면 과학적 지식 외에 특별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상상력은 과학만 잘해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다. 다른 무엇을 보았고 들었고 읽었고 해보았기 때문에 떠올려지는 2차적인 사고의 영역이다. 그때 나는 설명을 들으면서 이분은 무언가를 엄청나게 많이 보고 읽은 분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놀라운 분이 자신의 책에서 다른 책을 이야기 할 때 꼭 빠지지 않고 언급하는 인물이 바로 리처드 도킨스 이다. 최재천 교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최재천 교수 덕분에 그 책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재해석하는 책이라는 사실만 여러 번 확인한 독자가 되었다.

 

 

 

 

 

 

 

 

 

#2. 과학이 가슴뛰는, 마법이야

 

 

그런데 나는 정작 필독서를 들지 못하고 신간을 펼쳐들었다. 각 분야에서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그들을 모두 거슬러 올라가기엔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땐 지금 출간된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다음에 또 이 책을 보아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장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과학을 떠올릴 때 누구나 쉽게 하게 되는 아주 오래된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대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생을 고민할 때 인간은 왜 죽어야 하나,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되듯. 이 책에 가장 끌렸던 이유도 바로 목차 때문이다.

 

저자는 현실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태양이란 무엇이며, 세상은 언제 시작되었으며, 왜 나쁜 일은 일어나며, 기적이란 가능 한 것인지 같은 아주 원초적인 질문들로 이 책을 구성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 장마다 화려한 일러스트와 함께 이야기 초두에 신화나 전설을 알려준 다음 그것이 왜 틀렸는지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신화적 상상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과학적 증거들로 가득한 우리 사는 현실이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진짜 마법은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진짜 기적은 종교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저자는 과학이 가진 고유의 마법, 즉 현실의 마법이라 칭하고 있다. 종교나 신화보다 더 경이로운 세계인 현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마법인가 하고 말이다.

 

이 경이로운 현실이라는 마법의 세계를 강조하기 위해 데이브 매킨의 일러스트는 무척 효과적이다. 사실 일러스트는 비과학적인 예술의 영역이고 이 책에서는 특히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도 이 책은 현실에 대한 소중함 보다는 현실 너머, 혹은 말도 안되는 환타지의 세계로 우리의 영감을 이동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책은 글과 그림의 효과가 3:7로 보인다. 내용은 고교 수준인데 그림은 유치원수준도 많으므로 아이들에게 이해가 안 되면 그림만 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판본과 그림 때문에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인데 이 부분은 서점에서 그림을 넘겨보고 결정해도 좋을 것 같다. 기타 과학교육에 곤란을 느끼는 학부모 외에 이차원적인 내용을 3차원적으로 연출하거나 공간화가 필요한 분들도 유용할 듯 하다.

 

인상 깊었던 그림을 하나만 소개하면 진화와 약간 비슷한 개념의 생명창조 신화를 표현한 그림이다. 가장 가운데 곤충의 세계인 붉은 세상이 있고, 이 곤충들이 기어 올라와 푸른 세계의 새가 되고, 새와 곤충들이 다음 노란 세계로 올라와 보니 그곳에 다른 포유류가 살고 있다. 모든 동물이 마지막 네 번째 세계로 올라오니 그곳에 낮과 밤이 있는 흑백의 세계가 있더라, 하는 생물의 다양성을 말해주는 그림이다. 생물의 다양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그림을 본 적이 없다. (대부분 나뭇가지 계통도가 아니던가) 이 평면적인 그림을 입체화, 영상화한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공간연출이 떠올려지지 않는가.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생명창조' 신화 (56p) -

 

이 책의 결론을 말하기 위해 마지막 장은 ‘기적이란 무엇일까’ 를 질문한다. 저자는 기적을 옹호하지 않기 위해 18세기 스코틀랜드 사상가 데이비드 흄의 문장을 인용했다.

어떤 기적에 대한 증언이 그것이 확증하려고 하는 사실보다 그것의 반증이 더 기적적인 종류가 아닌 이상, 어떤 증언도 기적을 확증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 254 p

 

예를 들어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이명박이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을 보았다는 기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친구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 그 기적적인 일을 믿을까 말까 한다고 치자.

 

“나는 친구를 맹세코 신뢰해. 친구는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친구가 거짓말을 한번이라도 한다면 그건 기적이지.” 라고 말했다면 흄은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

 

“친구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아무리 낮은들, 친구가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기적일 가능성보다 더 낮을까?”

 

친구가 거짓말을 하는 일이 이명박이 전 재산을 기부하는 일보다 덜 기적적이라면 우리는 친구가 거짓말을 한다는 설명을 선호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흄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진 않았다.(그러니까 이명박이 전 재산을 기부할 수도 있다 ㅋ) 대신 기적을 개연성 낮은 사건으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기적이라고 주장되는 사건의 개연성을 모종의 잣대에 올려 놓을 수 있다면 환각이나 거짓말 같은 터무니 없는 일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불성실한 자세라 말한다. ‘초자연적’이라 치부해버리면 자연적인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 버리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엔 컴퓨터나 휴대전화 같은 기술이 초자연적인 마법의 현상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그러니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라 함은 우리는 아직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창 고민하는 중이고 앞으로 더 관찰하고 연구하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해야 한다는 것. 쉽게 말해 평생가도 겪지 못할 확률의 기적에 기대고 현실을 무위화 시키는 환상에 의지하지 말고 과학이 해석하는 실재의 현실을 더 믿고 그 안에서 진실을 찾으라는 충고인 것이다.

 

#3. 종교가 가슴 뛰게 하는, 마법이지

 

 

하지만 기적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은 무용하니 과학적으로만 사고하자, 내 아이에게 그렇게만 주지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과학과 대척점에 있는 종교적 해답이지만 나는 차동엽 신부의 <잊혀진 질문>도 상반되는 대답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꼭 리처드 도킨스라는 과학자의 질문을 종교적인 버전으로 변환한 내용 같다. 리처드 도킨스의 질문과 겹쳐지는 질문이 꽤 있다.(언제부터 세상이 생겼는가,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기적은 가능한 것인가 등) 하지만 답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살다보면 처음엔 과학문명의 분명한 혜택에 놀라다가도 곧 그것의 냉정함에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다음의 기술을 좇아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꼭 마지막 해답일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의 터무니 없는 환타지나 미신의 비과학적인 논리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어쩐지 현실 너머에 초현실적인 마법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한번은 죽게 되는데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죽고 나면 모든 것은 끝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건 없건 신이 존재하건 하지 않건 그런 생각과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학자의 질문이나 종교인의 질문이나 모두 궁극의 리스트에 가까운데 우리는 그들의 영역을 피해갈만큼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동엽 신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의 존재와 사후 세계에 대해 과학자와는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과학과 종교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는 학부모로서 다음의 대답을 기억해 놓으려 한다.

 

확실한 것은 진화론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도 태초에 창조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론이 반드시 창조론에 배치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 246

 

차동엽 신부는 신앙에 바탕을 준 종교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 서로 보완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 언젠가부터 우주 대폭발, 빅뱅이론이 끼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주가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 없이 단지 우연히 빅뱅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이처럼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주 밖에 있는, 아마도 자연계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우주를 존재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분이 신이라는 설명이다. ‘저절로’ 생겨났다는 우주에 대한 해답을 필연적으로 생기게 했다는 창조주 하느님으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맞고 차동엽 신부가 틀리고(혹은 그 반대이고) 하는 정답 가리기가 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신의 분야를 말할 때 그것이 가슴 뛰는 마법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종교인이라면 종교는 마법이요, 문학인이라면 문학이 마법이다. 과학도 마법이고 예술도 마법이고 음악, 미술, 철학, 건축, 역사, 모두모두 가장 진실한 마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것을 평생 즐기면서 그 분야의 최고가 되었을 것인가. 마법이 되는 논리는 그 분야 전문가라면 전문가의 수 만큼 다양할 것이다. 중요한 건 세상에 저자만큼 다양한 마법 중에 어떠한 마법을 우리 현실의 답으로 택할 것인가 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마법을 가장 근접한 삶의 해답으로 제시해줄 것인가 이다. 한가지 마법만 가르쳐 준다면 마법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법의 종류가 많다면 아이들도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다.

 

과학적 증명이 가능한 현상과 그로 이루어진 충분한 현실도 마법의 세계이고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기적 같은 우연으로 생명을 건진 신앙의 힘도 마법의 세계이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배운 사람들이 더 무당굿을 찾아 엄청난 돈을 쓰는 것도 마법의 세상이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마술사의 속임수도 그 순간엔 마법의 무대이다.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기도 강력한 마법의 상상력을 불러온다. 세상은 한 가지 방법의 마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저마다 마법이라 믿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다. 다 구경하고 그 중에서 자신만의 마법을 찾는 일은 어쩌면 모든 마법을 거부하고 곧 자신이 마법이 되는 일은 아닐까 싶다. 어떤 분야이건 그 분야의 마법사가 되는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러니 이렇게 훌륭한 마법을 찾아라가 아닌 네가 마법이 되어라, 바로 네 자신이 마법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우린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지.

 

물론 우리 자신은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아이리시스 2012-05-16 18:16   댓글달기 | URL
오.. 리처드 도킨스..저거 표지.. 진짜 잼없게 생겼어요! 추천이예요, 한사람님? 책값이 비싸서 실물을 보고 싶어요, 인문서는 이상하게ㅋㅋㅋ

한사람 2012-05-16 20:36   URL

예, 저는 추천이여요.
요즘은 아이가 커서 어려운 질문들을 많이 해요.
기초적인 몇가지만 확실히 알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데도
그게 가물가물 거릴때가 많아요.
왜 너무 당연해서 설명해주기 힘든 과학상식들이요 ㅋㅋ

과학하는 현실이 가슴뛴다는 건 과학자니까 그렇다 치고 ㅋ
갠적으로 그림과 목차 구성이 맘에 들어요. 내용은 인문서라고 하기엔 좀 부족하구요 ㅋ

cyrus 2012-05-17 16:46   URL
저도 추천이요!! 오늘 학교 도서관에서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방금 빌렸어요.
판형이 조금은 크고요, 생각보다 그림이 많아요 ㅎㅎㅎㅎㅎ

한사람 2012-05-18 15:25   URL

시루스님 다니는 도서관은 신간이 무척 빨리 들어오나봐요, 부러워요, 하하
저는 그림이나 사진이 좋은 책은 소장 욕심이 생겨서 일단 사고 보거든요 ㅋㅋㅋ
시원하게 넘기면서 보기 좋습니다^^

기억의집 2012-05-16 23:37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미우라 시온 소설들 읽으냐고 정작 며칠 전에 사다 놓은 이 책은 첫 페이지만 읽고 말았네요. 미우라 시온, 전 엄청 좋아하거든요. 도서관에 가서 미우라 시온 신간들 빌려와 읽고 있어요.

전 한사람님과 달리,부모님이 무교시고 자식에게도 무교를 물려주셨어요. 제 자식에게도 무교를 물려주려고 해요. 근데 무교에도 사는데 아무 탈 없는데....^^

한사람 2012-05-17 09:51   URL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재밌었다는 글 보았어요^^
요즘에 저는 과학관련 인문서에 꽂혔어요, 하하
전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과학자와 철학자가 통하는데가 있더라구요 ㅋ

저도 특정교를 믿는 건 아니구요~
불교, 기독교 학교를 다녀서 장단점만 파악했어요.
지인들 중에 성당 다니는 분들도 많고..
그런데 종교는 기회의 문제라 저 역시 부모님의 영향으로 무교적 사고가 저를 지배하더군요.
제가 그래서 그런지 아이도 교회에 시큰둥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