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전.숙영낭자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5
이상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문학'을 얼마만에 접해 봤는지 눈을 굴려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들여다 본적이 없었다. 번뜩 생각나는 거라고는 심청전, 홍길동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기출시험문제를 풀면서 접한 어지럽게 흩어진 한자와 고어들이 상형문자처럼 내 앞에 펼쳐졌을 때, 내 오른손은 연필로 그 문장들을 밑줄 그으며 따라가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잡념으로 그득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왜 나는 이 문장을 해독하지 못하는가, 하며. 과연 나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인가. 문학을 문학으로 대하지 못하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고전이 내 속에 스며들 틈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멀어져간 고전문학이 다시 내게로 찾아온 건 십년도 더 지난 지금, 아무 거리낌없이 책을 넘기며 다음 장면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참 오래 살고 볼일이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애정소설'이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 책엔 '숙향전'과 '숙영낭자전' 두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다. 숙향전은 꽤나 긴 이야기로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때론 버겁고, 때론 힘겹고, 지치기도 한 온갖 역경과 시련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고, 숙영낭자전은 후딱 해치울 수 있을만큼 짧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두 작품 모두 비슷한 구성과 짜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부부가 나와 간절히 빌면 갑작스레 아내에게 태기가 생기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들은 천상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에 내려와 여러가지 액운들을 거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그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바로 천생연분인 사람을 만나는 것. 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죽기 살기로 투쟁해야지만 그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사랑을 얻는 게 전부는 아니다. 사랑을 얻고 나서도 다시 고난은 시작되니까. 그리고 그 고난의 끝이 사랑이든 비극이든 자신의 본분을 다 하고 나면 다시 천상으로 가게 된다. 인간 세상에서 해피엔딩이든 언해피엔딩이든 상관없이 하늘에서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1. 이선-선군. 당신이 원하는 남성상은?

 

 숙향의 남자 이선과 숙영낭자의 남자 선군. 그 두 인물을 살펴보자.

 

 

 이선은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좋은 집안, 좋은 용모, 대단한 재주까지 어느 하나 모자라는 것이 없는 이선. 그는 운명의 여인 숙향을 찾기 위해 그녀가 지나온 모든 길을 하나씩 밟아 찾아 헤맨다.

 

이선이 한 살 때부터 걷기 시작하고 두 살 때에는 말을 배웠는데, 말주변이 소진과 장의만큼이나 뛰어났다. 네 살 때에는 글을 배워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다섯 살 때에는 처음 본 글도 또렷하게 외웠고, 일곱 살 때에는 천하의 문장가나 명필도 이선을 따를 수 없었다. p.71.72

 

 운명의 여인 '숙향'과 연을 맺은 후에는 자신에게 또다른 운명의 여인이 한 명(천상에서 자신의 아내였던 설중매) 더 있다는 것을 황태후의 약을 구하러 다니며 알게 된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설중매를 둘째 부인으로 받아들인다.

 

 

 선군 역시 좋은 집안에 좋은 용모, 좋은 재주를 지녔다.

 

얼굴은 관옥 같고 울음소리는 신선처럼 맑고 깨끗한지라.

... 선군이 점점 자라매 골격이 빼어나고 온갖 일에 모르는 것이 없으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칭찬했다. 선군이 열다섯 살이 되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군은 틀림없는 천상의 선관이라" 하더라. p.214 

 

 

 하지만 선군은 숙영낭자 한 사람만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자신이 가진 재주는 있었지만 과거시험이나 지위, 권력 이러한 것들에 무심했다. 그의 소원은 한시라도 숙영낭자와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고, 늘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숙영낭자를 보지 못해 앓아 누운 것도 그의 사랑의 열병이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뻗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보기 싫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간 것도 숙영낭자의 청이었기 때문에 떠밀리듯 간 것이었다. 가는 길에 묵었던 곳에서 다시 돌아와 숙영낭자와 속삭이고 간 것도, 숙영낭자를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펄펄 끓는 사랑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일 중 무얼 선택할래?"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 여자들 대부분은 '사랑'을 선택한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 대부분은 '일'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랑'을 선택한 남자들이 대답한다.  

"사랑을 선택했더니 여자가 떠나더라."  

 

 정말일까? 조선시대라는 상황에서 두 부인을 둘 수 있는 남자들에겐 감격스런 제도가 구비되어 있고, 양반인 남자들이 신분도 집안도 알 수 없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 자체는 백마 탄 왕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끝내 두 부인을 마다하고,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한, 선군의 펄펄 끓는 사랑에, 장원급제할 실력인데도 '사랑'을 택하고팠던 선군에게 한 표를 던지고 싶다.  

 

 

2. 숙향-숙영낭자에겐 그들을 시기하는 이가 있었으니! 미美도 권력이다!

 

 짙은 향내가 번지고, 하얀 백옥 같은 얼굴. 누구나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고, 반하게 되는 그러한 얼굴.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천하고, 더럽고, 하찮은 존재로 여겨진 그녀들이 보고 나면 모두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향수라도 흡입한듯 정신을 못 차리고 그녀들에게 빠져들게 된다.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운명이라며 받아들이게 되고,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고 호통 치던 부모도 그쯤에선 반대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 그 시대에도, 지금 이 시대에도 '미美'는 권력이다. 그녀들은 가진 것 없고,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그 시대에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 있었지만 천상의 선관이라 할 수 있는 이선과 선군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는다. 만약 그들이 가진 재주는 탁월하다 하더라도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천상에서 선녀였다는 것.

 

 그렇다면 미를 갖추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두 인물을 살펴보면 숙향을 질투하여 이간질하는 사향을 살펴볼 수 있다. 진작에 그 집에서 일하고 있었던 사향은 몰래 그 집에 있는 것들을 빼내어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만약 그곳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그렇듯 주변 사람을 주눅들게 하고, 시기와 질투를 부른다. 선군을 좋아했던 매월이도 그렇다. 자신의 청을 거절한 선군이 숙영낭자만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얄미웠겠는가. 그렇다고 그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늘 2인자로 남는, 주인공 대신 홀로 뒤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가슴 앓이를 하는 '미'라는 권력을 갖추지 못한 이가 안타깝게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지지리 복도 없지! 이게 과연 운명이란 말인가?

 

 전쟁 중에 고아가 된 숙향. 그녀는 다섯가지 액운을 가지고 태어났다. 열다섯까지는 그 액운을 피할 수 없다. 그 액운은 하나같이 죽을 액이다. 아무리 제 운명을 익히 알고 있다하더라도 그런 일이 닥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을 것이다. 차라리 죽어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푸념도 들 것이다. 천생연분이 있으면 뭘하나, 자신이 힘겹게 쫓아다니며 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동안은 그와 만날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데!

 

 

 숙영낭자는 자신의 천생연분이 다른 이와 혼인하려는 걸 알고 만류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선군의 사랑은 지극했으나 그의 사랑이 오히려 해가 되어 버린다. 간통죄로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뒤집어 썼으니 말이다. 거기다 제대로 된 혼인도 올리지 않은 채로 그 선군의 아내가 되었는데, 두 아이에게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못한 채로 자결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칼을 꽂은 채로 말이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장담하듯이. 피눈물로 흘러넘치는 인간세상에는 더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4. 환상의 세계는 현실을 잘 살아내기 위한 시원한 숨구멍

 

 조선 시대, 그 당시의 사회 현실은 신분 차별과 부조리한 관습으로 하층민의 인격을 무시하고 남녀의 진정한 사랑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만약 내가 그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면, 신분이 낮은 여자였다면 더더욱 나는 다른 세상을 꿈꿨을 것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동안만큼은 웃을 수 있으니까. 내게 닥쳐오는 고난과 역경은 어쩌면 천상에서 지은 나의 죄 때문이라면 그 죄가 다 소멸하고 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늘나라로 가서 아무런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화사하게 하하호호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거기다 나는 천상에서 신선이자 월궁선녀인 것이다. 인간세상의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훨훨 날아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에 그 현실을 해결해주는 책보다 내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주는 문학을 찾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거란 믿음. 지금은 찌질하고 구질구질하지만 언젠간 화사하고 밝게 빛날 거란 꿈을 꾸는 것이다. 숙향전과 숙영낭자전에서 차르르 펼쳐지는 환상성은 팍팍한 현실에의 도피가 아닌 현실을 잘 살아가기 위한 숨통이 아니었을까.

 

 

5. 운명이란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

 

 나에게도 운명이 있을까. 어쩌면 내 손바닥에 자글자글 생겨난 잔주름이, 쓱쓱 그어진 손금이 내 운명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년이면 으레 보게 되는 점집에서처럼 우리가 태어난 연월일시인 '사주'가 이미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삶을 그 운명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운명 위에 또다른 삶을 개척할 것인가.

 

 숙향과 숙영낭자전을 읽어 내려가며 그들의 운명은 어쩌면 정해진 대로 흐르듯 전개 되어 갔다. 그래서 조금은 불만도 있었다. 다른 길은 없었을까, 하고. 그러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확고한 믿음과 끈기는 어쩌면 그들의 운명길을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이 그렇게 정해 놓아도 중간에 뭔가에 미혹되거나 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여성에게만 정절이 요구되는 것 또한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의 운명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사주가 있듯이 물건에게도 그들의 사주인 바코드가 있다. 그러나 그 바코드가 그 물건의 운명을 결정 짓진 않는다. 그들이 어떤 주인에게 가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바뀐다. 우리들의 손금이 해가 거듭될 수록 달라지는 것과 같이. 운명이란 자신의 행동에 따라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변해갈 내 운명을 믿어보기로 한다. 조금씩 무수히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운명 속에 아마 숙향과 숙영낭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다. 짙은 향내를 풍기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