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진가
모데라타 폰테 지음, 양은미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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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진가>를 읽으면서 내내 읊은 건 ‘모데라타 폰테’라는 저자의 이름이었다. 저자 소개를 보면 <플로리도로>라는 로맨스를 쓴 시인이라는데 나는 모르는 책이고, 본명이 모데스타 포조라는데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된 사람이 되고 싶어 계속해서 읊어봤다. 모데라타 폰테, 모데라타 폰테.


여류 작가들은 저작을 한 두 편 남기고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데라타 폰테도 역시 딸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은 하데스 강을 건넜다. 한 명의 작가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 작가는 작가의 인생은 부수적이고 그보다는 엄마로 아내로 더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


모데라타 폰테가 좀 더 창작에만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면 좀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그 많은 생각을 머릿속에 넣어둔 옛 여인들이 출산이라는 난관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져야했다는 것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부수적인 문제. 나는 <여성의 진가>를 읽는 동안 내용이 집중하고 싶었다. 500년 전에 살았던 여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싶어서.


당연히 오래 전 이야기를 읽을 때는 오래 전 그 사람들이 처했던 상황과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당연히 16세기 베네치아라는 시대적 한계를 품고 있는 여인들 입에서 나오는 과학은 거의 대부분 틀렸다(더구나 그 과학 분야도 점성술이니 현대 지식에 비추어 보지 않더라도 그 당시 아주 똑똑한 여인이 알고 있던 과학 지식의 한계가 그 정도였구나 라는 사실이 충분히 실망스러운 동시에 사실 귀엽기도 하다).


하지만 여자들이 남자와 동등해질 수 있는 방법이 그 시대의 지식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는 동의한다. 자기 처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남녀의 지위 차이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여인들이 500년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비슷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데는 조금쯤은 쓸쓸하기도 하다. 지금도 상당히 들어맞을 남자를 향한 성토들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아무리 깨어 있는 여성이라고 해도 한 시대에 갇힌 여자로서 모데라타 폰테는 결국 아내로서 여자로서 책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 두 페이지의 그 실망스러운 결론이라니. 그 쓸쓸한 체념이라니. 하지만 꼭 알아두고 싶은 여인을 만났다는 데 만족하고 싶은 독서이다. 부랴부랴 읽고 우리 딸아이에게도 읽어보라고 했다. 물론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일 테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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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가 되기
존 가드너 지음, 임선근 옮김, 레이먼드 카버 서문 / 걷는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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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가 되기> 장편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장편소설가에 관한 책(띄어쓰기의 엄중함이 장편소설가는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특별한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국어 사전에는 장편 소설은 띄어 쓰고 있다). 소설 가운데 장편을 쓰는 소설가가 아니라 장편소설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 관해 말해주고자 노력한 책.


소설 쓰기가 자기 삶의 전부인 많은 작가들처럼 전문가이기에 알고 있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존 가드너가 써내려 간 소설가 되기 안내서는 읽는 재미가 있었지만 결국 소설가는 나로서는 넘사벽이구먼, 하는 깨달음을 얻으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소설가는 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결국 멈추지 않고 쓰는 사람만이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엄중한 선언 앞에서는 많은 것이 결여된 소설 쓰기 능력 가운데 특히 장편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거의 없다는 것을 절절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장편소설가 되기>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소설가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존 가드너의 에세이, 존 가드너의 생애 한 부분을 다룬 자서전으로 읽어도 틀린 독서는 아니지 않을까 싶지만, 일주일 동안 내내 들고 다니면서 읽고 또 생각해본 바로는 이 책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목표가 무엇이 됐건 간에 분명히 도움이 되는 걸출한 안내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목표가 딱히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그 목표가 화가여도, 작곡가여도, 번역가여도, 혹은 사업가여도, <장평소설가 되기>는 충분히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인생을 살아나가려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은 읽어보고, 자기에게 특별히 도움이 되었다면 곁에 두고 여러 번 읽어봐도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살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면 자신이 그 일에 적성이 있고 능력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적성이 있다면 능력을 기르고, 능력은 부족하지만 꼭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묵묵히 시간을 들여 능력을 기르면서 하고 또 해나가는 것.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지는 말되,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 내가 만들어낸 결과를 구체화할 방법을 찾아가는 법. 나 자신을 좀 더 제대로 파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내는 것. 존 가드너는 장편소설가뿐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삶의 조언을 이 작은 책에서 마음껏 해준다.


물론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을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겠지만, 장편 소설을 쓸 마음이 없는 나도 아름다운 보라색 표지를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여러 번 이 책을 정독할 테고,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번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할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그저 쓰고 싶었다는 이유로 정말로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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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여, 너의 안부를 묻는다 -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게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시간
송용구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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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여, 너의 안부를 묻는다> 송용구, 평단


아주 가까이 다가온 미래에 대한 환경 메시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이다. 모두 다 너무나도 잘 알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실천할 수 없기에 무시하는 생태 관련 책이다. 쉽게 접하기 힘든 시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문학 평론가인 송용구 선생님이 생태를 고민한 결과물을 책으로 담은 책이다. 생태 관련해 송용구 선생님이 책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생태시와 생태사상>, <독일의 생태시> 등 여러 권에 자신의 생태 사상을 담았으며 책의 집을 찾아오는 독자들을 정신적 자녀로 삼아 독자들을 지식과 인격과 미학적 문장을 겸비한 인재로 키우려고 자상하고 온화하게 책을 써주셨다.


하지만 <나무여, 너의 안부를 묻는다>는 생태책이라기보다는 시를 소개하는 책처럼 읽힌다(나에게는). 책에서 소개하는 시인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은 김지하, 신경림, 김용택, 안도현, 정호승, 함민복, 류시화 등 대부분이 한국인 시인이었다. 서양 작가라면 권터 그라스 한 명. 시적, 인문적 소양이 아주 부족한 독자가 새로운 책을 만나 시와 시인을 배웠다.


이제는 시에서 많이 멀어졌고 시를 읽어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예르크 부르크하르트의 <인류학> 같은 시를 읽을 때는 지구 문명을 걱정한다, 라고 소리칠 수 있는 일을 시인은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전율하기도 했다. 물론 저자 소개에 나오는 것처럼 대놓고 가르침을 주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곳이 곳곳에서 보여 살짝 웃기는 했지만.


하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다. 울산이 생태도시로 환골탈태하는 방법이 고래 네 마리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것이라니(36쪽~). 고래를 수족관에 잡아가두고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는 쇼를 가지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시도요 고래의 생명권을 인간의 생명권과 평등한 것으로 대우했다는 생각은 위험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다. 정말로 생태도시로 탈바꿈하고 고래의 생명권을 위한다면 울산시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래를 풀어주어야 한다. 지구의 나이도 지각의 연대 측정법 같은 방법으로 알아내야지 E=mc2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95쪽).


읽는 내내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살짝 읽다가 말다가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현대 시인들이 지구를 생각하며 얼마나 분노하고 한탄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엿볼 수 있는 독서였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을 괴롭히고 있는 폭염도 결국은 생태 문제다. 폭염에 대처하는 자세가 에어컨 가동과 자동차 출퇴근이 되어서는 그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 지구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까? 모두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시인의 문제 제기에 화답해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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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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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떠나보내며>의 부재는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이다. 망겔은 프랑스를 떠나면서 개인 서재를 정리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제 몇 년 남은 생에 서재를 정리해 상자에 넣고 창고에 보관한다. 친구들은 저자의 서재를 나중에라도 복원할 수 있도록 어느 선반 어느 지점에 책들이 있었는지를 꼼꼼하게 정리한다. 서재 자체가 저자의 역사가 될 사람, 알베르토 망겔의 책이다. 망겔은 늘 보르헤스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저자이지만 보르헤스보다 훨씬 편한 글을 쓰고 훨씬 더 사람들을 고민하는 저자라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나는, 보르헤스를 고민할 때도 망겔의 책을 뒤적인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도 역시 익숙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보르헤스가 등장하지만, 이 책의 진가는 단지 거기에만 머물지는 않을 터. 며칠 아껴가며 읽었지만 결국에는 끝을 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도 서운한 그런 독서였다.


망겔은 서재를 정리하는 순간 순간에 떠오른 소회를 문학과 역사와 인문적 사유로 풀어낸다. 서재를 정리하는 이야기이되 저자의 자서전이자 독서 감상문이며 평론이 되는 책이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도 행복하고 문득 책을 꺼내 아무 데나 펼쳐봐도 그 순간 내게 있는 여유 시간을 풍성하게 채워줄 책이다.


책의 가장 앞에 나와 있는 한국어판 서문. 서문부터 망겔은 이 책이 어떤 책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다른 나라에서 출간한 책에는 당연히 없을 <서재를 떠나보내며>의 한국어판 서문. 다른 나라 독자들이여, 우리를 부러워 해도 된다. 서재를 정리한다는 주제를 넘어서는 심오한 사색들은 <서재를 떠나보내며>를 거듭해서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한 사람이 말해주는 책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저자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 한평생 독서와 책과 도서관을 이야기하는 독자이자 작가이자 사서이자 번역가인 망겔의 책은 같은 주제를 끊임없이 다른 느낌으로 다른 형식으로 다른 내용을 써낸다. 망겔의 말에 화답해 멋진 주석을 달아주신 이종인 선생의 노력도 빛이 나는 책이다. 누구보다도 닮고 싶은 알베르토 망겔의 책. 저자는 부디 너무나도 오래 살아 더 많은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주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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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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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문과 교수이신 정민 선생님이 번역하고 글을 쓰신 이덕무 선생의 청언소품이다. 정민 선생님과 이덕무 선생의 조합이라면 읽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 더구나 초판 20년 만에 다시 간행되는 귀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한 번을 다 읽고 그 뒤부터는 옆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보면서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내면 한 번 들여다보면 좋을 멋진 책이다.


이덕무 선생처럼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삼아 날을 새고 책을 읽어나갈 수는 없지만 선생이 직접 지은 자서전 <간서치전>에 나도 미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뽐내보는 독서이다.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는 것도 비슷하고 책을 읽는다고 쌀이 나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 것도 비슷하니, 내 이덕무 선생에게 질 것 없다 억지를 부려 본다해도 마음에 그늘질 일도 없다.


이덕무 선생은 “글을 읽었다면서도 시정을 향한 마음을 지녔다면, 시정에 있으면서 능히 글을 읽느니만 못하다.”(117)라고 하셨다. 책을 앞에 두고 있어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라 한다. 책을 읽기 전에 써먹을 궁리만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 캬, 나는 책을 읽어도 써먹을 데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으니 능히 이덕무 선생의 벗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충대충 읽고 되는 대로 외워서는 자기에게 이익되게 할 수 없다.”(257쪽)라고도 하셨다. 나는 대충대충 읽되 되는 대로건 뭐건 외우지 않으니 애초에 이익을 탐하지 않는 선비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능히 이덕무 선생의 벗이 될 수 있을 터.


속으로 이런 농담을 하면서 쭉 읽어나갔으나 사실 마음은 아주 무거웠다.


옛 성현의 말씀은 좀 더 진득하게 책을 읽고 나를 생각하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꾸짖으시니까. “독서는 정신을 기쁘게 함이 으뜸이 되고, 그 다음은 받아들여 활용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301쪽)


이덕무 선생의 차분한 짧은 글귀는 여러 차례 거듭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한참을 고민한 뒤에 읽는 정민 선생의 글은 내 생각을 들은 또 다른 저자의 가르침이라 새롭고도 즐겁다. 한문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한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의 짐이었는데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은 그저 눈으로 보고 쭉 시선을 따라가면서도 마음이 편해진다. 왠지 이덕무 선생은 내 공부에 집중하고 남의 공부를 탓하지 않은 너그러운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겠지.


낚싯대를 드리우고 찌에 집중하면서 오롯이 나에게 골몰하는 삶을, 시간을, 공부를 해보고 싶다. 정민 선생님이 계속해서 좋은 책을 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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