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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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이 일' 인해 관계가 부서지고 망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일은 분명 그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엄마가 있다. 어쩌면 그들도 힘들었을텐데 내치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아빠가 있다. 친엄마가 아닌 사람에게 차별과 멸시를 받은 입양한 여자 아이가 있고, 입양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엄마처럼 함부로 대한 동갑내기 딸도 있다. 입양한 여자 아이를 자신의 친동생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준 오빠와 언니가 있고, 그것을 질투와 미움으로 바라보는 동갑내기 동생도 있다. 동성친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한 여자 아이가 있고, 세상의 숫자와 영어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 나간다.

 

 각 챕터마다 한 사람의 시선으로 내면까지 보여주는 글쓰기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속도감 있게 그들의 내면을 따라가 읽었다. 그들의 내면을 지켜보는 일은, 나의 내면을 지켜보는 일처럼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웠다. 우리가 확신하는 일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다. 추측할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각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단호히 잘라내고 끊어낸다. 무엇이 옳은지는 각자의 삶의 방식으로 대변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딱딱하고 어색한 엄마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내 모든 마음을 털어 놓기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A4 용지에 빽빽하게 3장 가량 편지를 썼다. 나는 그 편지를 쓰며 때론 웃고, 때론 울고, 때로 뭔가가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편지를 엄마에게 줄 때, 나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해야 했다. 나는 그에 대한 결과로 엄마가 내 손을 붙잡고는 참 많이 힘들었지, 하며 나를 꽉 안아주는 모습을 아주 여러 차례 머릿 속으로 반복 재생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정말 너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결과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건넨 건 싸늘한 표정과 한 마디의 말이었다.

 

"넌 정말 별걸 다 기억하는구나. 이젠 그만 잊어도 될 것을. 애가 왜 그리도 특이한지...쯧."

 

 눈물과 포옹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나의 상상은 산산히 부서져 내렸고,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힘들었던 시간만큼 엄마는 엄마가 가진 삶의 무게만으로도 버거워 겨우 살아내고 있었다는 것을. 각자의 상황을 누구에게 토로한다고 한들 관계는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표현해주는 것. 섭섭한 일보다는 당신이 있어서 좋았던 일, 여전히 함께 해서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일과 무작정 솔직해지는 일은 항상 터무니 없는 결과와 서로에게 또다른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완벽한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운명처럼 거울을 보듯 누군가가 내 마음을 투명하게 헤아릴 때가 있다. 그것은 서로의 상처를 보았을 때다. 서로의 어둠을 보았을 때다. 아마 책 속에 나온 두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 비난을 던지고 싶지 않다. 그들의 선택이 누군가의 마음을 닫게 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겐 그것이 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어찌됐든 살아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마치 금기시 되는 말처럼 '그 일'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맨 마지막에 되어서야 그 일이 무슨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에서 확인하시길.

 

아, 나는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203

 

 인간이란 존재는 죽음을 앞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다른 생명을 부르는 것처럼.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나는 그저 함께 하는 사람이 여전히 그대로 내 곁에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밑줄 긋기>

 

 물론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도 재미만 들리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버릇을 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연습이 귀찮다. 새것에 적응하는 데 난 늘 어려움을 겪어왔다. 진취성은 나와 거리가 있다. 사람들의 행태, 생김새, 옷 색깔, 대화에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책을 선호한다. -9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써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12

 

 어느 쪽이든, 책과 삶을 포개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술 마실 때를 빼곤 오직 책 속에서만 어렵사리 생기를 유지하는 내 삶을 바스러뜨릴 수도 있는 짓이다. 나는 사람보다 책이 좋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12

 

 

 

 어쨌든 얼마 되지 않는 내 친구들은 거의가 술친구들이다. 그러나 그 친구들마저도 내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어쩌면 가장 가깝다 할 P마저도. 가족들에 대한 내 감정이 그렇듯. 그 친구들도 나를 그렇게 대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그리 대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나를 진정으로 대하겠는가? -25

 

 

 황량한 문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내면이 황량해 보였고, 경쾌한 문체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 성품도 경쾌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강건하리라 짐작했던 사람이 실제론 여린 경우도 있었고, 겸손하리라 건너짚었던 사람이 실제론 오만하기도 했다. -27

 

 

 

"세상에 금지돼 있는 건 없어요. 마셔도 되지요. 근데 오늘 술을 드시면, 치료기간이 두 배 이상 길어질 거예요. 저 같으면 완치될 때까지 술을 안 마실 겁니다." -34

 

 나는 술 없이는 낯선 사람과 얘기를 못 한다. 낮이든 밤이든. 남과 얘기하는 데 반드시 술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술 없이 얘길 나누는 것이 열없다. -34

 

 

 세상에 금지돼 있는 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해볼 필요는 없다. -36

 

 

 내가 속물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속물이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처럼. 그러나 중간 규모의, 아니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며 한세상 살아온 나는 신분의 힘이라는 걸, 계급의 힘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남에게 고개 숙이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수모스러운지도 알고 있다. 내 나이가 되면 민형이도 그걸 깨달을까? 아니 그 아이는 이미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젠가 민형이에게 그 얘길 노골적으로 꺼내자, 그 녀석은 오히려 "계속 공부를 하는 게 수모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알 듯도 싶었고 모를 듯도 싶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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