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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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게 펼쳐진 새로운 아침, 긴긴 하루가 시작된다. 남편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깨어 회사로 가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는 온몸과 마음을 내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아이의 밥과 반찬을 만들고, TV를 보고,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에 잠시 자유시간을 누리고, 매일 똑같은 일상이다. 그러다가 문득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아이의 미래를 그려본다. 그 미래엔 늘 내가 있다. 피곤에 찌들어 잠든 남편도 보인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늘 함께 하고 싶어서 결혼한 남편은 일상을 나누기엔 너무 지쳐있고, 휴일이 되면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 바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연애시절이 끝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묶여지면서 우리는 어린시절 겪었던 상처를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내게 펼쳐질 시간들이 나는 늘 궁금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쭈욱-. 그리고 아이와 늘 함께지만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요즘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내게 올리브 키터리지란 여성이 잔잔한 물결에 돌멩이를 던지듯 내게 다가왔다.

 

 

 

 소금기 머금은 작은 바닷가 마을, 일상처럼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 그렇지만 그속을 들여다 보면 누구나 각자의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꼭 그래야 한다고 가슴 속에 굳건히 새겨놓고 있는 사람조차도 때때로 죽음을 생각한다. 올리브 키터리지와 그 주변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을 한 장 한 장 곱씹어 읽으면서 내 삶의 순간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또한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을 미리 앞당겨 경험하고 느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올리브가 살아가면서 겪는 위기와 사건들, 감정과 시간들.... 모든 것들이 온전히 내게 흡수되어 어렴풋하게나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부신 세상에 우리는 이렇게 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부신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며 온다. 우리의 탄생을 환호로 지켜보는 부모님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는 순간 바로 버려지는 아이들도 있다. 그 무엇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화사한 웃음을 건네며 가득 안아주면 세상이 다 내것처럼 포근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모도 처음에는 아이였으나 세상 속에서, 가족 안에서 상처받고 부서져 내린 여린 존재들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삶을 배우는 그런 사람일 뿐이라는 것.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것.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올리브와 헨리는 부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 헨리는 약사이고, 올리브는 학교 선생님이다. 각자의 생활방식이 있고, 그것을 존중해왔다. 또한 아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사랑한다. 크리스토퍼는 너무도 다른 엄마와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라난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약국 보조로 일하는 데니즈가 남편이 죽었기에 그녀를 보살펴 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의 아내, 올리브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짐 오케이시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게 그들 부부 사이에 파도가 일렁인다. 그 누구도 가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정신이 팔려 있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몰아붙이지만 그렇다고 크리스토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때론 사랑하는 것들이 전혀 무관심한 혹은 미움의 형태로 나타난다. 감정은 뚝 끊어낼 수도, 사랑과 사랑 이외의 것으로 구분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당신이 알기나 해? 종일 애들 가르치지. 염병할 교장이라는 작자하고 멍청한 회의는 줄줄이지. 장 보고 요리하고 다림질하고 빨래하고. 크리스토퍼하고 같이 숙제하고! 그런데 당신은......"

.

.

당신은, 고작 다른 사람들 눈이 무서워서 날더러 일요일 아침을 포기하고 교회에 가서 궁뎅이 붙이고 앉아 있으라는 거잖아!"

.

.

"죽도록 지겨워." 

-p.20

 
친밀해질수록 멀어지는 것들
 
 가족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가장 친밀한 관계일수록 '어떤 말'들이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까울 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때론 내밀한 곳에 숨겨둔 비밀을 가장 친숙한 가족에게 털어 놓고 싶지만 그것이 위기가 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될 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슴 속에 비밀을 만들게 되고, 가끔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올리브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남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을 때, 혼자서 슬픔을 꺼억꺼억 삼키며 헨리의 저녁을 준비했던 잔인한 그날처럼. 헨리가 데니즈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슬픔을 보고, 기쁨을 보려고 했을 때, 데니즈 외엔 아무것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가 않아 올리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을 치켜뜨려고 했던 노력처럼. 생에 찾아오는 어떤 유혹들을 뿌리치고 자신의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무수한 나날들은 조금씩은 서로에게 거리감을, 가슴 속에 조그만한 구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를 안을 수도, 젖은 이마에 키스를 할 수도, 슬리퍼스가 죽던 밤처럼 소녀 같은 플란넬 파자마를 입은 그녀 곁에서 잠들 수도 없었다. 올리브를 떠난다는 건 제 다리 한쪽을 톱으로 썰어내는 것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p.49

 

 올리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데니즈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데니즈에 대한 작은 미련 한 톨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p.56

 

 

인생이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p.224)라고 말하는 아이를 낳게 될 수도 있다. '할머니' 대신 '엄마'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올리브 곁에서 늘 함께 할 줄 알았던, 때때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했던 아들 크리스토퍼가 아내 수잔을 따라 다른 도시로 가서 살게 된다. 올리브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멀어져간다. "수잔이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냥 오늘 바로 죽어버리지."(p.258)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어떤 부모가 자식과 그렇게 떨어져 살 거라고 예상할 것인가. 일수를 세가며 아내와 나눈 대화가 식사 메뉴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밀려오는 당혹감에 하먼은 일요일 아침마다 만나는 친구인 데이지를 사랑하게 된다. 문득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놀라움이란. 어느 겨울, 보비와 제인은 늙었고, 모든 일상을 함께 나눴고, 너무 행복했다. 제인은 보비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어떤 과거에 보비가 다른 여인을 만났다는 사실-사랑은 아니었지만-을 알게 된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둠의 터널에서 빠지나오지 못한 듯 그렇게 부엌에 앉아 한숨과 눈물을 토하며 멍해지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허기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니나를 만난 올리브가 한 마디의 말 때문에 문득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니나와 찌릿한 마음을 나누게 된다. 또한 일상처럼 옆에 있을 줄 알았던 헨리가 뇌졸중으로 요양원으로 가게 되는, 결국엔 먼저 죽고 혼자 남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  예상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닥뜨리며 우리는 조금씩 삶을 배워나간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p.124

 

 

 극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던 밤이 흐르고 나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도무지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올리브와 헨리가 병원 화장실 인질사태를 겪고, 서로를 마음을 헤집는 심각한 '어떤 말'들 때문에 결코 그들은 그 밤을 극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헨리가 죽고, 크리스토퍼가 두 번째 아내 앤이 크리스토퍼의 아이를 낳았을 때, 크리스토퍼는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찾아간 그들의 집에서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한 올리브는 화가 났고, 크리스토퍼는 '엄마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더이상은 맞추지 않겠다고, 택시를 불러 드릴 테니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는 말을 했다. 잔인한 아들을 뒤로 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올리브는 그것 또한 극복하지 못하리라 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삶이 뒤바뀌듯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알게 되는 것 같다. 무엇도 극복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그래도 여전히 헨리를 그리워하고, 크리스토퍼를 사랑하는 올리브라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듯이.

 
때때로, 지금과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p.378

 

 

우리에겐 어느 때이든 동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올리브. 일상이 매일 똑같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조용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침에 눈을 뜨며 느낀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지옥이다. 함께 할 사람이 없기에.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쓰러져 힘겨워하는 잭 케니슨을 만난다. 그를 데리고 간 병원 대기실에서 올리브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그들은 날을 잡아 저녁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다. 때로 정치적 성향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의견으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을 함께 나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자식들이 등을 돌리는 것. 아니 등을 돌리기 전에 부모인 자신들이 먼저 그들에게 가한 상처가 너무 크다는 걸 인정하는 일. 모든 것이 상처가 된 그들이 만나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끔찍한 모습도 스스럼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친구, 우리에겐 언제나 그것이 필요하다. '사랑' 없는 삶이 지옥이듯이.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p.483

 

 

 

 

 그녀의 생은 이상한 방식으로 내게 삶의 어떤 지혜를 선물해 준 것 같다. 그저 펼쳐보여준 이야기가 앞으로 내 생에 마주치는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버스를 타고 창가를 바라보며 문득 문득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릴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일상을 잘 살아내야겠다는 결심들이 내 속에 가득가득 채워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환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지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p.483,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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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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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는 언제나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가끔은 공간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잘 묘사된 공간,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행동과 대화와 감정들. 그것들은 충분히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독자가 마치 그 속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을 꽤나 힘들어 하는 독자다. 거기다 다른 나라 언어로 된 익숙하지 않은 긴 이름들도 여전히 낯설다. 책장을 다 덮고도 다 외울 수 없는 이름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그 속에 펼쳐진 그들의 삶이다. 물론 그들에게 펼쳐진 일상은 지중해다. 지중해 속에서 짠내를 맡으면서, 파도와 싸우면서 항해한다. 때론 분노로 끓어오르고, 때론 추억으로 시간을 때우고, 때로는 지독한 그리움과 싸움을 한다. 어쩌면 그곳은 갇힌 공간이다.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 일상이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소중한 사람들, 가슴 속에 간직한 꿈과 희망들은 자주 사람들을 괴롭힌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가까운 다른 도시에 잠깐씩 여행을 간 기억은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벗어나 일상처럼 살아본 일이 없다. 그래서 다른 공간, 내가 가보지 못한 색다른 공간이 배경이 되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속에서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준비한다. 완전히 빠져들 때쯤 이야기는 끝이 난다. 책장을 덮으면 한동안 그 여운들로 가득해진다. 눈을 감거나, 창문을 열고 풍경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나는 책 속의 어느 장소에 가 있는 듯 하다.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하얀 풍랑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떠오르는 태양빛, 그 사이사이로 비춰드는 햇빛,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의 잔물결..... 이따금씩 떠오르는 물보라..... 나는 그곳을 항해하고 있는 한 명의 밀수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나는 일상을 살아내면서 미래의 어떤 시간들을 갈망한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나기를. 여기가 아닌 거기로 훌쩍 갈 수 있기를. 이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기를. 금세 외로워지고, 그리워질 걸 알지만. 그렇게 일상 속에서 뭔가를 그리워하고, 떠난 후에는 그 일상을 그리워하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지독스럽게 술을 마시기도 했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으며,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가슴 속에 열망을 따뜻하게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중해의 푸르른 물결을 느끼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그의 묘사에 빠져들었다.

 

가끔 떠나고 싶은 다른 세상 속으로 책을 통해 달려 들어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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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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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들로 그득한, 미미여사의 소설집 '눈의 아이'를 만났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다섯 편의 단편들을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인간의 진득한 욕망들이, 구석구석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일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첫번째 단편, '눈의 아이'

서른 살이 된, 어느 날 함께 하게 된 동창 모임. 늘 함께 하던 네 명이 모였다. 늘 함께였던 한 명은 그 자리에 없었다. 열두 살에 살해된 유키코. 그녀만 빼고 그들은 모였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잘 살아 있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 유키코를 완전히 떨쳐낸 적은 없었으리라. 빨간 머플러, 빨간 코트, 빨간 장화를 신고 눈 속에 파묻혀 시체가 된 아이, 유키코. 그날은 우연처럼, 필연처럼 눈이 내렸고, 유키코의 발자국이 눈에 찍혀갔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 저주 받은 나, 열두 살, 유키코가 죽던 순간에 함께 죽어버린 나, '나'는 바로 유키코를 살해한 장본인이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왔지만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자기 속의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같다. 어떤 감정이든 느끼려면 자신의 어떤 내면이 필요한 법. 그 아이가 나였고, 나가 그 아이였다. 끔찍한 진실이다.

 

두번째 단편, '장난감'

한 완구점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그 완구점에 관한 괴상한 소문이 돈다. 안주인인 할머니는 죽었고, 그 이후로 소문은 더 심각해진다. 할머니에 재산을 둘러싼 자식들의 분쟁이 이어진다. 그리고 진실이든 아니든 소문과 나쁜 기운은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장난감처럼 내팽겨쳐진다. 할아버지마저 사라진 후, 한 아이는 그의 영혼을 본다. 마치 그 영혼을 달래듯, 함께 하듯. 그렇게 함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분명 현실에서 찾게 되는 무엇이 있으리라.

 

세번째 단편, '지요코'

한 아이가 테마공원에서 핑크색 토끼 인형탈을 쓰고 풍선을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더러워진 인형탈을 꾸역꾸역 입고 그 토끼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니 기이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이 인형 혹은 장난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본다. '지요코'다. 어린시절 가장 사랑했던 인형. 지금은 안부조차 물을 수 없이 멀어진 그 인형. 그랬다. 이 토끼 인형탈을 쓰면 사람들이 어린시절 좋아했던 인형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 어쩌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보여주고, 또 그 추억을 간직했기 때문에 삶을 건강하게, 정직하게 살아낼 힘을 주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도둑질을 한 아이와 엄마를 본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이다. 어떤 인형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질 때 뒷모습엔 검은 손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나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내 자신에게도 묻는다, 내게 가장 소중했던 인형은 무엇일까. 나는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네번째 단편, 돌베개.

돌베개라는 전설이 있다. 나그네가 쉬었다 가면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 주면서 잠이 들면 돌베개 위에서 그들을 죽이고 물품들을 빼앗가 가는 부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을 지켜보는 딸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나그네 대신 그 자리에 누워 있었고, 그 부부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인다. 인과응보에 대한 이야기. 사건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그 사건이 으레 어떤 것 때문에 일어났닥 단정짓는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다 밝혀지는 것도 아니며 인과응보라는 방식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믿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끼친 모든 일들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꼭 그렇게 된다고.

 

다섯버내 단편, 상흔

험난한 세상을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정의를 자기방식대로 실천하고 싶었던 한 사람이 진심으로 원하는 세계를 온라인에 구축했다. 진심으로 원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때론 거짓 같고, 끝내 진실을 알 순 없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끝내 그것에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또 단번에 누군가를 죽이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비록 잘못 되었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다 할지라도. 어떤 일이든 결국엔 상흔은 남는 법이리라.

 

 

다 읽고 나니, 그녀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내 마음에 내려 앉았다.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 장면들이 나를 조금은 괴롭힌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옳은지 헷갈리는 세상 속에서 그녀가 펼쳐놓은 이야기들은 그래도 삶의 긍정적인 기운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사건은 일어나고,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속에서 맑고 좋은 기운들을 만나 힘차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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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시인선 37
김충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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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연둣빛 시집을 만났다. 시인 김충규의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시집과 제목과 같은 시로 처음 그의 언어를 만났다. 전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 시인의 시집을 펼쳐 보았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공 중에 끌어올린, 그의 세계 속에 푸욱 빠져 버렸다. 이상하게도 툭, 하고 눈물이 났다. 내가 열망하던 세계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거기서 헤어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언어가,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일관성 있게, 생과 사를 오가면서 그는 허공 중에 바람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고래와 구름을, 숲과 물새를 그려내고 있었다.

 

 

허공에게 바치는 시를 쓰고 싶은 밤이다. 비어 있느 듯하나 가득한 허공을 위하여.

허공의 공허와 허공의 아우성과 허공의 피흘림과 허공의 광기와 허공의 침묵을 위하여......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들어가 쉴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허락받기 위하여......

소멸에 대해 생각해보는 밤이다. 소멸 이후에 대해. 그 이후의 이후에 대해......

구름이란 것, 허공이 내지른 한숨...... 그 한숨에 내 한숨을 보태는 밤이다.

 

                                                              2012.1.16. 밤 10시 25분

                                                                                  김충규

               

 내 속에 잠재해 있던 끓어오르는 열망이 그의 언어로 다시 되살아났다. 내 속에 갇혀 있던 언어가, 타인의 언어 속에서 새파랗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소 나는 내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부풀어 올랐다.

 

 시인이 발견한 가치와 의미. 그가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무수한 어둠을 통과했을 것이고, 막막한 터널 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고, 치열한 자기 내면과의 싸움, 처절한 고독과 마주했을 것이다. 슬픔, 절망, 외로움, 무의미와 고독, 허무 속에서 자주 괴로워했을 것이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 때문에 끝나지 않은 밤속을 헤맸을 것이고, 허공 중에 할퀴어진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며 자신의 울음소리로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그의 시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었고, 허공 중에 쏟아낸 음악이 나를 웃게 했다.

 

 

울지 마 곧 밤이 와 밤이 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저 허공에 성곽을 지으러 올라가야지 허공만이 유일한 안식처

둥둥 허공으로 떠오르는 영혼들을 봐 지상에서 고당했던 영혼일수록 더 가볍게 둥둥

나비같이 투명한 영혼은 제트기같이 빠르게 허공으로 올라가

.

.

빛이 수줍게 내려와 시신들을 수습하는 지극히 한가롭고 평화로운 이 세상에

만약 허공이 없었다면 어찌 생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 하공이 없다는 상상만 해도 질식해버릴 것 같아

텅 비어 있어도 허공은 늘 만찬이야 영혼이 맑아 날개를 얻은 생명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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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오르기 위하여 행복한 사후(死後)를 위하여

너도 뛰지 않을래? 우리 같이 뛰자

                                                                                      -p.16,17 [허공의 만찬] 중에서

 

 

 그가 만들어 놓은 따뜻한 안식처인 허공에서 나는 따뜻한 숨결을 느낀다. 생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힘을 믿게 되었다. 만찬같은 허공 속에 그려진 그의 언어에 내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래, 함께 함께 뛰고 싶다. 그것이 생이든 죽음이든, 그 중간이든 상관없이!

 

 

시간이 정지해 있을 수도 있는 숲으로 가요

어제도 내일도 없는 숲이 우리를 매혹시킬까요

다만 낙오자가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만족합니다

.

.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유일한 길이거든요

말할 수 없이 지겨우니까요 이곳, 우우......

 

                                                   _p.18,19 [말할 수 없이 지겨우니까요]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살아온 날의 흔적을 싹 긁어내었으면 하는 밤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만 약간 허락되었으면 하는 밤이다

 

  -p.59,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그가 만들어 놓은 숲엔 낙오자가 없다. 어제도, 오늘도 없다. 그리고 내일도. 그저 존재하는 곳. 그곳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매혹시킬 것이다. 가끔 시간의 흐름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는 순간 아니 그렇게 느끼는 순간 우리는 어떤 몰입을 경험하는 것 같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그런 것. 시간 따위는 없는, 어떤 구획도 없는. 너와 내가 그저 만나는 시간. 그 시간 속에는 지루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만 약간 허락되었으면 하는 밤, 이라고.

 

 

 

우리 모두는 자궁 속에서 죽은 태아같이 웅크리고만 있습니다

 

숨결이 간결해지려면 맑은 어둠을 더 많이 들이켜야 합니다

 

                                                          -p.33 ,[우리는 누구인가요?]

 

 

왜 내 곁에 있나요? 정, 말, 당, 신, 누, 구, 예, 요?

 

                                                        -p.57, [당신, 참 이상한 사람]

 

 

나는 누굴까. 당신은 누구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일까?

그저 이 밤, 허공 중에 떠도는 당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내 곁에 있는 당신은, 왜 내 곁에 머물까.

나는 도무지 내 자신이 멀쩡한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런 당신은 나와 같은데....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되는, 그렇게 잘 버무려진 우리가 되려면 맑은 어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을 숨겨둔 맑은 어둠. 어둠을 그렇게 들이키고 나면 좀더 깨끗하게 빛이 나겠지.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

.

.

그저 세상이라는 유리벽에 반복적으로 미끄러지다

일생을 훌쩍 허비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

                                                       -p.24,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 지금이 그런 때

.

.

질서 없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영토이므로 먹구름은

몽롱한 동경이다 불안하므로 더 애틋한 불륜이다

.

.

먹구름이 비를 내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다

 

                                                                 _p.60, [먹구름을 위한]

 

 어떤 밤이었다. 모두가 사라진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어둠이 몰려왔다. 나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불을 꺼둔 채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옆 창문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꺼져갔다. 내 속에 뿌리박힌 어둠이 빛을 몰아내고 있었다. 땅 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허공 중에 가볍게 날리는 먼지는 내 육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듯 풀썩 주저 않고 말았다. 그 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떤 것도 내 슬픔을 견뎌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슬픔이 완전히 나를 지배했다. 그것은 생을 간단히 포기할 수도 있는 무섭고, 거대한 물결처럼 내게 다가왔다.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이 구절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아마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먹구름처럼 이미 젖어 언제든 무너져 내릴 수 있지만 질서없이 흐트려져도 좋을 그런 밤이다. 그런 그런 밤. 누군가를 느끼는 밤.

 

 

 

느닷없는, 꽃의 붉은 울음

창밖에 수북수북

언어로 무언가를 완성하느라 밤새 끙끙거렸다

가녀린 펜으로

붉은 울음을 듣고도 앉아 있다면 참 아득해지는 일이어서

슬그머니 일어나 창을 열었다

지붕에서 어둠의 유약을 제 몸에 바르던 고양이가 멈칫

내 쪽을 돌아본다 무심히...... 물끄러미......

허공의 유전에서 솟구치는 흐릿한 빛의 원유(原油)

사방으로 튀는 소리

끝없이...... 꽃 없이......

참으로 오랫동안

고갈을 모르고 언어를 주물렀지

아니, 정작 내가 원했던 건

꽃의 붉은 울음을 술잔에 모아

고양이와 나란히 지붕에 앉아 나눠 마시고 싶었지

서로 붉게 붉게 취하고 싶었지

내 속은 원유(原油)를 다 생산해버린 텅 빈 유전 같아, 후훗-

이봐, 내 등에도 어둠의 유약을 좀 발라주겠니?

 

                                                         -p.86, [참으로 오랫동안] 전문

 

 제일 마음에 들었던 시다. 이 시를 읽으니 왠지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어느 새벽, 붉은 눈으로 창을 열어 바라본 세상.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고양이 한 마리. 더 맑아지고 싶었던 영혼에 빛으로 가득찬 어둠의 유약을 바르고 싶었던 시인 김충규. 그는 빛으로 만든 어둠이었고, 생과 사를 오가는 허공을 떠도는 영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허공 중에 내지른 한숨, 그 한숨으로 만들어낸 구름, 풍성한 여인과 같은 안개, 바다 위를 날으는 물새이자 어둠 속을 유유히 걸어가는 고양이었다. 살아있는 동안 써내려간 그의 시는 생과 사가 다르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뿌려놓은 시들에 둘러싸여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생은,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빛이 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라일락 향이 번지면, 바람이 불면 나는 또 그의 시집을 펼쳐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뚜벅뚜벅 세상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벚꽃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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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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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 라는 작가는 이름만 들어봤지 작품으로 만나본 적이 없다. 여기저기서 에코의 팬을 만난 적은 있다. 잠깐씩 좋은 문장들을 추려 놓은 것들을 봤을 때,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움베르토 에코가 내게로 왔다. 역사적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나에게 도전장을 건네듯이 내게 온 것이다.
 
처음에 몇 장을 읽고는 몇 번인가를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주인공인 시모네 시모니니가 등장해서는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이래서 싫고 하는데, 진짜 프랑스인이 이런가 싶고(내가 워낙 귀가 얇은 편이다. ) 유대인은 왜이렇게 싫어하는가 싶고, 모든 게 궁금증 투성이었다. 그의 증오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걸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아무리 가정사를 따지고 들더라도 그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현 상황을 재치있게 잘 파악하고,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가볍게 여기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나온다. 비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럴 듯하게 보여야 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음식이다. 음식만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다는 식이다. 과연 그가 먹는 것을 묘사하고, 늘어 놓을 때면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고 있다. 멋진 레스토랑에 앉아 그와 함께 고기를 썰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고약한 인간이라도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는 바라보는 이도 나쁘게만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시모네 시모니니는 1830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과거를 하나하나 떠올리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지나감에 따라 할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챘다고 의심되는 공증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망설이지 않고 실행해 온 추악한 삶이 하나씩 재구성된다. 가리발디의 의용군인 척 시칠리아 원정에 가담하여 공작을 하고, 프랑스로 옮겨 가서는 드레퓌스 사건의 문서를 위조하고, 탁실이란 희대의 사기꾼을 뒤에서 조종하는 등 정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입장을 바꾸며 거짓과 음모들을 날조해 내온 시모니니.그를 보면 날조와 위조의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게 아무리 좋지 못한 재주라하더라도 그의 재주에 감탄을 하게 된다.
 
 
19세기 유럽 역사의 굵은 획을 그은 여러 사건들,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시모네 시모니니가 항상 가담하고 있었다. 직, 간접적으로. 단지 이 사람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빼고는 모든 게 척척 놀랍도록 들어맞는다. 그것은 꼭 이 사람이 아니라도, 어느 시대에나 조작하는 인물이, 중간 인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을 캐내려는 사람 위에, 진실을 조작하는 사람, 진실을 조작하도록 시키는 사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보이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득시글거리면 뭐가 뭔지 사람은 알 수 없게 돼버리고, 결국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도대체 진실이라는 게 있긴 있는 건지. 있다면 왜 결국 밝혀지지 않는 것인지. 이미 조작되어, 진실로 믿고 있는 사건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리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내겐 꽤나 어려운 소설이었지만 큰 맥락을 잡는 데는 성공한 듯 싶다. 에코가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공을 들여 조합을 하고 배치를 하며 사건들을 짚어나가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분명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서 일거다. 그건 바로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내면을 꿰뚫어 보는 힘을 기르라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누군가는 뭔가를 위조하거나 조작하기 위해 우리를 다른 곳으로 관심 쏠리게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모든 정치적 조작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큰 사건을 다른 큰 사건으로 막는 형식. 눈에 보이는 진실 안에 팔딱거리고 있는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그의 책을 통해. 어렵지만 도전의식이 불끈 솟는 그런 소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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