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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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게 삶으로 062 쪽종이에 쓰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권진옥

한문화

2000.6.20.



다섯 해 앞서 2018년에 어느 도서관에 가서 글쓰기 강좌를 두 달 들은 적이 있다. 두 달이 다 지날 무렵에 책나눔을 하였다. 이때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챙겨 온 분이 있었고, 내가 이 책을 받았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십 분 동안 멈추지 말고 그대로 쓰라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 어느 시쓰기 강좌를 가 보았는데, 그곳에서는 ‘무의식 글쓰기’를 한다. 종이를 나누어 주고서 십 분이나 십오 분 동안 글을 쓰라고 한다. 멈추지 말고 그대로 쓰라고 한다. 쓴 글을 되읽지 말고 지우지도 말라고 한다. 그저 쭉쭉 쓰라고 한다.


시쓰기 강좌에서 딱 한 번 십 분 글쓰기를 했다. 딱 하루를 써 보았지만 나로서는 버거웠다. 요즘은 글을 종이에 쓰지 않고 글판을 두드려서 쓰는데, 종이에 무얼 쓰자니 어려웠다. 머리가 지끈거려 그저 눈을 감은 채 시간만 보내었다.


사전을 쓰는 이웃님 한 분이 대구에 올 일이 있다고 해서 만나서 글쓰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분은 십 분도 십오 분도 아닌, 오 분만 쓰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손바닥만 한 조그마한 종이에 열 줄이 안 넘도록 슥슥 써 보면 된다고 하더라. 글이름, 오늘 날짜, 내 이름, 이렇게 세 가지만 적고서 종이를 비워도 된다고 한다.


나는 석 줄쯤 쓰다가 멈추었다. 그냥 지레 두려웠다. 글씨도 구불구불 힘이 없고 알맹이가 없는 글만 끄적인 듯했다. 그런데 알맹이가 있건 없건 몇 줄을 적어 놓으면 나중에 밑감 노릇을 한다고 한다. 그자리에서 바로 살을 보태어 글 한 자락을 새로 내놓아 주었다.


이튿날 작은 종이를 샀다. 처음 산 종이는 너무 작았다. 다시 종이를 사러 갔지만, 손바닥만 한 종이를 못 찾았다. 줄이 있는 쪽종이를 사 보았다. 종이 크기를 자로 재서 인터넷으로 켄트지를 샀다. 그런데 막상 켄트지를 잘라서 손으로 글을 적어 보자니 종이가 아까워 보이더라.


안 되겠구나 싶어서 미리 다른 종이에 써 보기로 한다. 줄이 있는 쪽종이를 하나씩 뜯었다. 글이름부터 적고, 시계로 오 분이 지나면 알리도록 맞추고서 적어 보았다. 시도 아닌 듯하고, 글도 아닌 듯한, 그냥 끄적인 셈일 텐데, 이레가 지나자 서른여섯 꼭지가 모였다.


종이에 적은 글을 따로 셈틀로 옮긴다. 서른여섯 꼭지를 손으로 먼저 쓰고서 옮기고 보니, 앞으로 몇 백 꼭지도 글이름부터 적어 놓고서 술술 쓸 수 있을 듯하다. 처음부터 빈틈없이 잘 짜서 쓰려고 하면 오히려 글쓰기가 어렵겠구나 싶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보면,  “나는 이야기 바깥에 있었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야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 경험하지 않는 일은 절대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에 당신만의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확인하고,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글은 당신이 그 글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런 말 한 마디를 되새기면서 배운다. 둘레에 퍼진 말이라든지, 이미 쏟아져나온 말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숨결이 들어가는 글을 쓰는 길을 생각한다.


바쁜 하루이니까 바쁜 틈을 내어서 조금씩 쓰자. 할 일이 많은 삶인까, 갖은 일을 하는 틈틈이 쪽종이에 조금씩 써서 모아 보자. 샘물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꾸준하게 솟아나서 흐른다. 글도 샘물처럼 한결같이 조금씩 이어가면 되리라.


2023.12.18.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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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나막신 우리문고 1
권정생 지음 / 우리교육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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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61 너도 나도 가엾은


《슬픈 나막신》

권정생

우리교육

2002.8.10.



방천시장에 있는 책방에 갔다. 책방에서 아기가 잔다. 책방지기도 소곤소곤 우리도 소곤소곤. 책방 어귀에 있는 종소리가 더 크다. 책방지기는 혼자 아기를 키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가 신발이 너무 작아 만지작거리다가 책을 훑는다. 다시 신발을 보니 궁금하던 일이 확 풀렸다. 가족사진이 있다. 카프카를 좋아해서 책 언저리에 비슷한 모습을 보고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책방에서 엉뚱한 구경을 하다가 《슬픈 나막신》을 본다.


큰딸이 어릴 적에 권정생 님이 쓴 ‘몽실 언니’하고 ‘강아지똥’하고 ‘검정고무신’을 곁에 두고 읽었다. 권정생 님은 내가 살던 안동에서 가까운 일직에 살았다. 언젠가는 권정생 님이 쓴 ‘엄마 까투리’를 애니메이션으로 담아서 프랑스로 판다는 말이 오갔다.


《슬픈 나막신》을 읽는다. 권정생 님이 태어난 일본에서 어울린 아이들 이야기가 흐른다. “어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집을 부숴 버리고 죽이려 대들고 그러나 어른들이 있어야만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바르게 착하게 자라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은 마음대로 삐뚤어진 것을 하고 있다.”라든지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은 왜 다른가? 조선 땅이란 어디 있으며 누가 빼앗아 가지고 있는 걸까? 모두가 똑같은 얼굴 눈 코 입이 있고 팔다리가 붙었고 노래도 부르고 웃으며 사는데 어째서 서로 빼앗고 빼앗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글자락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다. 권정생 님 목소리로 그대로 들린다. 


언젠가 권정생 님이 사는 마을에서 일을 했다. 종지기로 일하던 교회에 틈틈이 가 보았고, 권정생 님이 사는 집에도 몇 걸음 갔다. 밭자락 끝 폭 꺼진 자리에, 마을에서도 한쪽 끝에 집이 있다. 창살문에는 ‘권정생’이란 이름을 달아 놓았다. 찢어진 문구멍으로 안을 보니 방이 참 작았다. 책에 나오는 강아지 집터가 뒷간 앞에 그대로 있고, 시내가 흐르는 길 쪽에는 키가 큰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빨랫줄인지 전깃줄인지 마당을 지난다.


처음 이 방을 보던 날은 이렇게 단촐하게 사는 어른이 우러러보였다. 여느 할아버지처럼 생겼는데,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이 방에서 썼구나 싶어 놀랐다. 한 사람이 눕기도 작은 방이다. 집도 마당도 작고 모두가 작았다.


살림처럼 작은 이야기를 꾸미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적은 글이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흐른다. 나누는 말에도 글에도 할아버지 마음이 곳곳에 묻어난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고스란히 따뜻하게 담겼다. 


“조선 사람이 가엾다, 일본 사람이 가엾다” 하고 나란히 읊는다. 이 힘들고 고단하던 나날을 건너온 일본 아이들도 조선 아이들도 같은 마음인지 모른다. 일본이라고 하면 덥석 나쁘게 여기기만 하느라, 일본을 바탕으로 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손가락질도 할 테지만, 일본이든 조선이든 어디에서나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를 보는 어버이와 어른 눈은 똑같은 마음이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가난한 살림에 두 나라는 총칼로 싸움을 벌였다. 왜 그래야 했을까. 누가 총칼을 만들어서 앞세웠을까. 고단한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잔잔한 얘기로 그때 그 삶을 훤히 본다.



2023.12.11.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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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길벗어린이 문학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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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게 삶으로 060 보리 한 톨과 글 한 줌



《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1997.1.30.



내가 어릴 적에 내 손은 책보다 흙을 더 만졌다. 공기놀이, 제기차기, 땅따먹기, 그림 그리기를 마당이나 흙길에서 했다. 경북 의성 멧골자락 시골집인데, 예전에 이런 시골에서 집안에 책을 쌓아놓고 볼 어버이가 있었을까. 우리 어버이조차 흙을 일구는 삶이었고, 우리는 책을 읽고 싶을 나이에 책은 우리한테 너무 멀리 있었다.


《작은 책방》을 쓴 엘리너 파전 님은 “책 없이 사는 것보다 옷 없이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던 시절”을 보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어쩐지 이 책을 쓴 분이 부럽다. 글님은 어린날 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달콤했을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살았기에, 또 우리 어버이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버이도 거의 배우지 못 한 삶을 보내셔서, 이래저래 책하고는 담을 쌓으며 자랐다. 여태 못 읽은 책에, 새로 나온 책에, 온통 못 본 책뿐이다.


우리 아들은 한때 책에 파묻혀 보낸 나날이 조금 있었다. 쭉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책을 만지고 밟을 만큼 책을 쌓아놓았다. 책하고 가깝게 지내라고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고, 이웃집에서 빌리기도 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책을 보는 아들을 보면 그저 배가 불렀다. 내가 하지 못 한 일을 아이가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아이가 해주는 듯했다. 나중에 집을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난 뒤에는, 마루를 통째로 책방처럼 꾸렸다. 다만, 셋째인 아들에 앞서 첫째랑 둘째 아이를 돌볼 적에는 그만 두 아이한테 책을 읽히는 버릇을 들일 때를 놓쳤다. 셋째하고 나만 책방을 누리는 셈이다. 


세 아이는 다 자라서 저마다 이 집을 떠났다. 이제 나는 ‘내 작은 책방’을 호젓이 누린다. 《작은 책방》을 천천히 읽었다. 글님은 온갖 책을 골고루 책을 읽으며 살아온 티가 물씬 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여태 ‘작가 흉내’를 내려고 했구나 싶어 부끄럽다. 엘리너 파전 님이 쓴 글에는 내가 뛰어놀던 시골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잘 녹아든다. 이 책만 읽어도 골짜기와 바람과 풀꽃나무가 자라는 들숲이 흐르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흐른다. 숨결이 살아나는 글이란 이런 책을 놓고 말하는구나 싶더라. 글줄마다 노래처럼 싱그럽고 매끄럽고 촉촉하다. 아! 나는 여태까지 참으로 메마른 글만 읽었구나. 왜 진작 이런 글과 책을 읽을 생각을 못 했을까?


두 대목을 손꼽아 보고 싶다. 〈보리와 임금님〉 꼭지에서는, 임금님이 아버지 보리밭을 불태우고 마는 바람에 살아갈 일이 아득하지만, 손바닥에 붙은 이삭 몇 알을 밭 한가운데 심으면서 따뜻하게 품고 앞날을 그리는 보리 낱말 이야기가 뭉클했다. 


또 하나는 〈일곱째 공주님〉 꼭지가 좋았다. 성 밖을 나가서 춤도 추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고 날마다 지붕에 올라가 날이 저물 때까지 동쪽 푸른 풀밭과 남쪽 잔잔한 강, 서쪽 언덕과 북쪽 시장을 내려다보았다지. 임금님은 일곱 공주 가운데 머리칼이 가장 긴 공주를 여왕으로 삼겠다고 하자, 여섯 공주가 머리 손질에 마음을 쓰는 동안 왕비는 일곱째 공주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강으로 언덕으로 풀밭으로 시장으로 다니라고 했다. 왕비가 하고 싶던 대로 공주를 키운 대목이 마음에 든다. 글님이 어릴 적에 몸이 아파서 그만 집에 오래오래 머물러야 하던 즈음 마음껏 읽었다고 하는 책은, 바로 글님 스스로 여린 몸이 튼튼하게 살아나서 신나게 들판을 달리고 싶은, 그야말로 숲빛으로 빛나는 꿈이었구나 싶다.


풀꽃나무와 비바람과 해달별이 감도는 이 책은 한글판이 나온 지 서른 해가 지나도 빛난다. 그러고 보니, 1997년에는 《작은 책방》으로 나왔지만, 1970년대에는 《보리와 임금님》이란 이름으로 이미 나와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 어릴 적에는 《보리와 임금님》을 못 보았지만, 2023년이 저물려는 이맘때에 《작은 책방》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을 읽는다. 2024년 새해를 앞두고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롭게 옮긴 판이 나왔는데, ‘보리와 임금님’을 ‘왕과 보리밭’으로 바꾸어서 아쉽다. ‘보리’가 ‘임금’보다 아름답지 않을까?


글이 늙지 않는 까닭은 숨결이 싱그럽게 흐르기 때문인지 모른다. 요즘 나오는 동화책을 보면, 숲이 사라지고 잿빛으로 커다란 도시 얘기가 아주 많다.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억지스럽게 꾸미는 동화가 많다. 자꾸 싸움을 부추기거나, 서로서로 겨루거나 다투면서 피를 흘리고 괴롭히는 재미로 쓴 동화가 너무 많이 보인다. 시인들은 일부로 삶(서정)을 지워 버리는 글을 쓴다. 숲을 밀어서 집을 짓고 길을 닦고 흙마저 보기 힘느는 판인데, 이제는 시도 동화도 모든 글도 숲이 사라져간다. 앞으로 우리 아이뿐 아니라, 새로 태어날 아이들은 숲을 어떻게 떠올릴까.


《작은 책방》은 참으로 훌륭하다. 겉치레라고는 찾을 수 없다. 억지스런 말조차 없다. 엘리너 파전 님은 “어린이가 어떤 어조에 반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린이한테 맞추어 쉽게 쓰겠다는 생각 버리고, 어린이 수준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어린이가 모른다고 생각되는 언어와 사건을 쓰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눈을 감아 본다. 나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내가 어린 날을 떠올려 본다. 우리 아이들 어린 날을 떠올린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는지 실마리를 푼다. 《작은 책방》은 옮긴 말씨도 한몫 부드러이 거든다. 글과 말빛을 살리며 밑바탕에 깔린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이 건네주는 책은 뭔가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별 이야기가 가득하다.


2023.12.06.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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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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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9 돈과 바꾼 목숨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1.11.10.



집에 있는 어느 책을 찾다가 못 찾았다. 이것저것 집다가 몇 줄 읽고 덮다가 문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펼친다. 짧게 쓴 글을 모으면서 첫 글로 책이름을 땄다. 몇 쪽 읽을 즈음 짝한테서 전화가 온다. 운동을 한다며 나갔는데 갑자기 가슴 쪽이 아파서 꼼짝을 못 한단다. 책은 얼른 덮고서 바삐 태우러 간다. 언덕에서 짝을 태워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다. 가슴이 아픈 사람이 말을 너무나 씩씩하게 하더라. 게다가 아침에 무를 깎다가 엄지손가락을 베어 피가 조금 났다. 다친 손이라고 그런지 모르지만, 아침에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서 “내가 이따 와서 쓰레기 버릴게.” 하고 말하고 간 사람인데, 병원에서 하루를 묵을 줄 몰랐다. 병실이 없다기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피를 묽게 하더라. 병원에 온 지 열두 시간이 지나고서야 들여다본다. 날핏줄(동맥)로 무얼 넣어서 핏줄을 뚫고 넓힌다더라. 짝은 미리 몸을 풀지 않고서 갑자기 운동을 거세게 하느라 핏줄이 막혔단다. 큰일이 날 뻔했다.


하루를 가라앉히고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마저 읽는다. 그러나 왜 새가 페루에서 죽는지는 안 나온다. ‘새 노릇’이 끝나면 오는 곳이라는데, 새가 태어나서 맡은 일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먼 곳까지 가서야 죽는다는 소리일까. 궁금하지만 풀지 못 했다.


짧막한 글에 전쟁 이야기가 슬쩍 나온다. 페루란 나라가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마추픽추와 잉카제국이 사라진 자국이 있는 곳이다. 한때 빛나면서 잘살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슬처럼 사라진 나라와 사람들 발자취를 새처럼, 새가 죽었다고 빗대는 말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끼듯 풀어낸 글인가.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헷갈리고 어지러웠다. 옮김말 탓일까. 영생, 고독, 위험, 희망, 과학, 욕구, 안색, 영혼, 시적, 몽상적, 사랑, 유혹, 물욕, 아름답다, 슬픔, 집요, 존재, 흡족, 퇴페적, 전쟁, 희극적, 냉소적, 운명, 환상, 지옥, 저주, 조롱, 원한, 세계 같은 말이 뒤죽박죽 흩어지는데, 어떤 삶과 끝을 말하려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머리에 아무 그림이 안 나왔다. 


내가 우리말을 모르는지, 우리말이란 워낙 이러한지 모르겠다. 이 낱말 저 낱말 자꾸 쪼개고 또 쪼개어 놓으면, 줄거리도 모르겠고 이야기도 갈피를 못 잡겠다. 그렇지만 나도 한때 이렇게 낱말을 쪼개고 늘어놓고 흩뜨리는 글을 시랍시고 곧잘 썼다.


이제 숨을 돌리고 잘 자는 짝을 들여다보다가, 덮은 책을 다시 들추다가, 글에 왜 한자말을 자꾸 넣는지 헤아려 본다. 한자말을 안 쓸 수 없겠지만, 구태여 끼워넣는 한자말이 많지 않을까. 더 쉽게 우리말로 쓰기만 해도 잔잔하게 마음을 달래고 밝힌다고 본다. 


옮김말을 다시 찬찬히 본다. 꾸미는 말이 많다. 글이 무겁고 겹말이 많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여섯 가지에 맞추어 쓰라는 얼거리를 되돌아본다. 속뜻을 살리려는 길에서 먼, 꾸미는 치레가 없어야 이야기가 환하다는 얼거리도 되새긴다.


새는 사람처럼, 오늘 우리 짝처럼 갑자기 가슴이 아프지는 않을까.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다른 큰짐승한테 먹이감이 되어 주는가.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새로서는, 죽음자리를 앞으로 다시 태어날 자리로 삼는가.


짝이 누운 병원에는 몸이 늙고 잘 걷지도 못하고 마음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거쳐 가는 곳 같다. 가래가 끓는 소리가 넘친다. 목구멍에 줄을 길게 서넛 달고서 통에 담긴 바람으로 숨을 겨우 쉬는 사람을 본다. 드러누워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에, 이곳저곳 아파서 쫓아오는 마지막 자리로 가는 길에 선 사람을 본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땀흘려 그러모은 돈을 병원에 몽땅 바치고서 빈털터리로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새는 페루에 가서 죽는다면, 사람은 병원에 가서 돈을 다 쏟아붓고서 죽는 듯하다. 새는 새몸으로 가려고 페루로 간다면, 사람은 돈하고 목숨줄을 바꾸면서 겨우겨우 버티는지 모른다. 이제 그만 읽자. 책을 덮는다.


2023.11.0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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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니스의 황금새 1 - 시프트코믹스
하타 카즈키 지음 / YNK MEDIA(만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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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8 글을 쓰는 여자



《카이니스의 황금새 1》

하타 카즈키 지음

정혜영 옮김

YNK MEDIA

2020.10.10.



만화책 《카이니스의 황금새 1》를 읽었다. 예전 영국에서 소설을 쓰는 여자를 다룬다. 주인공 리아가 앨렌으로 꾸민다. 여자라는 몸을 남자처럼 바꾼다. ‘여자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여길 뿐 아니라, ‘여자 주제에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얕보던 무렵이라, ‘여자인 리아로 쓴 소설’이지만 ‘남자처럼 꾸민 앨런이 쓴 글’이라고 숨겨서 내놓는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꿈을 키우고 싶은 리아는 시골을 떠나서 런던으로 가려고 한다. 소설이든 글이든 누구나 쓸 수 있고, 그야말로 누구나 배우며 꿈을 펼 수 있는데, 성별로 가르고 따돌리는 굴레가 너무 단단하기에 남자처럼 꾸미기로 한다.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앞가슴을 가리고, 바지를 입는다. 나중에 소설이 널리 읽히면 그때에 비로소 ‘나는 여자이지만, 이렇게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하고 밝히자고 생각한다.


그제 짝하고 주고받은 말을 떠올린다. 밥을 먹던 짝은 “내가 먼저 죽으면 시골 물려받은 땅 팔지 말고 아들한테 그대로 물려줘라” 하고 말하더라.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래 살 거예요. 운동도 그렇게 부지런히 하잖아요. 나는 머리가 자주 아프니 언제 불이 꺼질지 몰라. 내가 먼저 갈 테니 걱장 마소.” 하고 대꾸했다. 그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짝답지 않아 보이더라.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류씨 집안’이 아니지만, 왜 내가 아닌 셋째 아이인 아들한테 시골땅을 물려주려고 하는지 섭섭했다. 첫째하고 둘째는 딸인데, 왜 첫째하고 둘째 몫은 생각을 안 하는지 서운했다.


친정에서는 딸이 나 혼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적에 마당 담벼락 한 평짜리 땅이라도 받고 싶었다. 나도 아버지 딸인데, 나만 없는 사람 같더라. 그렇지만 엄마는 딸인 내 몫은 없고 아들 넷 몫으로 나누어 놓았더라. 나는 엄마한테 한 평도 못 주냐고 말을 못 했지만 속으로 섭섭했다. 고작 한 평을 받아서 어디 쓰겠냐마는, 고작 한 평을 받더라도 우리 시골집을 통째로 받은 오빠한테 바로 돌려줄 마음이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시골땅을 어떻게 나누려는 마음인지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짝이 ‘류씨 집안 시골땅’을 막내인 아들한테만 물려주려는 줄 우리 두 딸이 안다면, 이다음에 섭섭하게 생각할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는걸.


아직도 남녀 차별은 구석구석 밑바탕에 깔렸다고 여긴다. 반쪽씩 만나 오롯이 하나를 이루며 집안을 꾸리고 마을이 되고 나라가 되는 동안, 힘과 돈과 이름은 모두 남자 쪽이 쥔다. 맞벌이를 하면 여자는 밥줄을 걱정하느라 풀이 죽는다. 더러는 남자를 뛰어넘지만, 어떤 자리이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남자가 집과 땅과 돈(재산)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집집마다 딱 굳혀 놓았는지 모른다. 내가 자랄 적에도 우리 엄마아빠는 외동딸인 나는 학교에 안 보내려고 했다. 공부를 안 하겠다는 오빠는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우리 엄마도 여자이면서 여자인 나를 꾹 눌렸다. 여자는 여자한테 스스로 물러났다. 나도 여자이면서 어머니이면서 남자를 치켜세운다. 남자인 짝꿍은 물려줄 돈(재산)은 고스란히 아들 몫으로만 챙긴다. 우리가 물려줄 돈이 얼마나 있으랴마는, 우리가 물려받을 어르신 시골땅은 그대로 아들 쪽으로만 물려주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카이니스의 황금새 1》를 곰곰이 돌아본다. 소설 하나를 쓰는 일에서도 성별을 놓고 따돌리니까, 만화에 나오는 사람은 여자인 몸을 감춘다. 남자로 겉모습을 바꾼다. 나는 ‘숲하루’라는 글이름을 쓴다. 둘레에는 나처럼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렷이 드러나도록 물려받은’ 이름을 안 쓰는 분이 많다. 요즘은 글쓴이 이름만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어렵다.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이고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인 시인을 많이 봤다. 이들도 어쩌면 《카이니스의 황금새 1》에 나오는 사람 같은 마음이 아닐까. 


글을 쓰는 자리를 생각해 본다. 나는 예전에는 밤늦게 글을 쓰다가, 요즘은 일을 마치고 와서 이른저녁쯤에 쓴다. 나는 머리카락을 짧게 치면서 남자 옷을 바꾸어 입지 않으면서 나답게 가고 싶다. 요즘 둘레를 보면, 옷은 뒷배 같다.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도 하고, 글쓰기보다 문단권력 같은 힘에 따라서 책이 뜨는 듯싶고, 책방에서도 이런 문단권력을 덩달아 띄운다고 느낀다. 나는 느리지만 내 모습 그대로 글을 쓰고 싶다.


2023.11.11.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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