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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번 서평단 도서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고, 이번에 연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읽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오츠의 <그들>이 1937년의 디트로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그보다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1889년의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개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니 두 개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또한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이 마치 어떤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힌다는 점인데, 오츠의 <그들>이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친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세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 사회 초창기의 여러 단면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19세기 중반, 철도교통의 발달은 대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고(이 소설에서도 철도교통이 중요한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데, 캐리를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이끈 것은 철도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드루에를 만난다. 또한 허스트우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차 운전이었다.), 대도시에는 이른바 '부의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의 미국이 부의 대물림이 어느 정도 그 고착화의 양상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시스터 캐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의 미국은 조금 더 불확실한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순식간에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도, 혹은 몰락의 길도 들어설 수도 있는 가능성 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성실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성공과 몰락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날 것의 생생한 사회학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서사가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은 가난한 캐리와 부유한 드루에 혹은 허스트우드의 대비이다. 여러 변변치 않은 구직처를 전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상과 욕망을 놓지 못하는 캐리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며, 모든 좋은 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일가의 모습은 효과적인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 연극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캐리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허스트우드의 모습은 소설 초반부의 대비보다 훨씬 극적이며, 독자에게 보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물론 드라이저는 이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 세계를 가능한한 세밀하게 교차하며 묘사하는 것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리가 잠깐 들어가 일하게 되는 공장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비교되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심지어 허영마저도 넘쳐나는 허스트우드 가족 풍경의 대비, 또는 후반부에서 허스트우드가 전차 파업의 대체운전수로 잠깐 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과 캐리가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는 모습의 극적인 교차. "이 배우들한테는 원래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지만 허스트우드가 전차 차고의 윗방에서 잠을 자던 바로 그날 밤, 그날따라 유난히 흥에 취한 주연 희극배우가 관객들을 좀 웃기고 싶었는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p.555~556)" 이 묘사들은 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세밀한 분석보고서로의 기능을 한다.
(일종의 분석보고서로 위에 얘기한 오츠의 소설 <그들>과 이 소설 <시스터 캐리>를 연결지어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허스트우드의 몰락. 어떠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허스트우드는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여 빈민, 혹은 그 이하가 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갑자기 스타로 부상하는 캐리가 있다. 캐리의 성공 - 그녀의 성공은 재능 이상의 어떤 기묘한 무엇인가가 작동한다 - 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허스트우드의 몰락도 아이러니하다. 이 가파른 상승과 하강. 반면 <그들>에서 로레타 가족에게는 가파른 상승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파른 하강도 없다. 로레타는 복지시설의 사람들에게 불평을 퍼붓지만, 그녀가 그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복지정책의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 같다. 전차 파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군중의 기묘한 연대와 분노. 반면 현대 사회의 군중들은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혹은 분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무튼 이 전차 파업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드라이저의 필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일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배경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엄격한 도덕률이 남아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과 앞에서 예로 든 <그들>과 같이 작가가 여러 장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현대적인 문학과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드라이저 작가 본인의 목소리다.
이런 분위기는 금세, 쉽게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저택, 화려한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 레스토랑, 온갖 술집들 사이를 걷고, 꽃과 비단과 와인의 향기를 맡고, 사치스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도전적인 창끝의 빛처럼 뿜어져나오는 시선을 느끼고,...(중략) 세상이 이런 것들에 매혹되고 인간의 마음이 이를 꼭 도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왕국으로 보는 한, 이것은 위대함의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p.383)
그 모든 향락이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캐리의 목소리도, 허스트우드의 목소리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는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중간중간 이렇게 서사나 묘사가 불현듯 멈추고, 작가의 날 것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이것은 <그들>과 같은 소설의 어떤 트릭이나 장치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들>과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보다 더 다의적,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에서는 일종의 중화제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중간중간 이루어지는 작가의 개입은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이 소설을, 당시 독자들이 읽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들 문제 있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읽으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작가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하나는 이 소설에서 과거의 소설들과 다른 보다 현대적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욕망의 화신(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이 서사를 추동해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캐리가 다른 과거의 인물들과 다른 점은 (뒤의 작품 해설에서 잠깐 언급되듯이) 그녀는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좇는 꿈은 부인가, 명예인가, 인기인가, 혹은 사랑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캐리는 이 소설에서 흔히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에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p.652)" 그녀는 행복을 갈망하지만, 과연 무엇을 채워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욕망하는 것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제 앞으로 많은 현대소설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게 될,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 그런 인간형의 탄생, 아니 어쩌면 현대사회 인간들의 특질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의 등장을 여기에서 목도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는 사람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무엇을 좇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좇는다'는 사실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더 사랑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도,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다. <로마의 휴일>, <벤허> 등을 만들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 의해 1951년 <캐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캐리 역은 제니퍼 존스가 맡았는데,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으려들고, 그것에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을 때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