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1 리처드 파인만 시리즈 4
리처드 파인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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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지 20년 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랄프 레이튼이 파인만과의 대화 내용을 정리해서 만든 책이기 때문에 파인만이 저자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구술집혹은 인터뷰 글의 장르로 소개하는 게 맞을 거라 생각한다. 원서에는 커버에 레이튼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비록 파인만의 이름 아래에 자그마하게 인쇄되어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교묘한 편집이긴 하지만 그마저도 번역본에서는 빠져 있어 원저자가 파인만이라고 착각하게끔 고의로 디자인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물론 레이튼이 머리말을 썼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는 피해갔다고 하지만 이 책을 홍보할 당시에는 파인만의 이름만을 앞세웠을 거라 확신한다. 불법도 아니고 이런 식의 출판사 판매전략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왠지 거슬리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책의 특성상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북 연주자, 화가, 금고 열기 등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답게 이게 과연 한 사람이 경험한 일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일화들이 펼쳐진다.

물리학 교재의 바이블이라는 찬사를 받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라는 책의 머리말에는 흥겹게 북을 치고 있는 파인만의 사진이 실려있는데 왜 그런 생뚱맞은 사진이 실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도 들려준다.

파인만은 브라질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브라질에서도 파인만은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파인만 씨, 오늘 저녁에 호텔 바로 앞으로 삼바 밴드가 행진할 거예요. 꼭 들으셔야 해요.”
“아, 나는 오늘 좀 바쁜데,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군요.”

파인만이 호텔에서 연주를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직접 삼바 밴드에서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삼바 음악을 좋아해서 지역 삼바 밴드에 들어가 처음 접해본 전통 타악기를 배우며 삼바 축제를 준비한다. 처음 배우는 악기인지라 당연히 멤버들에게 욕도 먹고 창피도 당하지만 이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배워서 기어코 삼바 밴드와 함께 거리를 행진하며 연주에 동참한 것이다.

이외에도 엉뚱하고 기인 같은 언행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책에는 파인만 자신이 학문적으로 이룬 업적에 관한 내용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고, 그 일을 어떻게 실현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해 주점에서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듯이 자연스럽게 툭툭 건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아인슈타인과 파인만은 피해갈 수가 없다. 이 두 사람은 당연히 천재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파인만의 천재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천재적인 재능은 전공 분야에서는 빛을 발하지만, 일상에서는 별 쓸모가 없을 때가 많다. 3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파인만이 여전히 회자되는 것은 그의 학문적 업적과 함께 유쾌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삶에 대한 열정 때문일 것이다.

열 살쯤에는 나도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알고 싶은 게 넘쳐났던 거로 기억한다. 지금은 모든 것을 알게 되어 호기심이 없어진 걸까? 글쎄, 호기심은 지식의 상태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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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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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편의점에 가서 우유 한 통 사온 이야기도 이 사람이 하면 뭔가 특별한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사람들 말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글을 쓴다면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물론 말을 잘 하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스티븐 킹>

현존하는 미국 작가 중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은 누구일까?
나는 스티븐 킹이라고 생각한다.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유명해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 베스트 셀러 작가는 뱃속에 이야기 주머니를 따로 달고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을 매혹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다. 논문을 쓸 때조차도 스릴러 같이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정말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어떤 작품을 읽어도 그의 글들은 평균 타율을 유지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깊이에의 강요를 견디어 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의 소설을 펼쳐보면 어릴 적 머리맡에서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현재 이 작가의 가장 큰 적은 다작(多作)이 아닐는지.

<폴 오스터>

스티븐 킹을 언급한 것은 또 다른 미국 작가인 폴 오스터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 역시 뛰어난 이야기꾼 중 한 명이다.

폴 오스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달의 궁전>을 통해서이다. 다음에 읽은 <뉴욕 3부작>으로 나는 오스터 빠돌이가 되어 ‘닥신사(닥치고 신간 사수)’ 가 되었다. 근래 들어 다른 곳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다 보니 그의 신간들을 놓치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놓친 작품들을 다시 찾아서 읽어 보고 싶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대놓고 한 수 가르치고자 하는 책들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도 많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투영하는 요런 소설 나부랭이들이 주는 감흥은 괜찮은 매력이다. ‘소설은 계몽하지 않음으로써 계몽한다’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에 동의한다.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마다 시점과 화자가 조금씩 바뀌는 구조로 되어있다. 1인칭으로 쓰여 있는 1부는 애덤이 화자가 되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이 이야기는 애덤이 나이가 들어 백혈병으로 죽어가며 자서전 형식으로 쓴 자전적 이야기의 일부라는 것이 2부에서 밝혀진다.

2부에서는 애덤의 원고를 읽은 친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미완성 원고를 남기고 죽은 애덤의 행적을 찾아가는 친구의 내용이 3부에서 이어진다.

애덤의 원고는 <봄>, <여름>, <가을> 3부로 구성이 되어있다.
소설가인 친구의 조언에 따라 각 부마다 시점을 바꾸어 가며 쓰면서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제목인 <보이지 않는>에 대해서는 95쪽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2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되었고 이런 자그마한 시점 변화에 따른 거리 덕분에 나는 그 책을 끝낼 수가 있었다.”

글을 쓰던 중 난관에 봉착한 애덤이 어려움을 토로하자 소설가인 친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해 주는 내용이다. 애덤은 친구의 조언대로 2인칭으로 시점을 변화시켜 제2부(여름)를 완성하게 되고 제3부(가을)는 3인칭으로 쓰이게 된다.

설명하다 보니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으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오히려 쉽게 읽히는 부분도 있다. 잦은 시점의 변화와 액자 구성의 형식으로 인해 리듬이 끊길 것 같은데, 그 간극이 비교적 촘촘하여 집중력과 기대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1967년 봄에 그와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뭐랄까, 그냥 꽂혔다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이 문장에 꽂혀 버린 것이다. 나는 이렇게 관성에 저항하는 문장을 좋아한다. 보통 ‘그와 처음으로 만났다’ 혹은 ‘보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악수를 했다’라는 표현은 낯선 느낌을 주어 비탈길 중간에서 우뚝 서게 했다. 이 문장은 멋지거나 뛰어나거나 새롭지는 않지만 내게는 그다음 문장을 쫓아가도록 힘을 실어준 문장이다. 첫 문장이 두 번째 문장으로 이끌고 이어서 다음 페이지로 견인을 하는 식으로 달려가다 보니 어느덧 1부가 끝나는 78페이지에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홀림이었다. 모름지기 구라를 치려면 이렇게 쳐야 한다.
오직 나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구라꾼의 미덕이요 자질이다.
역시 오스터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은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남은 페이지들을 넘기게 되었다.

이 작품 또한 폴 오스터의 여타의 작품들처럼 깊이 있는 심리 묘사와 섬세한 문체, 리얼리즘과 판타지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등의 미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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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구조인류학 한길그레이트북스 8
에드먼드 리치 지음 / 한길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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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를 하나 풀어 보자.

Q) <성서>는 역사일까 신화일까?
A) 정답은......

맞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정답이다.

우리의 마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고, 어지간한 말빨로는 그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리숙하지 않은 당신은 이미 이 문제는 문제가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성서>가 종교 경전이라는데 있다. 이 논의는 층위가 서로 다른 곳에서 그 전제를 깔고 논리를 펼쳐가기 때문에 적절한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산더미 같은 자료와 증거들을 가져오더라도, 역사라고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역사라는 증거들로만 보일 것이고 신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는 모든 것이 신화로 해석이 될 것이다. 이렇게 철로처럼 영원히 서로가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에 어중간한 타협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서>는 읽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역사, 신화, 문학, 문화 인류학(고고학)적 방법 등 여러 각도로 접근 가능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는 종교의 경전으로서, 다음으로는 신화로서 이해하는 태도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에드먼드 리치는 성서를 역사로서가 아니라 신화로서 취급하고 있다.

저자는 성서의 이야기들이 역사적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 인정하면 성서의 이야기들이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기 시작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성서에 쓰여 있는 이야기들을 역사라는 틀에 짜 맞추는 작업만 하지 않는다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성서의 이야기들도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중세의 기독교는 성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성서의 한 이야기를 성서의 다른 이야기와 연관 지어 이해했을 뿐, 성서의 연대기적 의문이나 사실주의적 기술과 관련지어 이해하고자 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이렇게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6개의 논문을 모아 편집한 저작이다. 표지에는 표기가 안 되어있는데, 사실 이 책은 엘런 에이콕과의 공저이다. 에이콕은 이 책에 두 개의 논문을 수록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 <멜기세덱과 황제>, <롯의 아내의 운명>, <카인의 징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롯의 아내의 운명>과 <카인의 징표> 가 에이콕의 논문이다. 6개의 논문 중 <카인의 징표>가 그나마 가장 흥미로웠는데 주된 내용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구조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에이콕은 예수와 카인이 서로 정확한 구조적 변형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주인공들로 밝혀진다고 주장한다. 변형의 관계라는 것은 예수와 카인이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카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사는 도시를 건설한다. 반면 예수는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교회의 기반을 구축한다. 죄 많은 카인은 아벨이라는 제물을 통해 하나님과 맺어진다. 반면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맺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유형화해서 보면 예수는 아벨의 등가물이 된다.

이처럼 신화적으로 해석되는 내용이 새롭거나 흥미로운 부분들이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초판 번역된 지 20여 년이 넘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이 책을 10여 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에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별 감흥이 없어서 뭐가 달라진 것인지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책은 신학적 방식이 아닌 신화적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고자 할 때 한 번쯤은 참고할 만한 저서이다.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으로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이 책의 주된 해석이라는 것들이 결국 현재의 결과를 바탕으로 과거를 재창출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기에 전체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가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설명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성서>는 이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해 답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성서>는 방대한 내용에 걸맞게 다양한 저자와 여러 겹으로 덧대어온 시간, 오랜 기간의 필사와 번역의 과정을 겪어왔다. 2500여 년의 역사를 관통해 온 인류의 유산이 21세기에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놀라운 책이다.

2500년 전의 지식과 문화와 멘탈리티로 기록된 지침서를 현대에 적용하고자 하면 반드시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마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오설, 문자 주의, 세대주의 등 텍스트 신봉자들이 정말 많이 득세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느 종교든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자들이 존재하기에 그렇게 놀란 척할 필요는 없겠지만, 굳이 새 술(현시대)을 헌 가죽 부대(전통교리)에 욱여넣는 게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입장에서 이러한 의문들이 별 의미는 없겠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면 특정 종교의 교리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에 모쪼록 반지성적이고 극단적인 세력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자정(自淨)효과가 압도하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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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전 설득 -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설득 프레임
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김경일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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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가 이 책에 낚인 걸까?
그건 아마도 로버트 치알디니의 전작인 <설득의 심리학>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목차를 한 번 훑어보자.
‘나에게 유리한 순간을 포착하라’, ‘어떻게 주의를 이끌어낼 것인가’, ‘설득의 지리학’, ‘최고의 결과를 내는 여섯 가지 변화의 길’, ‘설득의 효과를 지속하는 법’ 등 떡밥이 너무 자극적이라 덥석 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초전 설득 pre-suasion>은 persuasion(설득)의 앞부분 per를 모방하여 pre(전)와 suasion(설득)을 합성하여 저자가 만든 용어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무언가를 호소하기 직전에 우리가 선택하는 말과 행동이 설득의 성공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보다시피 제목 속에 내용이 모두 들어있는데 참고문헌 포함 454쪽이라는 분량으로 부풀릴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대단한 비밀을 말해 줄 듯이 우쭐거리지만, 오히려 전작에 훨씬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특징은 읽을수록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읽게 되는 이유는 첫 번째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다. 다음 페이지에는 뭔가 내 뒤통수를 내려칠 만큼 엄청난 게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하고 불확실한 희망 고문. 두 번째는, 매몰 비용의 함정 때문이다. 이왕 여기까지 읽었는데 지금까지 읽은 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꾸역꾸역 가보자. 읽을수록 기회비용이 날아가는데도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하고 늪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도움을 얻었을 수도 있고, 혹은 본전은 건졌다고 안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늦게 만났거나 아니면 조금 일찍 도착한 잘못된 만남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조금 일찍 온 것일까 아니면 너무 늦게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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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 1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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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는 것이 내게는 나 자신의 핵심적인 믿음에 대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시험과 같다. 문장이 사진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사진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현장의 모습뿐만 아니라 냄새와 소리까지도 전달할 수 있다는 희망.”(p434)

표지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사진이 인상적인 책이다. 책 표지로 사람의 얼굴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히친스의 저작이라면 춘화도(春花圖)가 그려져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집어들 것이다.

이 책은 세계 곳곳을 종횡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긴 그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선집 중 한 권이다.

히친스는 저널리스트로서 비상식과 불합리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웠던 사람이다. 그의 글은 날카로우면서도 수를 놓듯 씨줄과 날줄이 복잡하게 얽혀들 때가 많아서 집중하지 않으면 맥락을 놓치기 십상이다. 두 눈으로 꼭꼭 누르며 읽어 나가야 하므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 순간순간 이게 제대로 우리말로 옮겨 놓은 건지 번역을 의심하며 읽기도 했다.

신랄함, 풍자, 유머, 박식함 등이 적절히 배합된 문장들을 읽노라면 설득이 된다기보다 현혹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두려움 없이 거짓을 폭로하고, 불의를 비난하고, 위선을 까발린다.

히친스는 이상적인 저널리스트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으로서 나의 눈높이를 높여주었다. 이제 웬만한 저널리스트, 어지간한 문장으로는 만족을 못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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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14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