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잡을 수 없는 환상이었을까.  

 

 <은교>를 읽는 내내, 스무 살 때부터 쭈욱 이어져 온 무수한 나의 짝사랑들이 떠올랐다. 사랑인지, 환상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허기나 외로움, 오기였을지도 모를 내가 가진 나만의 것, 나만의 감정들. 누군가에겐 평범하고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이었을지 모를 빛깔이 한 사람에게는 이 세계를 비출만한 엄청난 빛을 뿜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 사랑과 환상을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닌 것. 환상이 빠진 사랑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2. 적요, 지우, 은교. 그들 세 사람은...

 

예순 아홉의 시인, 이적요.

평온한 그의 세계에 회오리 바람처럼 찾아온 열일곱의 소녀, 은교.

이적요 시인의 한 마디에 문학도의 길을 걷게 되는 삼십대 청년 서지우.

 

 이 책의 첫장은 죽음 앞에 놓인 이적요 시인의 충격적인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열일곱의 은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과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이야기가 이어진다.

 

 자신의 집에 우연히 찾아들어와 잠든 은교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이적요 시인. 적요가 은교를 보는 눈빛을 알아차린 제자 서지우. 그들 셋은 묘한 갈등 속에서 이상한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은교는 이적요 시인 집에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며 자주 왕래를 하고, 서지우와는 마치 남매처럼 투덜거리며 스스럼없는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다투기도 한다. 이적요 시인은 자신의 감정이 은교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육체적 폭발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적요는 은교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고, 터질 듯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반복했고, 서지우는 자신의 스승에게 갖은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존경할 수 밖에 없는 그를 끊임없이 질투했다. 그 둘은 은교라는 아이를 매개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를 죽일 수도 있는 감정에 다다른다.

 

 

#3.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만큼의 감정. 어쩌면 또다른 이름의 사랑일 지도 모른다.

 

 사랑을 배려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 적요는 그것을 은교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사랑을 자신이 소유하고 가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지우는 은교를 육체적으로 가지려고 든다. 하지만 그 둘은 모르는 게 있었다. 사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미 시작되고, 자신의 감정을 장악하며 스스로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감정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적요와 지우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배신 당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뒷통수를 치면서 질투하고 미워하고 멸시하며 거리를 두면서도 깊은 내면에서 거부할 수 없는, 그들의 감정적 소용돌이. 그것은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하는, 죽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던 거다.

 

 때때로 은교는 그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묘한 신경전. 그것은 미움 뒤에 감춰진 짙은 사랑이었다.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4. 진짜, 사랑은 뭘까...?

 

 나는 스무살 무렵, 매번 상대를 바꿔가며 짝사랑을 했었다.그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온 마음을 장악하는 내 마음의 불꽃같은 사랑.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의 손짓, 눈빛 하나에도 의미를 붙여가며 혼자 설레고 가슴 쿵쾅거려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에게 초콜릿을 건네면서도 한 치도 사랑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거쳐 진짜 누군가를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별 것 아닌 것에 화를 내며 싸우기도 하면서 내 속에 없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내 속에 있던 못된 마음, 분노, 화, 질투, 투정.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스스로 밀쳐내고 있었던 감정들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만큼 상대방에도 상처를 주고 싶은 못된 마음.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고통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말들을 상대에게 뱉아냈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처럼 상처를 받아야만 그도 나를 사랑하는 거라 믿었던 거다. 내 밑바닥을 들춰내며 헤뒤집고 내 존재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은 정작 짝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다. 내가 알지 못한 내 모습을 알게 해준, 나를 혼란에 빠뜨려놓아 나를 1미리쯤은 바꿔놓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은교를 읽고, 생각했다. 은교를 사랑한 적요의 마음도, 스승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눈물을 뚝뚝 흘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지우의 마음도, 자신이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죄책감으로 곡기를 끊은 지우에 대한 적요의 마음도 모두 진짜, 라고 말이다.

 

 그리고,

너무 어려서 무엇이 사랑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그저 다 잊고 살고만 싶은 젊음의 피, 은교가 보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피하고 싶었던 적요의 편지를 읽고 엉엉 울며 모든 것을 태울 수 밖에 없었던 그 마음도, 진짜라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무조건적으로 해주고 싶었던, 어떤 말이든 동의하고 싶었던, 무어라 해도 좋았던, 담배연기조차도 향기로웠던, 혼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너무도 떨려, 그의 앞에선 아무것도 먹을 수조차 없었던 그 때. 그를 바라볼 때면 나는 어느 새 눈빛이 흐릿해지고 멍해졌던 그 시절. 그건 과연 진짜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프고 아파서 울고 울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그에게 고백했던 날, 그는 내게 긴긴 이야기를 했다. 그의 첫사랑 이야기, 자신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마음들. 그 모든 이야기는 너와 내가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난 그만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고, 그는 당황하며 울지 말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너의 감정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환상일 뿐이지. 언젠가는 알게 될거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같다.

나의 마음을 어떻게 상대가 단박에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질투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치든 미치지 않든, 그게 무엇이든 사랑의 또다른 속살이다. 뭐라 표현하기도 전에 떠오르고, 떠오르기도 전에 꿈을 꾸고, 꿈을 꾸기도 전에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고 싶은, 놀랍고도 자동적인 감정.

 

 그건 '사랑'이다.

내 마음대로 사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약속 장소에서 오지 않는 누군갈 기다릴 때 나를 비춰주는 외로운 가로등 불빛이, 내 손을 놓고 떠난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내 앞에 툭 떨어진 슬픈 나뭇잎이,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며 만지작거리는 내 폰의 반짝이는 액정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괜찮아. 다 괜찮아. 울지마. 울지마."

 

 그러면 난 흐르는 눈물을 쓱싹쓱싹 닦아 버리고는 씩씩하게 걸어간다. 내게 펼쳐진 이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와볼 테면 와 봐란 듯이! 그리고 나도 가끔은 그 사물들에게 말을 건넨다.

 

"나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그들은 충실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때론 내 옆에 있는 누군가보다 훨씬 진지하고 깊이있게. 내 말의 작은 진동들을 따뜻하게 , 덕지덕지 붙어있는 먼지들을 섬세하게 헤아려 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면 어떤 일어날까? 책을 펼치기 전 제목에 대해 생각하면서 두 눈 반짝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모를 생각했고 누군가의 말을 흘려 들으며 기억하지 못한 숱한 방정맞은 시간들도 떠올렸다. 과거의 어떤 날,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헤아려주었다면 좋았을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랬다면 아마 모든 게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의 내 삶도. 그들의 삶도.

 

 이 책속에서도 어쩌면 달라졌을 세 가지 줄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저 조금 뒤쳐질 뿐이라 여겼던 아들 김일우가 저능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영미. 그녀는 김일우가 바보라는 사실과 동시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김일우의 담임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공무원인 줄 알았던 남편이 계약직이었고, 갑작스레 실직을 하게 되었으므로 하루하루 살기에도 벅찬 시간들이었다.

 

 세오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정기섭은 장사보다는 상인회에 목숨을 건다. 나날이 죽어가는 시장, 그의 앞에 나타난 숙이라는 유혹과 자신을 더 멋있게 포장하려는 허세. 그 허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이 나게 된다.

 

 한 때 잘 나가는 PD였으나 더이상 운도 실력도 따라가주지 않는 박상운. 큰 소리치며 부하직원을 깔보며 언제까지나 잘 나갈 것처럼 위풍당당했으나 죽어가고 있는 프로그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그다.

 

 그들 모두의 시작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랬기에 그 누구도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대박을 터뜨리는 프로그램 기획안이 필요했던 박상운. 세오시장을 어떻게든 살려야했던 정기섭.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김일우 가족들. 그들은 그 시점에서 서로 맞닥뜨리게 된다.

 

 세오시장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던 정기섭은 상인회 사람들과 시장을 살릴만한 것들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야바위게임을 쓰리컵대회라는 명칭으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뭔가 특별한 기획이 없을까 살피던 박상운은 세오시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큰 상금과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것으로 부풀려 일을 진행시킨다. 광고에 뜬 쓰리컵 대회, 가진 돈의 열배를 준다는 인생의 도박! 그것을 본 오영미는 자신의 아들 김일우의 특출난 소리감각에 기대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 대회에 도전한다.

 

 쓰리컵 대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소리로 공의 위치를 맞추는 김일우에게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삼천만원을 쏟아 부은 오영미와 김민구는 그 돈이 5억이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PD인 박상운은 드디어 재기할 수 있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반대로 정기섭은 참가자의 모든 돈을 합쳐도 5억이 되지 않아 애가 탔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모든 걸 엎어버리겠다고 박상운에게 말했다. 방송을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김일우가 스스로 우승의 기회를 놓치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는데, 막내작가의 예리함으로 소리를 통해 공의 위치를 알아 맞힌다는 걸 알게 된다.

 

 드디어 쓰리컵 대회의 당일날, 최종 라운드에 오른 김일우에게 쓰리컵대회 방식을 공이 있는 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이 없는 컵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무대에 오른 김일우. 모든 소리가 그에게 다가온다. 쨍그랑, 쨍그랑, 딸랑딸랑.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김일우를 장악했고, 김일우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경기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오영미, 김민구 가족은 동정심을 유발하여 원금인 오천만원을 돌려받았고, 그것이 소문이 퍼져 모든 참여자들이 돈을 돌려 달라고 하여 세오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쓰이려고 했던 돈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거기다 박상운이 조작한 홈페이지와 쓰리컵 협회에 대한 이야기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퍼져나가 방송계는 물론 시청자들에게 온갖 비난과 멸시를 받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한편 모든 소리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들을 수 있었던 김일우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말들, 언어들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 모든 말들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모든 사물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바람결에서도, 흔들리는 나무에서도,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도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모든 태풍이 지나가고, 비난과 자기합리화도 지나가고, 바닥을 내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또다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모의하고 그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려고 아둥바둥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또다시 만난 정기섭과 박상운은 이번엔 진짜로 쓰리컵 협회를 만들어 그들이 그것을 이끌어나간다. 또한 김일우를 끌어들어 쓰리컵 대회 그 이후라는 방송을 마련한다. 그 빛의 무대에서 김일우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 말, 말 대신 자신의 거대한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언어를 강하게 들었다. 도망쳐! 그는 벌떡 일어나 번쩍하는 커다란 빛을 향해 몸을 던졌다.

 

 

 조금만 더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더라면, 한 발자국만 먼저 양보하고 물러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차마 양보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조차도 각자 자신의 입장을 말하기에 바쁜 우리 사회의 일면을 지능은 떨어진다해도 진심으로 사물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김일우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가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면 김일우의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아도 될 비극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톨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적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p.42-43)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p.43)

 

우리가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이라기보단 친밀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 자체로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56)

 

벤이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아빠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빠가 엄청 대단하지도 지독히 끔찍하지도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되고, 언젠가는 아빠를 한쪽으로 말끔히 치워놓고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p.87)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 (p.157)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_연인들을 단숨에 읽어냈을 때, 공감하는 부분들은 많았으나 너무도 현실적이고 지금 세대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낸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평소에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미화하는 부분들, 의미를 부여하는 속성을 지닌 나로써는 그것이 그리 유쾌하지가 않았다. 어떤 극적인 것도, 운명적인 것도 없이 아주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가 밋밋하게 끝나 버리는 사랑. 불타오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그 사랑이 난 참 싫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_ 한 남자 편을 읽었을 때는 읽으면서 좀더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결혼을 한 상황이기도 하고, 생각해야 할 철학적인 부분들이 꽤나 많았다고 여겨진다. 난 대부분 밑줄을 그었다.

 

연애를 할 때는 늘 더 좋은 사람이, 지금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내 모든 마음을 주지 않았다. 줄 필요도 없었다. 내겐 크나큰 무기 하나가 있었으니까! 그건 '헤어지자' 라는 강력한 무기. 이제까지 쌓여왔던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애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음이 설레 날아오를 것 같을 때는 자연스럽게 표현했지만 아닐 때는 무책임하게 상대방의 마음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은 달랐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내 '무기'가 사라졌다. 결코 '헤어짐'의 다른 말인 '이혼'은 무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한 남자 편이 내 상황에 더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우리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유혹이 찾아올 수 있다. 언제 찾아오게 될 지 모른다. 여기서 벤이라는 남편은 가장 친밀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이를 아끼면서도 유혹이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포착한다.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또한 아이에 잘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대단해서 아이가 불쑥 커버려 자신의 모든 단점들을, 뒤틀린 성격들을 알아차릴까 두려워하는 내면을 가지기도 했고, 자신보다 어리면서 잘 나가는 데다가 성격까지 좋으면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은 늘 여성의 편에 서 있었다는 평을 받아서 이번엔 남자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고 인터뷰에 나와 있었는데, 내가 느끼기엔 여기 나오는 주인공인 벤은 완전 내 마음과 같았다! 남자지만 여성의 마음과 흡사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은 결국 여자가 아닌가 느낄 정도로 여자의 마음을 남자라는 육체에 입혀 표현한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가정의 그 안락함과 지루해지면 찾아오는 신선한 유혹을 함께 가질 수 없다. 또한 사소한 듯 보이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잘 하는 것 하나 없지만 꿋꿋이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를 가진 것이라고 보통은 나에게 소리쳐 말하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씨, 고마워요. 히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랑 나랑 노랑 - 시인 오은, 그림을 가지고 놀다!
오은 지음 / 난다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느끼게 해준다. 표정 하나로 온 우주를 표현할 수도 있다. 우리 존재가 온 우주이듯이. 여러 종류의 그림책을 읽었는데, '색'그림책은 처음이었다. 색으로 그림들을 나누고, 그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색과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책.

 

 

Red

 이 요상한 책을 처음에는 잘 집중을 못했었다. 첫 페이지엔 앙리 마티스의 <붉은 조화> 그림이 떡하니 있고, '생기 있게 식탁을 차리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인생의 정점을 표현하는 레드라는 색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다음엔 활활 타올랐다가 광기에 휩싸였다가 급기야는 붉은 열정으로 댄스, 댄스, 댄스, 춤을 추고 있었다.

 

 나에게도 레드로 가득했던 시간들이 있었을까. 빨강을 떠올리면 주저없이 떠오르는 크리스마스. 너는 손수 뜨개질을 했다며 동그란 통에 말아넣어 선물해 주었던 빨간 목도리. 난 그걸 받고도 시무룩했고, 너는 얼른 목에 둘러 보라고 손짓했고, 그것이 싫어 내팽겨쳤다가 데굴데굴 굴러가버린 빨간 목도리. 마치 올이 풀린 것처럼 너의 마음도 비실비실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던. 마음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뚝뚝 눈물을 흘렸던 그 때. 아픈 줄도 모르고 건드렸다가 지어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던 철없고 이기적이었던 나 그리고 한없이 너그럽고 레드처럼 따뜻했던 너.

 

 

Blue

 메리 커셋의 <파란 안락의자의 소녀>를 바라본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나른한 자세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소녀가 응시하고 있는 건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는 고양이가 아니다. 이곳이 아닌 저곳. 다른 세계다. 소녀가 꿈꾸는 세계다. 꿈꾸기 위해 소녀에게 필요한 건 단지 공간을 가득 채울 파란 안락의자였다. 나는 얼른 소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세계에 가닿는다. 꿈을 꾼다. 내 꿈이 닿는 어떤 지점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나른해진다. 햇살이 비춰지고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좋다. 나는 소녀가 되고, 소녀는 내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되었다가 타인이 되었다가 나는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그 파란 의자를 시작으로 블루의 세계 속으로, 듬뿍 빠져 들었다. 오은 시인이 그려낸 <파란색 크레파스로, 사랑해> 꼭지를 읽으며 눈물이 났다. 다섯 살이 되었다가 일곱 살이 되었다가 열여덟, 스물일곱이 되면서 순간순간 어떤 때를 그려놓았는데, 난 그의 시선을 따라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하다가 그만 슬픔이 목에 걸려 버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고 있었을 때

.......

유혹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때

.......

상처를 감당하는 게

삶의 커다란 부분임을 깨달았을 때

.............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을 때

.........

몇 개의 달성되지 않은 다짐들이 튀어나왔을 때

그것들이 살아야 할 이유로 둔갑했을 때

........

파랗게, 파랗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시퍼렇게 아득해질 때 (p.88- 92) 

 

 

푸르스름한 공기가 번진 저녁. 조금씩 더욱 짙어져 검푸른 저녁하늘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그 때부터 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색이 파랑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늘에 보이는 그 짙은 파랑. 저녁과 밤 사이 보이는 그 짙은 파랑은 늘 새초롬한 달과 함께여서 더 좋았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저녁이면, 만나고 싶지만 보지 못하는 밤이면 언제나 그렇게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 봐 주는. 그래서 덜 외롭다여겼던 그런 저녁과 밤, 밤과 저녁의 사이가 있었다.

 

 

 Yellow

 빈센트 반 고흐 <수확하는 사람>. 노랑의 반란 같다. 금세라도 모든 일렁임이 내게로 밀물처럼 쳐들어 올 것 같은 느낌. 고흐의 그림은 언제나 떨림을 간직하고 있다.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속이 울렁거리고 세계가 흔들린다. 입가엔 미소가 눈가엔 눈물이 맺힌다. 아름다운 것들은 늘 그렇게 떨림으로 다가온다. 환한 빛으로 다가오는 노랑. 너무도 눈이 부셔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만지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같은 그림 오딜롱 르동의 <베아트리체>. 시인은 어느새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는 한 남성으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구애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사랑으로 눈 먼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의 갈구를 노랑으로 표현한다.

 

 노란색 알전구 하나로 작은 상에 환한 빛을 뿌린다. 잘 구워진 고등어 하나에 둘러싸인 밥그릇들이 반질거린다. 그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한 숟갈 뜨고, 고기 한 점 먹고, 벌레 한 마리 잡고, 환하게 웃고,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내내 행복했으면 싶었던 어떤 때를 떠올렸다.

 

White

 알프레드 시슬레의 <루브시엔느의 설경>.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진다. 하나의 길이 나있고, 그 길로 검정색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멀리 사라져 가고 있다. 눈은 수북히 쌓이고, 바람 한 점 없는 겨울이다.

 

 봄이 올 때까지, 오늘이라는 달이 저물 때까지, 내일이라는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내 몸에서 울컥 어떤 물질이 치솟을 때까지, 그 물질로 두 손을 바득바득 씻을 때까지. (p.161)

 

 누군가 흰 색은 모든 걸 품고 있는 색이라 했다. 또 누군가는 흰색은 우유부단한 색이라고도 했다. 모든 색이 숨어 있을 것도 같고, 누군가 건드리면 금세 다른 색으로 물들어 버릴 것도 같은 색. 하양. 그런 하양이 난 좋다. 금방 더럽혀지더라도 흰색 티셔츠가 좋고, 청소하기 힘들고 지저분해지더라도 눈이 수북히 내리고 또 내리는 것이 좋다. 온 세상이 하얗게 된다면 더욱 좋다. 그냥 그렇게 하얗게 하얗게 하얘지고 나면 내 마음도 깨끗해질 것만 같다. 눈 오는 날엔 왠지 눈물조차도 따뜻하게만 느껴진다. 눈이 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Green

 움베르토 보초니의 <마음의 상태 - 떠나는 사람들>. 그의 거친 붓질을 오은 시인은 '숲은 달린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림은 곧 그에 의해 시가 되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혼자인데도 쓸쓸하지 않았다

나에게만 중요한 중간이었고,

나는 조금 이기적으로 이기죽거렸다(p.276)

 

바람을 이기고 소용돌이를 창조하는 것

나무를 쓰러뜨리고 그 위에 우뚝 서는 것

남들이 감히 꿈꾸지 못한 곳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p.279)

 

 질주하는 숲속 풍경을 바라보고 그려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초록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속력으로 어디론가 내달린 적은 있었는지, 어떤 곳으로 휩쓸려 간 적은 있었는지, 자연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들이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새벽 속으로 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Black

 에드바르드 뭉크의 <키스>. 이 키스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키스가 그렇듯이. 다비스 시케이로스의 <절규의 메아리>. 이토록 처절한 슬픔이 있을까. 커다란 아이얼굴의 이마주름이 일그러지고 그 아이 입으로 또다른 아이가 튀어나온다. 주변은 캐캐한 매연과 쓰레기더미. 블랙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 같다.

 

 

 블랙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나에게 블랙은 어둠과도 같은 의미다. 그러나 내겐 부정과 긍정이 함께 온다. 처음으로 느꼈던 따뜻한 어둠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울고 울었을, 혹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바다였다. 그 바다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완벽히 어둠이 찾아왔을 때, 주변에 있는 사물과 사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들리는 건 밀려갔다가 쓸려오는 파도소리 뿐이었다. 그게 난 좋았다. 어둠에 휘감겨 포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만큼은 완벽하게 외롭지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어둠 속에서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 어둠이 지독히 부정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가족들을 기다릴 때, 깜깜한 집에서는 바람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둔 밤 골목길에서 뒤따라 오는 사내의 구두소리, 먹이를 찾아 쓰레기를 뒤지러 다니는 밤의 여왕 검정 고양이까지..... 색 하나에도 이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공존하는 듯하다.

 

너와 나 함께 놀다!

 책을 읽는 동안 색과 그림이라는 조합으로 한 편의 시가, 동화가, 인터뷰가 되기도 했고, 그림 속에 주인공이 되었다가 그림 속에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가 되었다가 그림 자체가 되었다가 화가가 되었다가 했던 오은 시인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놀라고 감탄했다. 또한 마지막 책을 덮었을 때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가능성까지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차가웠다가 뜨거워졌다가 했던, 고민이 떠오르면 펜을 들고 공부하듯 읽었다가 어느 새 빠져들어 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색과 그림을 통해 시와 이야기를 통해 나는 내 마음 언저리에 있던, 언젠가 꽁꽁 숨겨두었던 아픔들을 치유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따뜻했고 한편으론 시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편지를 쓰다_

                                                                     장은진,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늘 편지가 쓰고 싶어진다. 아직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궁금증과 설렘을 전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뻔한 말도 편지로 옮겨쓰고 나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고, 내 마음을 더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도 같다.  

 

 

#1. 살아있다는 건 길 위에 서 있다는 것_ 삶

 

'나'는 모텔을 전전하는 길 위 생활 여행자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와조'라는 개와 동반하는 여행이라는 사실. 그들은 벌써 여행 자체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다가다 사람들을 만나고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이름 대신 숫자로 그에게 기억된다. 그리고 매일 그는 모텔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를 우체통에 텅, 하고 넣을 때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집에 편지가 왔는지 묻는다. 늘 대답은 한결같다.

 

오늘,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P.39

 

자신의 집에 한통의 편지라도 도착하는 날이 그에겐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대답은 반복되는 녹음 테이프처럼 같았고, 그에게 집으로 돌아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2. 죽음은 예고된 순간조차 갑작스러운 것_ 삶과 죽음 사이

 

모텔을 전전하는 '나'와 와조에게 관심을 보이는 751. 751은 『치약과 비누』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고, 자신의 책을 어디서든 판매하고 다니는 여성이다. 처음엔 '나'는 자신을 귀찮게만 하던 751이 왠지 모르게 싫고 피하고 싶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털어놓게 되는 사람이 바로 751이고, 어느새 함께라는 것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혼자서 생활하는 데 익숙한 두 사람이 만나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유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751의 책을 낭독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751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를 혼란에 빠뜨린, 편지 한통만을 남긴 채 떠나버린 옛 애인과 마주친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도려내야만 했던 옛 애인과의 조우는 지난 시간들을 다시금 기억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분명한 건 옛날에 내가 느꼈던 그런 둘의 느낌은 아니란 거야."

"어떤 느낌인데요?"

"그냥 혼자인 느낌."   P.159

 

 

늦은 시각, 꽉 들어찬 모텔에 빈 방이 없는 관계로 예외적으로 가게 된 고시원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골아 떨어진 '나'를 와조는 급히 깨우고, 751과 '나', 와조는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방 한 칸 사이사이에서 삶과 죽음은 이렇게 우리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잠속을 헤매고 있는 '나'를 깨워 화재로부터 구한 것은 그의 동반자 와조였다. 와조는 끝까지 '나'를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점차 에너지는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3. 편지를 입에 넣지 못한 차갑고 딱딱한 텅 빈 우편함 _ 죽음

 

'나'는 당연하게도 집에 편지가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도 여행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물론 병든 와조 때문이었다. 나이를 제법 먹은 데다 길 위에서의 생활이 녹록치 않았을 것이 분명한 와조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삶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조부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날 한 줄짜리 이별 편지를 받은 것처럼. 편지를 기다리는 그에게 아무도 편지하지 않는 것처럼. 와조가 아픈만큼 자신도 여행을 지속시킬 힘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죽음은 그랬다. 정작 죽음이 필요한 사람에겐 더 큰 고통을 주고서 삶을 선물했다.

 

 

 

#4. 절벽 뿐인 낭떠러지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삶은 반전처럼 환히 웃고 있다 _ 삶

 

집으로 돌아온 '나'. 화장실 문을 열자 똑.똑.똑. 수도꼭지에 물이 새고 있다. 약 3년 간 이렇게 물은 홀로 묵묵히 새어 나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지 하루만에 기다렸다는 듯 와조는 죽음을 맞이한다. 집에서 편히 눈을 감은 와조를 얕은 곳에 잘 묻는다. 3년 간의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 버텨낼 수 있었던 힘. 그 힘은 와조와 함께 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옆집 아주머니의 부산스런 발걸음과 수다가 들려온다. 그는 들려오는 소리를 의미로 해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멍하다. 그리고 아차, 하며 옆집 아주머니가 나갔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에게 내미는 커다란 박스 하나. 그속엔 그동안 오지 않았다고 믿었던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처럼 축복처럼 자신에게 내려앉은 편지들을 보며 3년 간의 시간들이 눈물처럼 터져나왔다.

 

이 편지 속에 다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 들어 있다. 이 사람들이 보내준 편지에 답장만 쓰고 지내도 평생을 충분히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신기한 건 편지를 읽고 나서부터 발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내게 오는 편지만 있다면 발작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 P.277

 

 

#5. 마주해야 할 삶의 진실은 결국엔 자신의 몫이다 _ 죽음

 

3년 간 외면했던,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믿고 싶지 않은 그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길 위에서 그 삶의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그는 걷고 또 걷고, 편지를 쓰고 또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만나고를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언제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니까.

 

'나'에겐 가족이 없다.

 

그가 돌아온 곳은 북적대는, 일상에 바쁜 가족들이 귀가하여 돌아오는 집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집이다. 가족들의 죽음.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어서 소중한지 잘 몰랐던 가족들의 죽음.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피부처럼 살갗처럼 붙어있는 것을 떼어내는 고통이 뒤따랐으리라.

 

조부의 장례를 치르러 장지로 떠나던 날, 등기 우편으로 날아온 사랑하는 연인의 이별통보편지를 받는다.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편지에도 일방통행이 있다는 것을. P.211 때론 단 한 줄의 문장이 날카로운 칼보다 더 깊고 아프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잃는 것은 죽은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가족들이 모두 함께 탑승한 자동차에서 내려 '나'는 여자친구를 찾기 위해 헤맨다.

 

그리고 그 날.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이를 찾아 헤매던 그 시각. 가족들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저 멀리, 저 높은 곳으로 흩날리듯 먼저처럼 사라지고 만다.

 

 

#6. 나는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쓴다 _ 삶과 죽음을 잇는 '기억' 으로부터

 

우리는 각기 다른 길 위에 서 있다. 다른 곳을 바라 보거나 다른 곳을 향해 가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진실을 마주하며 우리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매일 편지를 쓰기로 선택했다. 그 행위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될 것이다. 그 통로에서 때론 빛을, 때론 어둠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알록달록 다른 색으로 물들어진 자신의 삶의 광채를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 사람들은 오래오래 죽지 않고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있으리라 믿는다. 그가 숫자로 명명한 사람들은 숫자의 특징처럼 끝없이 계속 더해져 갈 것이고, 반복되거나 겹쳐지는 일 없이 명확하고 개성있게 기억될 것이다. 기억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살아 있다. 기억을 불러오는 순간 우리는 보고 싶은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마치 내일이라도 당장 볼 수 있을 것처럼 일상을 이야기하고 편지를 쓴다.   

 

 

#7. 삶과 맞바꾸듯 편지에 집어 넣는 일상 속에서 내게 남겨지는 것_ 새콤달콤한 여운

 

나는 줄곧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왔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늘 누군가가 떠올랐고, 그 시간 속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었다. 내 시간을 곱게 말아 우체통 속에 툭, 하고 집어 넣으면 그 날의 공기와 바람, 햇살이 어느 날 나의 수신인에게 반짝 가닿으리라 믿으면서.

 

 

편지란 어쩌면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떠나 보내기 위한 것일까. 내 안에 혹은 내 곁에 나인듯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들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내보내는 일. 슬픔, 기쁨, 아픔, 설렘, 고통, 즐거움… 모든 감정들을 편지 속에 털어 놓고 나면 묘하게도 내용 대신 어떤 느낌만이 내 속에 잔잔히 남겨진다. 무거운 진실들도 그렇게 언어의 옷을 입혀 내보내면 늘 가볍게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편지지에 장 마다 번호를 매기고 봉투 크기에 맞게 고이 접어 봉투 속에 쏘옥 집어 넣는다. 풀로 깨끗하게 봉하고 우표를 오른쪽 상단에 붙여 넣는다. 편지를 가슴에 한 번 가득 안고 행운을 빌며 빨간 우체통에 퐁당 집어 넣는다. 편지가 도착할 때 즈음엔 내용은 모두 잊혀지고 보내는 순간의 기억만 남는다. 그 여운으로, 그 기억으로 새로운 바람을 느끼는 오늘을 맞이한다.

 

 

 

책을 다 읽고 나는 '아무도 편지 하지 않다'의 제목을 마음으로 '모두가 편지 하다'라고 바꾸어 불러 본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우편함에 대롱대롱 줄지어 편지들이 늘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지금. 느리게 가지만 아주 오랫동안 마음 속을 차지하게 되는 손편지로 풍성한 11월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