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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천천한 시선으로 발 밑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걸음이 느껴지는 책, <다정한 매일매일>. 단어 하나 하나마저 고심해 고르고도 모자라 다듬고 또 다듬었을 것 같은, 그런 정성담긴 언어들이 담뿍 담긴 책이라 읽는 내내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것 같다. 주로 내가 책을 읽는 아주 깊은 밤은 얼마간은 졸음을 쫓느라 괴롭고 또 얼마간은 독서의 즐거움으로 행복한 양가적인 감정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는 동안은 괴로움과 분투의 의미는 잠깐 내려놓았던 것 같다. 어쩜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예쁘고 다정한 결을 유지할 수가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가지 괴로웠던 것은 사고 싶은 책과 먹고 싶은 빵이 너무나 많아졌다는 점이다! 아, 이렇게 다정한 소비요정이라니!
빵과 책처럼 매일매일 다정해지기를 <다정한 매일매일>
이 책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신문사에 연재한 글을 수정 보완하고 새롭게 쓴 글들을 더한 것이라고 한다. 빵과 책을 매개로 써낸 글들을 대하니 갓 구워낸 향긋한 빵 한덩이처럼 따스한 다정함이 내 마음에도 스민다. 따뜻한 차 한잔이라도 곁들이면 그 순간 모자란 게 없을 정도로 세상을 대하는 내 마음도 다정해진다. 이 책이 가진 다섯 개의 부 중에서 나는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편의 문장들이 가장 좋았다.
델리만쥬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언제고 다시 이 순간으로 P.128
'시간이 과거를 망각의 어둠 속으로 침몰시키더라도 감각의 형태로 각인된 기억들은 살아남아, 현재의 우리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였다. 어둠에 매혹된 사람처럼, 망각된 과거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는 기 롤랑이 조금씩이라도 존재로서의 두께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빈곤한 증거들이나 불확실한 타인의 말들 때문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수 냄새가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 같은 것들이 순간적으로 타올랐다 꺼져버리는 조명탄처럼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들을 잠시 비추기 때문이다. <다정한 매일매일> P.129'
<다정한 매일매일>의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특히나 이 대목이 너무 좋았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을만큼(사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했지만) 너무도 좋았다. 시간은 쏘아버린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좋은 시절일수록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일단 과거가 되어버리고나면 좋은 시절이었는지조차도 기억해내기가 어렵다. 어쩌다 풍겨오는 향수 냄새,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 같은 것들로 저장된 기억들은 <다정한 매일매일>의 문장대로 조명탄처럼 내 기억 속 어느 깊고 깊은 서랍 속을 비춰주는 것 같다.
슈크림빵 -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
밤이 깊어도 걸어갈 수 있다면 p.90
어떤 단어로도 포착할 수 없으나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송두리째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기까지 하는데도 타인에게는 결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감정에 대해서. 그런 감정은 밤의 들판에 버려진 아이처럼 인간을 서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밤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소설들이 있는 한, 우리는 밤이 아무리 깊어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다정한 매일매일> P.94
좋은 시절은 지나고나니 그 때가 언제였는지조차 잘 기억해낼 수가 없고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항상 제자리걸음인 것 같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잊지 말고 이 책을 꺼내들어야겠다. <다정한 매일매일>과 따뜻한 차 한잔, 좋아하는 빵을 곁들인다면 더 좋겠다. 익숙하고 정겨운 곳을 산책하듯 다정한 문장들을 한 줄 두 줄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느 새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돈되는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기, 매일매일 조금씩 다정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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