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하고 깔밋한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윤오영, 범우사)을 읽고

글에서도 맛이 난다면 나는 콩국수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담백하고 고소한 글, 양념이 들어가지 않아 짠맛 단맛 매운맛이 안나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구르는 면발과 시원하고 건강한 국물이 있는 글을 쓰길 바란다.

윤오영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 내가 좋아하는 콩국수 맛이 난다. 봄, 염소, 화장실, 달밤, 소녀처럼 그가 다루는 글감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소재다. 자극이나 쾌감을 부르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소박하고 깔끔하다. 윤오영 선생은 1907년에 태어나 주로 70년대에 수필을 썼는데 그의 글은 요즘 젊은이도 술술 읽을 수 있다. 낡거나 어색하지도 않다. 글에 담긴 그의 생각은 순박하지만 지성과 통찰이 은은히 흐른다.

중학생 때 윤오영 선생의 수필을 처음 읽었다. 국어교과서에 실린 `방망이 깎던 노인`은 남자중학생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별 감흥없이 숙지하고 줄을 치고 문제집을 풀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뒤 그의 `소녀`, `달밤`을 만나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읽고나서 가슴에 화살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소녀>는 길지 않으니 검색하여 한번 읽어보시길...)
윤오영은 `소녀`에서 색시꼴이 박히어가는 옷매무새, 곤때 묻은 분홍 적삼, 밖에서 수런수런하는 기색, 붉은 뺨으로 소녀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나타낸다.

나는 글을 읽으며 1920년 쯤으로 돌아가 중학생 윤오영이 된 것 같았다. 야릇하고 두근거렸다.

(<달밤>은 `소녀`보다 더 짧으니 검색하여 읽어보시길...)
`달밤`은 주제를 관철하거나 교훈을 설파하는 글이 아니다. 달이 몹시 밝은 밤의 짧은 순간을 그렸다. 별 이야기도 없는데 왜이리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지.

`닭국에 말은 밀국수다. 오이소박이와 호박눈썹나물이 놓여 있었다. 상차림은 간소하나 정결하고 깔밋했다.` (`소녀` 중에서)

소년 윤오영은 소녀가 가져다 준 점심을 먹고 그 음식 같은 글을 썼다. 나도 간소하고 정결하고 깔밋한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상을 차려내 남에게 대접한다면 며칠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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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들에 바치는 사랑고백
:『읽다』(김영하, 문학동네, 2015)를 읽고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 특히 나를 작가로 만든 문학작품들에 바치는 사랑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읽다』는 작가 김영하가 여섯 차례의 강연을 통해 푼 문학, 소설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그는 오래 살아남은 책, 흔히 고전이라 부르는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나간다.

김영하가 소개하는 서양소설들의 `제목만큼은` 익숙하다. 그는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왕』을 거론하며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과 투쟁하기 위한 독서를 말한다. 『돈 키호테』와 『마담 보바리』를 통해 우리를 `미치게` 하는 책에 대해 언급한다. 『롤리타』는 소설 읽는 행위가 끝없는 투쟁이라는 의견의 예시로 등장하며, 『죄와 벌』의 주인공은 `복잡하게 나쁜` 인물 유형으로 제시된다.

김영하가 풀어가는 이야기를 읽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고개 내미는 녀석은 이거다.
나는 여러 삶을 살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유한하고 허무한 생을 두고 탄식만 내뱉을 수는 없다. 소설로 다양한 인생을 겪고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란 내게 `구미호 꼬리`다.

『읽다』에서 기억에 남는 대목 몇 부분을 옮긴다.

-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p66, 67)

-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9)

- ˝소설을 읽는 행위가 끝없는 투쟁˝ (p134)

- ˝스스로를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혹시 자기 안에도 이런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p173)

-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이 광대한 책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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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Kingsman: The Secret Service』

영어 만화책을 읽었다.
영어를 주제 삼아 파고 든 교육만화가 아니라 대사, 배경글을 영어로 쓴 영미제 그래픽노블이었다. 바로 『Kingsman: The Secret Service』(글 Mark Millar / 그림 Dave Gibbons, Marvel Comics), 올해 초 한국에도 개봉한 영화『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감독 매튜 본)의 원작.

영어 말하기 시험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읽었다.
사놓은 오픽 교재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어문장 몇 줄 더 읽는다고 말하기 실력이 늘 리 없지만 시험을 앞두고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었다. 뭐라도 시도하고 싶었다. 그게 회사비용으로 치르는 시험을 앞두고 내가 갖출 수 있는 예의였다.

지난 여름휴가 때 본 영화 『킹스맨』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플롯은 식상하기 그지없었다.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이 조력자의 도움으로 기회를 얻고 고난을 헤쳐 나가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매너가(철컥) 사람을(철컥) 만든다(철컥)`는 명대사로 시작하는 액션장면, 주류를 조롱하는 감독의 센스, 폭력이 잔인하게 난무하는 장면에 깔리는 경쾌한 음악,
`s`를 `th`로 발음하는 악당대장(새뮤얼 잭슨) 같이 독특한 매력요소들이 주된 음식보다 맛있는 토핑이 되어 영화에 듬뿍 끼얹져 있었다.

그래픽노블도 큰 틀은 영화와 비슷했는데 영화화 과정에서 각색된 점이 있었다.
철제의족으로 상대방을 갈라버리는 여자 가젤이 원작에서는 남자였다. 영화제작진은 가젤 역으로 남아공의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를 섭외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여친 살해혐의로 구속되어 계획이 어그러졌다.
악당대장도 젊고 훤칠한 백인에서 스냅백 쓴 늙은 흑인으로 바뀌었다.

내 영어실력이 짧아서 킹스맨에 나오는 문장과 단어 모두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일이 사전을 찾다가는 힘 빠지고 지겨워질 것 같아 무시하고 그냥 넘어갔다. 영어원서를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는데 그래픽노블은 문자텍스트량이 적어서 부담이 덜했다.

오픽 시험장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킹스맨을 다 읽었다. 시험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녹음상태 점검을 위해 샘플답변을 녹음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래픽노블에서 본 대사를 써먹어보았다.

˝I`m f**king bloody Duri Lee.˝

유용한 표현은 하나도 기억 안났다. 욕과 性스러운 속어만 밝은 별이 되어 머릿속에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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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동료들과 함께 <징비록> (류성룡 씀, 홍익출판사)을 읽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조선이야말로 진정한 헬조선이었다. 이순신 장군 나오는 대목 없었으면 답답하고 화 나서 읽다가 암 걸렸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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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춘이자 한 시대의 일지를 기록하고 싶었다. 한 인간이자 한 세계의 모형을 창조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

손아람 작가가 쓴 장편소설 <<디 마이너스>>를 읽었다. 10년 전, 대학교 다닐 때가 기억났다. 나도 참 별난 놈이었다.

전학협 계열의 메이데이 실천단에 참가하고
(전학협 해산 뒤 결성된 `노동해방****`라는 단위였다.),

yd 따라서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하고,

열사추모제 때 개량한복 입고 갔더니 nl 선배한테서 `민족의 기풍이 느껴진다`고 박수 받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뛴 총학선거 선본에서 법대 단책 맡았는데 개표날 법대에서 우리 쪽이 300표차로 지고(좌절한 나에게 정책국장 후배가 다가와 위로했다. 법대에서 얻은 표들 형이 만든 거예요 라고.)
......

<<디 마이너스>>는 어쩌면 내 이야기다. 또한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다. 소설 속 인물들과 나는 교묘하게 닮았으면서도 판이하다. 지금은 상여금이나 성과급 안 나온다는 소리에 벌벌 떨고 눈물짓는 회사원일 뿐이지만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뜨겁고, 덤빌 줄도 알았던. 흥얼거렸던 노랫말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나의 삶은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한가. 오늘밤 퇴근길 거리에서 되돌아본다. ... 나의 삶은 부끄럽지 않은지.`(꽃다지,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얼마 전, <<디 마이너스>>에 앞서 손 작가가 쓴 소설 <<소수의견>>도 읽었다. 법 조문과 사법제도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직조한 작가의 솜씨가 놀라웠다. 그때 얻은 두근거림 덕에 대학시절 손놓고 보내버린 형사소송법을 잠깐 다시 공부하기도 했다. 이제 손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었다는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를 읽고 싶다. 그가 힙합가수 활동을 하며 겪은 일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나는 힙합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쇼 미 더 머니`를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진말페>>를 읽은 뒤에는 왠지 음원앱에서 힙합가수 이름을 검색할 것 같다. 작가가 어쩌면 지금 쓰고 있을 새로운 작품도 기대된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한국소설가가 생겼다.

˝세상은 꾸준히 나빠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좋았던 시절만을 회상하고 있다.˝(<<디 마이너스>> p260)

˝세상은 그렇게 쉽게 멸망하진 않는다. 미래의 몫으로 더 나빠질 여지를 언제나 남겨둔다.˝ (p507)

˝좌파는 세상 많은 것을 의심하지만, 수리처럼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까지는 의심하지 않는다. 수리는 여느 좌파와는 완전히 달랐다.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하여 그 누구보다도 좌파 성향이었다. 수리는 말이 아닌 길로써 가치를 증명했다. 그것이 바로 좌파 이론을 단 한마디로 압축한 핵심이며, 대부분의 좌파가 달성에 실패하는 과업이다.˝ (p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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