찡이나 나나 근면 성실했지만 그건 자랑도 자부도 되지 못했다. 기본 중의 기본일 뿐이었다. 주위 사람들도 다 시간을 쪼개고 욕망을 유보하며 살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왔는데도 서른살의 겨울을 생각하면 인생을 대충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라했다.(p.19, <에트르>)
10년이란 세월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긴 시간이지만 뒤돌아보면 몇개의 장면만 기억나는 꿈과 같았다. (p.119, <뒷모습의 발견>)
죽음이 자신과는 거리가 멀고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하는 일의 일부일 뿐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동갑인 고객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방문을 열고 어둠속에서 불을 켰을 때 죽음이 바로 거기, 좁고 네모난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술에 취한 미치광이들이 모는 차가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으며, 주머니 안에 칼을 숨긴 싸이코패스들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웃으며 걸어다닌 셈이라고 생각하니 몸이 떨렸다. 아슬아슬하게 죽음에서 비껴났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이고 운이 좋았다는 생각보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발끝에 따라붙어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바닥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잠이 들 것처럼 피곤한데도 지난밤처럼 달게 잘 수 없었다. 죽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아무데서나 잘 자던 삶은 완벽한 과거가 되어버렸다. (p.140, <이후의 삶>)
책을 보려면 가족들이 잠든 새벽에 식탁에 나와 미등을 켜야 했다. 똑똑해지고 싶어서도 반항의 의미도 아니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만 잘못 살아왔고 잘못 살고 있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책 속의 인물만이 현실의 나를 소리 없이 다독거렸다. 여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이게 나의 실패고 진짜 얼굴이야. 그런 대화를 나누는 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였다. (p.168, <변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