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먹는 법 - 든든한 내면을 만드는 독서 레시피 땅콩문고
김이경 지음 / 유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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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지? 깊이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에는 추리소설, 고등학생 때에는 무협지 등 주로 뇌에 즐거움을 주는 재미위주의 책들을 읽었다. 그 당시에도 왜 책을 읽는지는 나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주위에서 책을 읽으라고 강요한다는 것, 그리고 재미있으니까 라는 이유 정도일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역사는 옛날 우리의 이야기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도가 이유였다. 결국 나는 책을 뚜렷한 목적 없이 큰 방향 없이 읽고 있었다. ‘책 먹는 법이라는 이 책은 책이란 나에게 무엇이며 왜 내가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책이란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픽션보다는 논픽션의 책을 선호하면서 거기서 알게 된 정보를 젠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책이 나에게 가진 매력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깊이 있는 학습보다는 수박 겉핥기식의 책읽기였으며 학습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책읽기를 통해 단순히 안다는 것을 넘어 의식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었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때려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p.63” 저자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해서 책읽기를 통한 자기 의심하는 자아, 반성하는 독서를 강조한다.

 

책은 주위의 현상과 사물을 보는 눈을 키워준다. 하지만 인간은 익숙함과 친숙함에 약한 동물인지라 자신과 가까운 지식을 선호하게 되고 한 쪽으로 기울은 정보를 지속적으로 습득한다. 오딧세이에 등장하는 키클롭스처럼 세상을 보는 외눈만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과연 내 책장은 내가 믿고 싶어 하는 작가의 책들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증명해 주는 위주의 책을 읽게 되고 폭넓은 생각과 깊이 있는 사고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굳히게 되는 방향으로 사고의 폭을 좁혀갔다. 책 읽기야말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의 한 방법이지요. 책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와 견해를 접하고 이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독서가 가진 의미입니다. 이때 자신을 돌아본다는 건 자기 안의 허위와 편견을 들여다보는 것이며, 최대한 투명한 눈으로 자신과 세계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p.44” 책읽기는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지식의 강을 얼게 하기위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 고이거나 얼지 않는 유연한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냥 읽기는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해서는 낯설고 손이 가지 않는 책들에게도 구원의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한다. 낯설고 손이 가지 않는 책이란 어렵고 쉽게 이해가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저자는 불편한 독서를 하기를 권한다. 그 방법으로 반복 독서, 쓰면서 읽는 법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저자는 어려운 책을 읽기를 강조한다.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은, 어렵다고 여겼던 앎을 얻는 기쁨만이 아니라 내 안의 세포를 깨워 한계를 넓히는 드문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내가 모르는 세상, 내가 모르고 외면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나를 찾기 위해서도 반드시 어려운 책을 읽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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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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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다른 배경을 가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서로 다른 부모님에게 태어나,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다. 다른 부모,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는 말은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비슷한 사고를 한다. 그 단적인 예가 성공에 대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해 일명 sky라는 대학교를 나와서 의사, 판사, 변호사 등의 전문 직업이나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규정하고 선망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다른 사고를 가지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음에도 비슷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비슷한 성공을 꿈꾸는가? 같은 한국 땅에서 같은 문화권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문화는 누가 만든 것인가?

생각의 좌표라는 책은 이런 질문에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을 포함해 학교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서 특정 정보를 올바른 정보로 인식시키고 다수를 이루지 못한 소수의 지식은 틀리고 도덕적이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더 큰 문제는 누구도 거기에 의문을 제시하지 않으며, 자각하지도 못한 채 각자가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발적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p 72-73”

 

누구나 우울한 현실에 변화의 씨앗을 심고 싶어한다. 수직 상승하는 전세값과 집값, 쉴 새 없이 오르는 물가. 미동도 없는 월급. 3포세대를 넘어 5포세대로 향해가는 비참한 사회. 하루에도 수십 번 벗어나고 싶으며 바꾸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제자리 걸음이다. 아니 조금씩 후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수에 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피똥 싸게 노력하고 는 언제나 그 다수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소수는 의 의식 언저리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무능력자, 또는 위험인물로 입력되어있다. 다수를 이루고 있는 조중동은 대표적인 언론기관인 반면 소수인 한겨레는 구독해 본적도 없지만 언제나 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신문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 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것으로다....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 되어 있다. 진보정당은 어떤가?.... 물론 대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접근해선 안되거나 접근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p.91”

 

이 책은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고... 당연히 내 생각은 헤게모니 승리자들의 것이다. 학생 때는인 서울하기 위해 눈물 나게 단어외우고 수학 문제 풀며 역사 연대를 외우고, 사회에서는 다수에 편입되기 위해 토익학원가고 치열한 취업경쟁에 뛰어들며,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폼 나는 폰을 구입하려고 한다. 그것이 나의 자발적인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조차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탈의식하자고 주장한다. 사람에게는 이기적 선택을 하도록 하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 존재 또는 처치가 의식을 규정하는 일차적 이유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한다. 그래야 원활한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사회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을 위한 의식이라고 굳게 믿게 만든다. 이러한 의식들은 라는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여과망을 통과해서 저장된다. 그러나 여과망이 있다고 해서 철저히 개인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과망 자체가 국가나 사회의 의도에 따라 조작되거나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교육이나 사회적 통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p.20”

인문학 즉, 사람에 대한 공부,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공부하는 인문사회학이 중요한 이유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자발적 복종의 상태에서 벗어나 내 생각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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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김탁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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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넘쳐나고 감당 안 되는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다. 뭘 손에 쥐고 읽어야 될지, 내가 어떤 정보를 찾아 봐야 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제목만 보고 손이 가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응축된 책의   사전 정보도 본 적도 없이 제목에 끌려 사는 책이 있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서정적이면서도 그리움을 불러오는 제목이다. 뿐만 아니라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제목이다. 만나고 이야기하는 중에 상대방에게 나를 기억시킴으로서 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라는 존재를 알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 와중에 좌절하고 나의 존재를 다시 인정받기 위해 일어난다. 권력, 명예, 부 등은 개인적인 욕망이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나를 기억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힘을 휘둘러 나의 강인함을 기억시키며,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나에 대한 존경심을 기억시키고, 올바르거나 부정적으로 돈을 사용해서 나의 금전적인 우수함을 기억시킨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동은 상대방의 기억에 나를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그러니, 당연히 잊혀지는 것은 서러울 수밖에 없다. 잊혀진다는 것은 그의 기억에서 나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며, 그의 공간에서 나의 공간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의 존재에서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잊혀진다는 것은 슬프다. 그래도 오늘도 나는 존재하기 위해 기억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꿈 속에서 즐겁게 술을 마시던 자가 아침이 되면 불행한 현실에 슬피 울고 꿈 속에서 울던 자가 아침이 되면 즐겁게 사냥을 떠나오.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고 꿈속에서 또한 그 꿈을 점치기도 하다가 깨어나서야 꿈이었음을 아오. 참된 깨어남이 있고 나서라야 이 인생이 커다란 한 바탕의 꿈일 줄을 아는 거요.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깨어 있다고 자만하여 아는 체를 하며 군주라고 우러러 받들고 소치는 목도이라고 천대하는 따위 차별을 하오. 옹졸한 짓이오. 공자도 당신도 모두 꿈을 꾸고 있소.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또한 꿈이오. p.203 (장자-제물론)”

 

인생은 꿈과 같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꿈처럼 기억된 것은 잊혀진다. 이왕에 잊혀지고 사라질 꿈과 같은 기억이라면 아이처럼 순수하고 밝게, 남녀 간의 사랑처럼 뜨겁고 격려하게, 흐르는 강처럼 차분하고 잔잔하게 기억되자. 꿈이 사라지듯 기억도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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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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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를 지나 중세까지 인간의 시선은 인간외부의 세상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신과 인간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 등이 관심사였다면, 근대에 접어 들어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인식에 관한 문제로 좀 더 세밀화 되었다. ‘라는 존재는 어떻게 세상을 인지하는가? 등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세계전쟁은 라는 인간중심의 철학에서 구조속에서 인간을 인식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만 따로 떨어져 세상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자기를 구축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물결 속에서 몸을 맡기기거나 싸우면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는 것이다. , 인간을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동물로 무리 속의 일원으로서 보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다니는 학교와 내가 만나는 친구들이 현재의 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봐....’ 라는 책은 우리의 인식의 방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다. 광복이후에 미군정시대부터 급격하게 밀려들어온 서구의식은 선진문명이라는 미명하에 무조건적으로 우리 문화에 흡수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우리라는 단체의식에서 라는 개인적으로의 변화이다. 여기에 자본이라는 괴물이 들어오게 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서로 관계를 맺어가며 알뜰살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급격히 사회는 좌, , , 아래로 분열되어 옛날과 같은 끈끈한 연대감과 사랑은 사라졌다. ‘거꾸로 생각해봐....’라는 책은 이런 사회의 변화에 대한 걱정을 토로하고 있다. 승자독식, 그 야만의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착한커피와 공정무역이야기, 함께 먹는 밥, 동무, 꿈 등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개체화되어가고 있는 사회에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외모로, 성적으로, 부자동네 가난한 동네로 아이들끼리 가르고 상처 주는 학교에서 돌아와 친구나 언니 오빠들과 서로 이야기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서로 이겨 내며 울고 웃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해나갈 때는 공동체라는 것이 좋고 살아갈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거야. p.147“

 

  최근에 본 조너선 하이트의 행복의 가설이라는 책에서는 인간은 독립적인 개체 또는 무리 속의 일원으로 정확히 나누어서 볼 수 없다고 한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이해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중립이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인 동시에 무리의 일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한 쪽으로 쏠린 배는 침몰하게 되어 있다. ‘우리라는 배에 탑승해 있는 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배의 공명정당한 규칙에 따라 그리고 내가 가진 올바른 생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간다면 개인의 행복 뿐 만아니라 사회의 안정과 번영도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먼저, 올바른 기준과 가치가 세워진 사회와 개인이 전제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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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완역본 하서 완역본 시리즈 1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유성인 옮김 / (주)하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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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자본주의의 도입과 산업사회의 발달로 더럽혀진 우리의 자아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라는 소리는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지만, 그 방대한 양과 문학이라 하면 떠오르는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 때문에 막상 읽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 와중에 읽게 된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이다. 이 작가의 작품은 카르마조프의 형제들 이후로 두 번째 읽는 작품이다. 카르마조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단순히 어려운 주제를 논하기 보다는 소설처럼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사건 속에서 무언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구도로 소설이 진행된다. ‘죄와벌’ 의 경우도 주인공이 전당포 노인을 죽이고, 점점 압축해오는 예심판사의 의심, 주인공의 심리묘사, 범죄진행과정 등은 추리소설과도 맞먹을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재미는 주인공의 독백과도 같은 말들을 통해 범죄 후의 범죄자의 심리, 범죄 후의 불안감, 형사들이 범인을 잘 못 짚을 때의 오만감, 예심판사의 의심이 그를 향할 때의 두려움 등을 너무나 자세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내용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첫째, 죄와 벌이라는 제목처럼 일단 죄를 저지르고 난 후에는 인간인 이상 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에게 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또한 살인을 계획할 때부터 불안감을 나타내다가, 살인 후에는 병까지 앓게 된다. 주위에서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듯한 갑작스러운 감정변화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은 성악설을 주장해 오던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둘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는 기독교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기독교신자는 아니라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타고난 죄, 즉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주인공의 살인죄는 예수를 죽는 것을 방치한 죄를 나타내며,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죄를 고해성사하는 고백하는 대상은 ‘소냐’ 라는 황색감찰을 받은 창녀이다. 소냐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너무나 순수한 인물일 뿐 만 아니라 수형소의 죄수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는 존재이다. 소냐의 희생정신과 소설 마지막 수형소 장면에서 죄인들의 마음을 바로 순화시켜 그들의 관심을 바로 얻게 되는 장면 등에서 소냐는 예수의 모습을 나타내는 듯하다. 주인공의 고백에 대해 소냐는 바로 신고하기 보다는 자수를 독려하고 수형소까지 따라가게 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소냐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신론이었던 주인공은  수형소 생활을 하면서 소냐의 희생과 사랑에 점점 정신적인 정화를 이루는 모습이 묘사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의 원죄는 주의 사랑을 통해서만 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소냐의 어머니는 자신이 지위 높은 대위의 딸이라고 수시로 강조하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것을 알린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과연 인간성을 대표할 수 있는지 의미를 제기한다. 소냐의 아버지 장례식때 주위의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사회적 지위가 있는 루진은 소냐에게 돈을 훔쳤다는 혐의를 들며 그녀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한다.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자비심 넘치는 인물인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소냐라는 창녀가 그녀의 신분처럼 얼마나 더럽고 악녀인지를 나타내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은 루진이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소냐를 이용한 자작극임이 들러나면서 사회적 지위가 인간성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이 쓰여질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 다시 말해 유럽의 새로운 이념과 러시아의 중세적인 이념의 대립과 그로 인한 신분의 이동 등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사회 문제를 나타내고 있지 않아 짐작해 본다.

 

 문학이라는 장르가 역시 시대를 초월하는 이유는 거기서 다루는 문제들이 단순히 한 시대를 반영하기 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안고 가야할 문제들을 담고 있기 아니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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