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문학'을 얼마만에 접해 봤는지 눈을 굴려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들여다 본적이 없었다. 번뜩 생각나는 거라고는 심청전, 홍길동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기출시험문제를 풀면서 접한 어지럽게 흩어진 한자와 고어들이 상형문자처럼 내 앞에 펼쳐졌을 때, 내 오른손은 연필로 그 문장들을 밑줄 그으며 따라가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잡념으로 그득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왜 나는 이 문장을 해독하지 못하는가, 하며. 과연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인가. 문학을 문학으로 대하지 못하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고전이 내 속에 스며들 틈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멀어져간 고전문학이 다시 내게로 찾아온 건 십년도 더 지난 지금, 아무 거리낌없이 책을 넘기며 다음 장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참 오래 살고 볼일이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애정소설'이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책엔 '숙향전'과 '숙영낭자전' 두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숙향전은 꽤나 긴 이야기로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때론 버겁고, 때론 힘겹고, 지치기도 한 온갖 역경과 시련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고, 숙영낭자전은 후딱 해치울 수 있을만큼 짧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두 작품 모두 비슷한 구성과 짜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부부가 나와 간절히 빌면 갑작스레 아내에게 태기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들은 천상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에 내려와 여러가지 액운들을 거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바로 천생연분인 사람을 만나는 것. 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죽기 살기로 투쟁해야지만 그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사랑을 얻는 게 전부는 아니다. 사랑을 얻고 나서도 다시 고난은 시작되니까. 그리고 그 고난의 끝이 사랑이든 비극이든 자신의 본분을 다 하고 나면 다시 천상으로 가게 된다. 인간 세상에서 해피엔딩이든 언해피엔딩이든 상관없이 하늘에서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1. 이선-선군. 당신이 원하는 남성상은?

 

 숙향의 남자 이선과 숙영낭자의 남자 선군. 그 두 인물을 살펴보자.

 

 

 이선은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좋은 집안, 좋은 용모, 대단한 재주까지 어느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는 이선. 그는 운명의 여인 숙향을 찾기 위해 그녀가 지나온 모든 길을 하나씩 밟아 찾아 헤맨다.

 

이선이 한 살 때부터 걷기 시작하고 두 살 때에는 말을 배웠는데, 말주변이 소진과 장의만큼이나 뛰어났다. 네 살 때에는 글을 배워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다섯 살 때에는 처음 본 글도 또렷하게 외웠고, 일곱 살 때에는 천하의 문장가나 명필도 이선을 따를 수 없었다. p.71.72

 

 운명의 여인 '숙향'과 연을 맺은 후에는 자신에게 또다른 운명의 여인이 한 명(천상에서 자신의 아내였던 설중매) 더 있다는 것을 황태후의 약을 구하러 다니며 알게 된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설중매를 둘째 부인으로 받아들인다.

 

 

 선군 역시 좋은 집안에 좋은 용모, 좋은 재주를 지녔다.

 

얼굴은 관옥 같고 울음소리는 신선처럼 맑고 깨끗한지라.

... 선군이 점점 자라매 골격이 빼어나고 온갖 일에 모르는 것이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칭찬했다. 선군이 열다섯 살이 되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군은 틀림없는 천상의 선관이라" 하더라. p.214 

 

 

 하지만 선군은 숙영낭자 한 사람만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자신이 가진 재주는 있었지만 과거시험이나 지위, 권력 이러한 것들에 무심했다. 그의 소원은 한시라도 숙영낭자와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고, 늘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숙영낭자를 보지 못해 앓아 누운 것도 그의 사랑의 열병이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뻗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보기 싫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것도 숙영낭자의 청이었기 때문에 떠밀리듯 간 것이었다. 가는 길에 묵었던 곳에서 다시 돌아와 숙영낭자와 속삭이고 간 것도, 숙영낭자를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펄펄 끓는 사랑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일 중 무얼 선택할래?"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 여자들 대부분은 '사랑'을 선택한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 대부분은 '일'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을 선택한 남자들이 대답한다.  

"사랑을 선택했더니 여자가 떠나더라."  

 

 정말일까? 조선시대라는 상황에서 두 부인을 둘 수 있는 남자들에겐 감격스런 제도가 구비되어 있고, 양반인 남자들이 신분도 집안도 알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 자체는 백마 탄 왕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끝내 두 부인을 마다하고,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한, 선군의 펄펄 끓는 사랑에, 장원급제할 실력인데도 '사랑'을 택하고팠던 선군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2. 숙향-숙영낭자에겐 그들을 시기하는 이가 있었으니! 미美도 권력이다!

 

 짙은 향내가 번지고, 하얀 백옥 같은 얼굴. 누구나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고, 반하게 되는 그러한 얼굴.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천하고, 더럽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진 그녀들이 보고 나면 모두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향수라도 흡입한듯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들에게 빠져들게 된다.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운명이라며 받아들이게 되고,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호통 치던 부모도 그쯤에선 반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 그 시대에도, 지금 이 시대에도 '미美'는 권력이다. 그녀들은 가진 것 없고,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그 시대에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 있었지만 천상의 선관이라 할 수 있는 이선과 선군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 만약 그들이 가진 재주는 탁월하다 하더라도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천상에서 선녀였다는 것.

 

 그렇다면 미를 갖추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인물을 살펴보면 숙향을 질투하여 이간질하는 사향을 살펴볼 수 있다. 진작에 그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향은 몰래 그 집에 있는 것들을 빼내어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만약 그곳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그렇듯 주변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시기와 질투를 부른다. 선군을 좋아했던 매월이도 그렇다. 자신의 청을 거절한 선군이 숙영낭자만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얄미웠겠는가. 그렇다고 그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늘 2인자로 남는, 주인공 대신 홀로 뒤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가슴 앓이를 하는 '미'라는 권력을 갖추지 못한 이가 안타깝게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지지리 복도 없지! 이게 과연 운명이란 말인가?

 

 전쟁 중에 고아가 된 숙향. 그녀는 다섯가지 액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열다섯까지는 그 액운을 피할 수 없다. 그 액운은 하나같이 죽을 액이다. 아무리 제 운명을 익히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런 일이 닥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을 것이다. 차라리 죽어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푸념도 들 것이다. 천생연분이 있으면 뭘하나, 자신이 힘겹게 쫓아다니며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동안은 그와 만날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데!

 

 

 숙영낭자는 자신의 천생연분이 다른 이와 혼인하려는 걸 알고 만류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선군의 사랑은 지극했으나 그의 사랑이 오히려 해가 되어 버린다. 간통죄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 썼으니 말이다. 거기다 제대로 된 혼인도 올리지 않은 채로 그 선군의 아내가 되었는데,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못한 채로 자결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칼을 꽂은 채로 말이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장담하듯이. 피눈물로 흘러넘치는 인간세상에는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4. 환상의 세계는 현실을 잘 살아내기 위한 시원한 숨구멍

 

 조선 시대, 그 당시의 사회 현실은 신분 차별과 부조리한 관습으로 하층민의 인격을 무시하고 남녀의 진정한 사랑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만약 내가 그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면,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면 더더욱 나는 다른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동안만큼은 웃을 수 있으니까. 내게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은 어쩌면 천상에서 지은 나의 죄 때문이라면 그 죄가 다 소멸하고 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무런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화사하게 하하호호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거기다 나는 천상에서 신선이자 월궁선녀인 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훨훨 날아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에 그 현실을 해결해주는 책보다 내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주는 문학을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란 믿음. 지금은 찌질하고 구질구질하지만 언젠간 화사하고 밝게 빛날 거란 꿈을 꾸는 것이다. 숙향전과 숙영낭자전에서 차르르 펼쳐지는 환상성은 팍팍한 현실에의 도피가 아닌 현실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숨통이 아니었을까.

 

 

5. 운명이란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

 

 나에게도 운명이 있을까. 어쩌면 내 손바닥에 자글자글 생겨난 잔주름이, 쓱쓱 그어진 손금이 내 운명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년이면 으레 보게 되는 점집에서처럼 우리가 태어난 연월일시인 '사주'가 이미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삶을 그 운명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운명 위에 또다른 삶을 개척할 것인가.

 

 숙향과 숙영낭자전을 읽어 내려가며 그들의 운명은 어쩌면 정해진 대로 흐르듯 전개 되어 갔다. 그래서 조금은 불만도 있었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하고. 그러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과 끈기는 어쩌면 그들의 운명길을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이 그렇게 정해 놓아도 중간에 뭔가에 미혹되거나 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여성에게만 정절이 요구되는 것 또한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운명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사주가 있듯이 물건에게도 그들의 사주인 바코드가 있다. 그러나 그 바코드가 그 물건의 운명을 결정 짓진 않는다. 그들이 어떤 주인에게 가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바뀐다. 우리들의 손금이 해가 거듭될 수록 달라지는 것과 같이. 운명이란 자신의 행동에 따라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변해갈 내 운명을 믿어보기로 한다. 조금씩 무수히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운명 속에 아마 숙향과 숙영낭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 짙은 향내를 풍기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족들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 일' 인해 관계가 부서지고 망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일은 분명 그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엄마가 있다. 어쩌면 그들도 힘들었을텐데 내치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아빠가 있다. 친엄마가 아닌 사람에게 차별과 멸시를 받은 입양한 여자 아이가 있고, 입양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엄마처럼 함부로 대한 동갑내기 딸도 있다. 입양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친동생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준 오빠와 언니가 있고, 그것을 질투와 미움으로 바라보는 동갑내기 동생도 있다. 동성친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한 여자 아이가 있고, 세상의 숫자와 영어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 나간다.

 

 각 챕터마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 내면까지 보여주는 글쓰기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속도감 있게 그들의 내면을 따라가 읽었다. 그들의 내면을 지켜보는 일은, 나의 내면을 지켜보는 일처럼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웠다. 우리가 확신하는 일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다. 추측할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단호히 잘라내고 끊어낸다. 무엇이 옳은지는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대변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딱딱하고 어색한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내 모든 마음을 털어 놓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A4 용지에 빽빽하게 3장 가량 편지를 썼다. 나는 그 편지를 쓰며 때론 웃고, 때론 울고, 때로 뭔가가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편지를 엄마에게 줄 때, 나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해야 했다. 나는 그에 대한 결과로 엄마가 내 손을 붙잡고는 참 많이 힘들었지, 하며 나를 꽉 안아주는 모습을 아주 여러 차례 머릿 속으로 반복 재생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정말 너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건넨 건 싸늘한 표정과 한 마디의 말이었다.

 

"넌 정말 별걸 다 기억하는구나. 이젠 그만 잊어도 될 것을. 애가 왜 그리도 특이한지...쯧."

 

 눈물과 포옹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나의 상상은 산산히 부서져 내렸고,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힘들었던 시간만큼 엄마는 엄마가 가진 삶의 무게만으로도 버거워 겨우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각자의 상황을 누구에게 토로한다고 한들 관계는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표현해주는 것. 섭섭한 일보다는 당신이 있어서 좋았던 일, 여전히 함께 해서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일과 무작정 솔직해지는 일은 항상 터무니 없는 결과와 서로에게 또다른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완벽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운명처럼 거울을 보듯 누군가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헤아릴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상처를 보았을 때다. 서로의 어둠을 보았을 때다. 아마 책 속에 나온 두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 비난을 던지고 싶지 않다. 그들의 선택이 누군가의 마음을 닫게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겐 그것이 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어찌됐든 살아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금기시 되는 말처럼 '그 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맨 마지막에 되어서야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에서 확인하시길.

 

아, 나는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203

 

 인간이란 존재는 죽음을 앞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다른 생명을 부르는 것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나는 그저 함께 하는 사람이 여전히 그대로 내 곁에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밑줄 긋기>

 

 물론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도 재미만 들리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버릇을 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연습이 귀찮다. 새것에 적응하는 데 난 늘 어려움을 겪어왔다. 진취성은 나와 거리가 있다. 사람들의 행태, 생김새, 옷 색깔, 대화에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책을 선호한다. -9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써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12

 

 어느 쪽이든, 책과 삶을 포개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술 마실 때를 빼곤 오직 책 속에서만 어렵사리 생기를 유지하는 내 삶을 바스러뜨릴 수도 있는 짓이다. 나는 사람보다 책이 좋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12

 

 

 

 어쨌든 얼마 되지 않는 내 친구들은 거의가 술친구들이다. 그러나 그 친구들마저도 내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어쩌면 가장 가깝다 할 P마저도. 가족들에 대한 내 감정이 그렇듯. 그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대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리 대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나를 진정으로 대하겠는가? -25

 

 

 황량한 문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내면이 황량해 보였고, 경쾌한 문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성품도 경쾌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강건하리라 짐작했던 사람이 실제론 여린 경우도 있었고, 겸손하리라 건너짚었던 사람이 실제론 오만하기도 했다. -27

 

 

 

"세상에 금지돼 있는 건 없어요. 마셔도 되지요. 근데 오늘 술을 드시면, 치료기간이 두 배 이상 길어질 거예요. 저 같으면 완치될 때까지 술을 안 마실 겁니다." -34

 

 나는 술 없이는 낯선 사람과 얘기를 못 한다. 낮이든 밤이든. 남과 얘기하는 데 반드시 술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술 없이 얘길 나누는 것이 열없다. -34

 

 

 세상에 금지돼 있는 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해볼 필요는 없다. -36

 

 

 내가 속물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속물이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처럼. 그러나 중간 규모의, 아니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한세상 살아온 나는 신분의 힘이라는 걸, 계급의 힘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남에게 고개 숙이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수모스러운지도 알고 있다. 내 나이가 되면 민형이도 그걸 깨달을까? 아니 그 아이는 이미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젠가 민형이에게 그 얘길 노골적으로 꺼내자, 그 녀석은 오히려 "계속 공부를 하는 게 수모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알 듯도 싶었고 모를 듯도 싶었다. -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다. 그는 자기를 남에게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_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아빠'란 존재에 대한 생각_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잠들기 전에 아빠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아빠는 늘 바빴다. 함께 놀 시간도 없었고, 함께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난 그런 의미에서 '바쁜' 사람이 싫었다. 난 이 다음에 결혼을 하면 나와 자주 이야기 할 수 있고, 결정적인 순간엔 일보다는 사랑을 택할 남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살짝 스치듯 지나가는 마음이 아니다. 온전히 자신의 것들을 줄 수 있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누군가의 마음에 흠뻑 빠지고, 그 속에서 허우적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법.

 

 

언제든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_

 

 어느 순간 여러 책을 만났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점점 내 자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내 속에 갇혀 나를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건,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의 밖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완벽하게 내 바깥에 타인으로 존재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건 아이러니 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맡길 때라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를 알려면 나를 잊고 타인을 온전히 만나야 했고, 내 침몰했던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을 위해 내 온 힘을 쏟아야 함을 알았다.

 

 

리처드 노박에게 일어난 일_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된다. 도무지 자신에 대해 떠올려 봐도, 통증에 대해 떠올려 봐도 알 길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지 또한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사라지고, 존재도 사라지는 순간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911에 구조 요청을 한다. 금세 통증이 사라지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란 버터빛의 환한 도넛 가게를 발견하게 된다. 도무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이 느껴진다. 인생은 때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압도 당한다. 그것은 아마 제 속에 운명을 되돌릴 방향키가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매일 그는 앤힐의 도넛 가게에 간다. 도넛 만드는 걸 진정으로 즐기는, 맛있는 도넛을 만들어서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부자라고 믿는 앤힐을 만난다.

 

 가족 모두에게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지만 늘 불평만 되돌아오고, 자기 자신은 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생활에서 지친 신시아는 마트 농산물 코너에서 홀로 울고 있다. 그것을 본 노박은 그녀가 신경 쓰이고,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차를 몰고 가다가 앞차의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고, 트렁크에 납치된 여성을 구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이고, 행복인지를 알게 된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타인을 돕는다는 게 얼마나 쓸모 있고 기쁜 일인지를!

 

 

이 책이 내게 준 것들_

 

 나에게 좋은 책이란 정답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물론 정답을 알려주는 책은 없다. 내게 좋은 책이란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불러 일으켜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책 혹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혹은 경험 속으로 나를 초대해 온전히 그것을 이해하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책. 마지막으로 내게 좋은 책이란 평범하고 다 알 것 같은 내용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큰 여운과 함께 새로운 생각들이 샘솟는 책. 보통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눈다. 세 가지 중에 하나인 경우에도 나는 꽤 만족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 세 가지가 잘 버무려진 책 같다. 다소 어지러운 감이 있어서 중간 부분에서는 집중력을 잃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아주 명료하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상쾌한 그런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연결고리를 찾아서_

 

리처드와 신시아 (농산물 코너에서 울고 있던 한 여자)

리처드와 닉(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 아주 유명하지만 잠시 그 속을 떠나 있다)

리처드와 앤힐(도넛 가게 주인, 버터의 따뜻한 빛이 흐르는 도넛 가게!)

리처드와 벤(리처드의 아들, 리처드가 늘 함께 하고 싶어하던 아픔과 상처가 많은 존재)

리처드와 그의 아내(늘 바쁘고, 일이 많고, 잡념을 두려워하고, 쉴 틈을 주지 않는 여자)

 

 이렇게 연결 고리 속에 펼쳐진 그들의 대화와 그들의 상황들은 나를 때로 아프게 했고, 나를 되돌아 보게 했다. 모두가 너무도 다른 존재들이지만 모두가 원하는 건 평범한 관심이나 사랑일지도. 그들은 내색하든 내색하지 않든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존재다.

 

 

 

 

뒤죽박죽 정신없이 전개 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 분위기들을 한껏 느끼기 위해 내 기억을 연결_

 

 때로 소설 속에서 나의 기억이 폴폴 흘러간다. 그 상황, 그 분위기. 내가 느꼈던 그 순간과 닮았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어렴풋이 그들의 기분을 짐작해 본다.

 

 

 

 

 그는 유리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너무 늦게서야 그것을 본다. 새의 폭격이다. 리처드와 새의 눈이 마주치고, 다름 순간 둔탁한 소리를 내며 새가 유리를 들이받는다. 바로 앞에서 백 퍼센트 살아 있던 존재가 유리를 때리고는 백 퍼센트 죽은 존재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는 부엌에 가서 커다란 국자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가, 땅을 파고 새를 묻는다. 집 안으로 돌아가서 꽃을 가져다가 무덤 위에 놓는다. p.70

 

 

 고등학교 때, 한 학년 언니가 옥상에서 자살을 했다. 그녀는 한낮에 옥상에 올라가 뛰어 내렸고, 수업 시간에 잡념에 잠겨 칠판 대신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한 학생이 스치듯 추락하는 언니의 눈과 마주쳤다. 그날 이후, 그 눈을 본 학생은 반쯤 미쳐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얼마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던진다는 것이 때로 타인의 인생을 반쯤은 망가뜨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방향으로의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타인의 인생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새' 였기 때문에 그가 미치지 않고 묻어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새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사람의 존재의 위력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네시 반, 누군가가 복도를 오가며 종을 울린다. 사람들이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차가운 물, 차가운 샤워, 거친 수건. 그리고 모두 명상실로 향한다. p.215 

 

 한평 짜리 고시원에서 방음되지 않은 벽 사이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새벽. 누군가가 슬금슬금 화장실로 향한다. 물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는 빨랫감을 가지고 세탁실로 향한다. 누군가는 나갈 채비를 한다. 명상실을 향하고 있는 그 모습과 소리들을 느끼며 한 공간 속에 가장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모르는 척 타인이 되어 웃지도 않고,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고시원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그들은 세이지 횃불을 밝히고 둥글게 앉은 사람들에게 돌린다. 북이 울리기 시작한다. 허공에 향이 가득하다.

"이게 바로 와우와우 부분이지." 앤힐이 말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북소리와 바다가 부서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우리가 혼자이면서 함께임을 알라." 닉이 말한다.  

 리처드는 몸을 기울이고 벤의 귓가에 속삭인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 갈 수 있다."  -p.368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거나하게 술을 마셨고, 가마솥에 구운 삼겹살을 다 먹어 해치운 뒤였다. 마음 치유집단이었던 우리들은 그렇게 앉아 중간에 모닥불을 피웠다. 돌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집단을 이끌어 가는 전문 지도자는 둥그렇게 떠오르는 달을 향해 손을 내밀며 '님은 먼 곳에'를 불렀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가 님은 먼곳에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 물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가 님은 먼곳에

 

 

 왜 그렇게도 이 노래가 아렸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불꽃이 타닥타닥 타오랐고, 시간이 흐르자 각자 소리 없이 이동을 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에만 머물러 있느라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수용되는, 서로의 입김과 공기로 뒤섞였던 그 시간들이 오래오래 기억났었다. 그 흩어지던 밤의 분위기, 잊지 못할 여름밤. 이 구절을 보자 그때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어쩌면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어." 라고.

 

 

 

 

"내가 왜 쉬어야 해?"

"그 일을 사랑해? 만족스러워?"

"그런 생각할 시간 없어."

"그래서 그러는 건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p.485

 

 나는 때로 심심하고 외롭지만 바쁜 것 보다는 여유로운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여유를 모르고 살았다. 자신에게 쉴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재앙으로 여겨지는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어쩔 줄 몰라한다. 자신이 할 일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지극한 두려움. 자신의 영역에 대한 행사, 자신이 꾸려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와 주길 바라는 강력한 마음들을 자식들에게 보여준다. 어쩌면 뭔가를 생각하기를, 스스로에 대한 감정을 느끼기를 거부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이젠 제발 좀 쉬세요! 이제 그래도 돼요!"

 

 

 

 

"요전에 자동차에 치인 다람쥐를 봤어.

죽지는 않고 누워서 미친 듯이 다리를 차고 있더군."

"깔아뭉갰어?"

"무슨 소리야?"

"다람쥐를 깔고 지나가서 그 비참함을 끝내줬느냐고."

"아니, 왜?"

"흠, 당신이 길가에 그렇게 누워 있다면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랄 것 같지 않아? 비참한 순간을 끝내주길?"

"아니." 그는 충격을 받는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아니야." 그는 분명히 하려고 다시 말한다.

 "나에게 말을 걸어줘. 내 손을 잡아줘. 깔고 지나가지 말고." p.486

 

 자신의 비참함을 멈추는 방법은 '죽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늘 스스로 뭔가를 헤쳐온 그녀와 자신의 손길이 누군가에게 생명을 건네는 방법임을 아는 리처드. 생각의 차이는 생과 죽음을 오간다. 우리는 이렇게 다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그저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수밖에.

 

 

 

 

"우리 신혼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화산이 폭발해서 떠나야 했잖아. 재가 날리고 용암이 흐르고."

이것은 예전에 했던 놀이였다. 사귀면서 있었던 일들을 계속 다시 이야기하는 것. p.484 

 

 

 나에게 늘 달콤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만을 해주던 사람이 있었다. K와 내가 만난 건 버거킹에서였고, 그는 쉬는 날에도 늘 먹을 것들을 사들고 매장에 와서 나를 도와주었다. 도넛을 잔뜩 사와서는 스파이에게 내가 도넛을 몇 개를 먹는지에 대한 보고를 하라고 했다. 트레이를 정리하려고 가면 어느새 그가 와서 내 트레이를 뺏고, 쓰레기 봉투를 집어 들라치면 잽싸게 들고가 정리했다. 생일에는 로커에 책과 편지를 넣어 두었고, 집에 도착하면 우편함엔 초콜릿 조각 케잌과 커피가 들어 있었다. 그와 사귀는 2년 동안 나는 우울해질때마다 그에게 첫 만남 이야기를 토시 하나 빼먹지 말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늘 그렇게 내개 말해 주었다. "처음 봤을 때 말야. 너는 야자수 모자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웃고 있었어....."로 시작되는.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내 삶이 언제나 분홍빛으로 샤방샤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았던 이야기를 계속 계속 다시 이야기하는 놀이. 그건 정말 최고의 위안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나에게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르니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니 잘 한 번 살아보세요, 하고 시원스럽게 알려주는 것 같다. 책의 마지막은 밝다. 딱히 밝은 상황이 아닌데도 리처드가 웃고 있는 것이 즐겁고, 그의 상황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나도 그를 따라 내 몸과 마음을 그냥 이 세상에 맡긴 채로 둥둥 떠다니고 싶다. 얼마 간은.

 

 내가 좋아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의 구절로 이 소설의 리뷰를 끝내려고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이렇게 해야할 것만 같아서.

 

『나중 일이야 어찌 되었든, 아무튼 지금 손을 맞잡고 날지 않으면,

이 어지럽게 변화하는 인생으로부터 낙오되고 만다.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사람은 무력하다. 무력한 것 같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_요시모토 바나나, '암리타'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끝나지 않는 이야기 _ 윤성희, '구경꾼들'

 


 

모든 것은 작은 점 하나로 시작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보이지 않는 끈 하나가 단단히 우리들을 엮어 놓았는데, 때론 그것이 떨어진 줄 알고 주위를 헤매기도 하고,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연결이 되어 내 눈앞에 의미있는 것들로 놓여진다.  

 

 

 

 

이야기는 모텔에 찾아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커튼'이 없는 방안에서, 왜 커튼이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꿈인듯 몽롱하게 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나'가 누군가  '커튼'을 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끝이 난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콩알만한 존재로 탄생했을 당시 그 방의 사라진 커튼을 찾듯이,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듯이.

 

 

매일 매일 새겨지는 일상들이, 우리들만의 역사를 내면에 새긴다. 그렇게 새겨진 것들을 디딤돌 삼아 우리는 우리의 것들 타인과 나눈다. 타인이 삶속으로 불쑥 들어가기도 하고, 빠져나오기도 하고,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그러다 평생,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은 존재가 '죽음'이라는 형태로 갑작스레 사라지기도 한다.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향해 간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나눌 것이 많은, 쌓아갈 것이 많은 누군가가 내 인생에서 영영 사라진다는 것은 내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극심한 고통으로 인식된다. 생각지도 못한, 어처구니 없는 일로 큰삼촌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순간에 들이닥친 누군가의 몸뚱이로 인한 죽.음.

 

 

죽음을 받아들이는 형식은 모두가 다르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견뎌낸다. 끊임없는 독백과 생생한 기억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우연히 발견된 신문 귀퉁이에 큰삼촌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남자는 지구 저편에서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남자는 아버지에게 큰삼촌이 사고를 당한 날짜와 시간을 물으려다가 참았다. 그런 식으로 세상의 균형이 유지된 것이라면 자신은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평생 누구를 미워하며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착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자신에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될 것만 같았다. -p.111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으며 끊임없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속에서 어쩌면 자신을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끝에 간신히 매달린 삶을 찾아서 사람들을 만나고, 편지를 쓰고 아이에게 사진엽서를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행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빵봉지에 적힌 이름을 찾아 빵 공장에 찾아갔다. 경비일을 하고 싶어하던 할아버지는 성추행을 당하는 여자 아이를 구하려다 죽어갔다.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었던 고모는 사소한 것들을 견뎌내지 못한 채 수많은 이별 후 일에 전념하고, 작은삼촌은 고모의 연애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자신의 이별 후에야 깨닫게 된다. 회사를 관둔 아버지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여행기를 글로 쓰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할아버지를 잃어버린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또 잠시나마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의 일상을 채워나갔다.

 

 

끊임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이 책속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 책 안엔 진정한 주인공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비중 만큼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목수가 자신이 만드는 가구마다 'ㅎㅇ'을 새겨넣는 사소한 행동이 고모로부터 운명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새벽마다 초콜릿을 먹으러 나오는 여자를 위해 함께 라면을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족들의 따뜻함으로부터 각자의 이야기가 채워져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흩어진 별조각을 각자가 이어 붙이듯 사진과 몇 개의 문장들로 완성된 아버지의 책이 잘 팔려나갈 때쯔음 아버지는 또다른 이야기에 목말라 했고,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쫓아 떠난다. 그 특별한 여행기가 '죽음'으로 완성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과연 나는 내 삶에 있어 구경꾼인가, 아니면 주인공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책속의 '나'는 아버지가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하게 타인의 삶에 느끼고 이해할 수록, 자신의 삶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주인공이 따로 없는 이 책의 모든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을 구경꾼처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얼 이해하고, 무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세상엔 수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떠나지 않아도, 바로 가까이에 그 이야기들을 열어 보일 색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평생 외롭지 않기 위해 달려온, 가게의 한 자리를 지키며 평생을 살아온 외할머니처럼. 결국엔 삶이란 무언가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한 곳을 지키는 자가 삶의 진실에 가장 가깝게 가닿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본다.

 

 

끝나지 않은 것 같던 이야기가 끝이 나자, 나는 그 이야기들에 이어서 타인의 삶을 끄적거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타인과 뒤섞여 나는 온전한 나로 다시 태어난다.

 

 

 

책은 마지막장이 있지만 아마 이야기는 내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우리의 삶이 끝나도 이야기는 계속 되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공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유하,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중에서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일 수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나쁘냐면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나빠. 그건 K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종자야.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49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53

 

 그를 나락으로 밀어넣은 것들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던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102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여기가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나는 그 남자에게 그 얘기를 다 했지. 그러자 그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안아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었어. 너무 아늑하고 포근해서 아마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가봐. 그 남자를 만나서 나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알게 됐어."-125

 

 

 

 고등학교 무렵이었나.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고통 없이 죽어가는 법을 알아 냈다고. 나는 진심 궁금했다. 나에게도 알려 달라고,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챘지만 그런 건 절대 알려주는 게 아니라고 매정하게 말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산다는 것이 때때로 지치고 지루하고 의미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건 안다. 그치만 삶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그땐, 한 발만 성큼 다가서면 옥상에서 떨어질 때처럼 그렇게 죽음과 가까이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면 죽일 수 있는 거라고. 순수하고 맑은 그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이(어른이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그 자체로, 젊음 그 자체로 남게 하기 위해 죽이는 거라고. 나는 그녀의 언어에 매혹되었고, 가끔은 죽이고 싶을 만큼의 사랑 혹은 증오를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뭐 어쩌다 보니, 그녀와도 꽤나 멀어졌는데 얼마 전에 읽었던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을 이어서 보고, 얼마간 잊고 지냈떤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누군가는 살고 살아서 '사람'이라는데, 왜 사람은 그 삶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음'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은 늘 금기시되어 왔고, 나쁜 것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그 판단을 과연 인간이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연결해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미미가 물감통에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집어 넣고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보며, 나는 <몽고반점>의 영혜를 떠올렸다. 어느 날, 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혼하게 되었고, 삶이 망가졌다. 그런 영혜에게 찾아온 형부. 형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영혜의 몽고반점에 매혹되어, 그녀의 온몸에 살아있는 꽃을 그려넣어 작업을 한다. 식물.... 그녀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이 먹는 걸 먹지 않고, 뼈가 앙상해질 때까지 견뎌냈다. 나무가 되는 길이, 죽음과 맞닿아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해내고 싶었던 거다. 온몸에 꽃이 활짝 피어날 때의 그 열망과 생기..... 그것은 미미가 마지막으로 온몸을 다해 작업을 한, 생이 꺼지기 전에 행한 어떤 불꽃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었다. 삶, 그것은 과연 늘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 그것은 그저 어둠뿐인 통로일까. 이 매혹적인, 알 수 없어서 더 끌리는 죽음에의 손길을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이토록 인생은 무의미하게 반복되기만 하는데, 금기로 가득차 있는데!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134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34
 
마지막 구절을 읽고 생각했다. 좋은 작품이란 모두가 아는 간결하고도 간단한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정말 공감한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