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유교수의 생활 5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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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6 입만 아팠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5》

아마시타 카즈미

소년 매거진 찬스 옮김

학산문화사

1997.3.15.



《천재 유 교수의 생활 5》을 새해 첫날에 펼쳤다가 덮고서 다시 펼친다. 유교수는 딱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늘 마음을 열고서 생각을 펼친다. 스스로 곰곰 생각하고 스스로 눈을 뜨고 알아가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대단한 끌린다. 가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답답할 때 이 책을 펼쳐놓는다. 유교수라면 내가 부딪히는 일을 어떻게 맞설까 하는 생각으로 바라본다.


유교수는 뉴스를 보다가 아나운서가 한 말을 따진다. 시나 삶글이라면, 주어를 바로 쓰면 꼬이지 않는다. 신문글은 주어를 흐리거나 조사를 빼서 큰 글씨로 눈에 띄게 올린다. 궁금해서 눌러 보도록 하는 미끼나 덫인 셈이다. 엉터리로 올리고 뼈대로 제목에 쓴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칸을 가득 채우는데 알맹이는 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여섯을 가장 잘 드러내야 할 신문이 아닌가 싶다. 나도 고쳐야 하고.  


딸아이 남자친구는 말도 불쑥불쑥 뱉고, 사내여도 머리를 기르고(요새는 사내도 누구나 머리를 기른다지만, 이 만화책이 나오던 때를 생각하면 보기 드문), 코걸이 귀걸이를 하고, 튀는 옷을 입지만, 유교수는 막내딸 남자친구를 겉모습으로 가누지 않는다.


막내딸 남자친구는, 이이가 사랑하는 아가씨네 아버지인 유교수가 걸림돌인 줄 알았는데, 막상 유교수네 집까지 찾아가서 마주하는 동안, 걸림돌은 유교수가 아닐 수 있다고 느낀다. 가만히 보면, 유교수 걸음걸이를 네 딸이 고스란히 따라한다. 걸음걸이뿐 아니라 마음도 매무새도 똑 닮았다. 반듯하게 걷고 깊이 생각하는 아버지처럼, 네 딸이 반듯하게 걷고 깊이 생각한다.


어느 날 유교수는 고양이한테 전갱이를 건네면서 뼈를 발라 주는데, 유교수 짝꿍은 ‘고양이한테 전갱이구이를 그대로 주면 소금을 많이 먹어서 죽는다’고 나무란다. 유교수는 이 말을 처음 듣는다. 여태껏 모르던 일을 처음 마주하는 유교수는 걱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전쟁이를 삶아서 소금을 빼내면 되겠거니 여기고, 한참 품을 들여서 고양이한테 전갱이구이를 전갱이삶이로 바꾸어서 내준다.


늘 같은 시간에 담 너머로 지나가는 유교수를 보는 마을 할머니가 있단다. 이 할머니는 창밖으로 보이는 그림에 함께 들어가고 싶다. 집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와 보는데, 유교수하고 문득 말 한 마디를 섞고 나서 할머니네 집을 다시 바라볼 적에 이 집도 참 좋은 줄 비로소 알아차린다. 유교수는 유교수대로 마을 할머니 한 분을 알아보고 말을 섞은 뒤로는, 이 집 앞을 지날 적에 단출히 마주하고서 지나간다. 할머니는 유교수하고 이런 토막틈을 나눌 수 있는 삶이 기쁘다.


학교에서 학생이 가장 많이 듣는 교수가 강의하는데 한 학생이 재미없다고 말했다고 달뜬 말투로 털어놓았다. 유교수는 “적어도 그 학생만은 수업을 들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째서 그 학생에게 화를 낼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학생은 훌륭한 연구자료’라고 말한다. 그날 그 교수는 처음으로 한 학생을 새롭게 알아보았다. 


유교수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한결같이 사람 사이를 ‘경제’로 생각한다. 유교수는 경제학과 교수이다. 어떤 길이 살림 밑천이 되고 나아지는 길인지 술술 풀어 간다. 이제 만화책을 덮는다. 뭔가 북받쳐서 어느 곳에 전화를 한다. 우리한테 돌려줄 돈이 있는데 마흔 날이 지나도록 감감한 곳에 따따부따 쏘아붙이는 말을 한다.


전화를 끊고서 아차 싶다. 그들이 제때에 돈을 돌려주지 않을 듯하고, 이자를 붙여 주지도 않을 듯한데, 입만 아픈 말을 굳이 했구나. 뭔가 유교수처럼 어질게 한마디 해줄 수 있을까 싶었으나, 나는 유교수가 아니네.



2024.3.20.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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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 세계문화예술기행 1
박완서 지음 / 학고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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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5 써주는 글보다는


《모독》

박완서 글

민병일 사진

학고재

1997.1.25.



《모독》은 2018년에 처음 장만했다. 그때 나는 일에 묶여 살았다. 일기도 쓰지 못했다. 집밖이며 나라밖이며 아무튼 바깥이 몹시 궁금할 때 장만했다. 박완서 님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닌 듯하다. 다 다른 곳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쓴다. 빼앗고 빼앗기며 싸우던 숱한 슬픔이 깃든 여러 나라를 기웃기웃하는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박완서 님은 ‘여행을 다녀와서 글을 써주기로 하고 따라가’는 나들이였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녀온 셈이다. 게다가 사진사가 붙으니 굳이 품을 들일 일도 없고, 짐도 가벼웠겠지.


티베트는 어떤 나라일까. 글과 사진으로 보자면, 풀이 없고 먼지가 자꾸 일고 높직한 땅이라는데, 한때 집짐승을 키우며 떠돌다 머문 사람들이 불교에 몸을 담고서 마음을 닦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는데, 그곳은 언제부터 사람들이 바닥에 온몸을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아가는 곳이 되었을까? 이제 티베트라는 나라는 없이 중국이 집어삼켰는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으로는 이 궁금한 곳을 하나도 풀지 못한다.


《모독》에 나오는 티베트 사람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티벳사람이랑 우리랑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 멀잖은 우리 할매 할배에, 예전 사람들 모습을 닮았다. 꾸미지 않는 얼굴에 차림새이다.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그을렸다. 


보고 자란 탓일까. 큰 나라에 가려져 나라 밖으로 나아 가지 못하고 억눌린 삶이 시간을 멈추어 놓았을까. 총칼에 쉽게 무너져 내렸을까. 풀꽃나무보다 광물이 넘치는 나라 못잖게 번쩍번쩍 번쩍하는 불상 이야기가 흐른다. 


《모독》에서 205쪽을 가득 채운 사진에 빨려든다. 옷이나 귀걸이나 목걸이나 구슬이 아닌, 얼굴빛에 빨려든다.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이 웃는다. 웃는 밭고랑에서 빛이 나온다. 온통 하얗게 바르며 꽃처럼 꾸미는 아가씨나 여왕한테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웃음빛이다. 사람으로서 살아오면서 해와 바람과 비를 맞아들여온, 살림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빛이다.


책이 나온 지 스무 해 남짓이라지만, 글이나 사진이나 줄거리가 묵었다기보다는, 어쩐지 속은 듯한 글과 사진이지만, 돈 한 푼 안 들이고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서 “써 주는 글”이라지만, 주름살을 녹여내는 웃음 하나가 마음으로 스민다. 어쩌면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사진으로 만나려고 이 책이 나한테 왔을 수 있다.


나도 언젠가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싶다. 나는 스스로 번 돈으로 찾아가고 싶다. 무겁더라도 사진기도 손수 챙겨서 찍고 싶다. 내 발로 딛고, 내 어깨에 지고,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느낄 적에, 비로소 나다운 글이 태어나리라 본다.


집도 삶도 숲을 살피면서 살아가기에 웃음빛이 태어난다면, 내가 볼 곳과 나아갈 곳은 아주 환하다. 이 봄날에 봄볕을 듬뿍 머금자. 마을을 걷고, 마을 둘레부터 느껴 보자.




2024. 3. 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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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4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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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4 책을 보듯이



《천재 유교수의 생활 4》

야마시타 카즈미

신현숙 옮김

학산문화사

1997.2.25.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은 아줌마와 학생과 애인과 노인과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길을 다룬다. 유교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을 얻는다. 달려가는 학생을 앞지르면서 ‘앞의 풍경’을 보는 기쁨을 얻고, ‘뜨거워진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앞에 펼쳐진 모습을 만나는 책읽기’를 하자고 다짐을 한다. 나이든 분을 만나 말동무가 되어 주면서 ‘오늘 이곳에서 배우고 즐기’는 하루를 살자고 여긴다.


가게에 가서 품을 들여 무를 고르면 곧잘 다른 아줌마가 끼어들어 낚아채곤 한다. 모든 아줌마가 이러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밀치는 아줌마가 하는 짓을 보면, 이분은 둘레도 안 쳐다보지만 그분 마음속부터 안 들여다본다고 느낀다. 그런데 값싸게 뭘 사더라도 다른 데에서 흥청망청 쓴다면, 무 한 뿌리를 싸게 산들 무슨 이바지를 할까.


큰가게에 가 보면 줄을 길게 서서 더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물결친다. 나는 이런 긴줄을 보면 돌아나온다. 왜 줄까지 서면서 더 싸게 사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다리는 품이 아깝고, 기다려서 싸게 살 바에야 다른 것을 장만해서 일찍 집으로 가는 길이 낫다고 여긴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에 나오는 아줌마는 돈도 품도 나와 다르다. 만화책에 나오는 아줌마는 남이 사려는 걸 빼앗듯이 산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도 스스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옷집에서 더 그렇다.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으니 값싸게 사고 싶다. 아이 옷을 고를 적에는 일꾼한테 골라 달라고 여쭈었다. 어떤 가게에서는 남들이 무얼 사서 먹는지 살펴보다가 덩달아 살 적도 있다. 


열 해 남짓 작은가게를 꾸리는 동안 싸게 팔지 못했다. 가게를 차릴 적에 처음에는 크게 알리려고 ‘에누리’를 하지만, 일꾼한테 치르는 품삯부터 만만찮고, 또 잔뜩 떼어와서 잔뜩 팔지 않으면 남지 않을 테니 잔뜩 들일 수 없는 살림이라서, 큰가게처럼 싸게 팔 수 없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에서 유교수가 기차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둘러싼 이야기가 재미있다. 유교수는 그저 느긋이 책을 빌려읽으려고 기차를 탔을 뿐인데, 한 사람은 유교수를 물끄러미 보면서 ‘내가 책이고 저렇게 날 봐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그사람을 이렇게 사랑스레 바라보았던 때가 있었던가?’ 하고 돌아본다. 이렇게 속으로 다르게 생각하던 두 사람은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남이 뭘 해주기를 바라기 앞서, 스스로 눈빛부터 바꾸기로 한다.


유교수는 ‘책을 넘길 적마다 내 인생 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기에 책을 계속 읽을 것이다.(38쪽)’ 하고 말한다. 나도 책을 펼 적마다 내 앞에 새모습과 새빛이 반짝반짝 드리울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나도 내 둘레 모두를 따스하고 깊고 사랑스레 바라보는 눈빛이고 싶다.



2024. 3. 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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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말이 들리나요? - 숲으로 떠나는 작은 발견 여행 지식은 내 친구 18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 논장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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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3 서로 들려주는 말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

페터 볼레벤

장혜경 옮김

논장

2020.6.15.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는 숲이 집인 나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숲에 몸을 숨기며 먹고사는 짐승과 벌레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가 뿌리내린 바닥에서 버섯이 하는 일을 다루고, 나무에 깃드는 새 이야기를 두루 다룬다.


짐승과 새도 말을 하고 짝을 찾는다. 사람들은 새가 하는 말을 울음으로 여긴다. 나무는 나뭇잎으로 냄새를 퍼뜨리고, 나무냄새는 바람을 타고서 먼 이웃나무한테 스민다. 땅밑에서는 뿌리끼리 서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뭇잎이나 나무뿌리가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지 못 하기 일쑤이다.


도시에 집이 잔뜩 들어서고 찻길을 닦느라, 숲이 야금야금 잘리고 사라진다. 숲에 사는 나무를 도시 한쪽에 옮겨심고서 공원을 꾸민다. 찻길을 따라서 한 그루씩 드문드문 심은 나무는 외로워 보인다. 잿빛이 가득한 높다른 마을에는 나무를 조금 심어서, 사람도 쉬고 새도 깃든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찾아오는 3월에, 나라 곳곳에 꽃구경 이야기가 올라온다. 오늘 수목원에 가 보았다. 잎을 떨군 가지에 갓 새싹이 눈을 틔우는 나무가 몇 있다. 며칠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 왔는데, 이 찬바람에 움츠리는데, 손이 시린 추위인데, 매화는 꽃망울을 맺는다. 더 따뜻할 때 피워도 좋겠다고 여기지만, 매화는 해마다 이런 찬바람 부는 날을 골라서 꽃을 내놓는다.


땅바닥에서도 풀꽃이 오른다. 누가 먼저 깨어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나란히 올라오리라. 풀꽃이 피고, 나무꽃이 핀다. 나무꽃이 피고, 풀꽃이 핀다.


털옷을 입은 할미꽃이 나온다. 노랗게 복수초가 나온다. 풀꽃이 돋는 봄이면, 맨흙을 밟을 수 없다. 자칫 내 발바닥에 새싹이 뭉개질까 걱정스럽다. 멧길을 거닐더라도 바닥에 어떤 풀꽃이 있는지 살핀다.


"나무는 누가 나뭇잎을 뜯어 먹는지 알고 껍질이나 가지에 물린 자리에 쓴맛을 내거나 독을 흘려 보낸다. 다친 나무는 이웃나무한테 "딱정벌레야, 조심해"라고 소리지는데 말을 냄새로 한다.(30쪽)" 같은 대목을 돌아본다. "같은 나무가 아니면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한다.(31쪽)" 같은 대목도 되새긴다.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에서 짚기도 하지만, 참말로 나무도 다 알리라 본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무도 풀꽃도 냄새가 말이지 싶다. 바람은 나무가 하는 말을 태워서 나누어 준다. 아니, 베푼다. 바람은 풀꽃말도 실어서 퍼뜨린다. 아니 베풀어 준다.


대구 시내를 걸을 적마다 길거리에 있는 나무를 보면, 나무가 아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듣는다. 멧골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숲나무를 보거나 길나무를 볼 적에, 어쩐지 마음으로 나무말이 스며든다.


나무를 가만히 보면, 줄기와 껍질과 가지로 말을 건넨다. 잎과 꽃으로도 말을 들려준다. 버즘나무도 벚나무도 다 다르게 말을 건넨다. 사람들이 나무에 건 걸개천으로 앓는 말을 들려주고, 거리에서 나무에 매단 쇳덩어리 탓에 아프다는 말을 뱉는다. 뿌리를 뻗을 틈이 없는 길바닥 때문에 고달프다는 말도 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작 손바닥을 펴서 나무줄기를 쓰다듬는다. 손바닥으로 줄기나 가지를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속으로 말을 건넨다. 기운을 내라고, 해를 보라고, 속말을 들려준다.


숲에 가면, 나무가 지르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삑삑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두리번거리면, 나무끼리 붙어서 바람에 흔들려 부딪치는 소리 같지만, 천천히 쓰러지면서 내는 앓는 소리 같다. 어느 나무는 마치 엄마나무처럼 작은나무를 받친다. 어느 나무는 마치 엄마한테 안기듯 살살 감거나 기댄다.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는 "한 그루 나무가 너도밤나무에 에워싸여 있다면 참나무는 겁에 질러 벌벌 떤다.(40쪽)" 하고도 들려준다. 홀로 자라는 나무는 두렵거나 무서울 수 있다. 그러나 나도 나무도 굳이 둘레에 휘둘릴 까닭은 없다. 숱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들게 일을 마친 저녁에도, 그저 나를 바라보면 될 노릇이라고 본다.


나무는 온몸으로 말을 한다. 바람이 거들고 비가 돕는다.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나무는 말을 한다. 나도 나무한테 말을 한다. 나무가 부디 기운을 차리기를 바라면서 손바닥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말을 들려준다.



2024. 3. 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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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 - 말글마음을 돌보며 온누리를 품다
최종규 지음 / 곳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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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2 글쓰기 길잡이



《우리말꽃》

최종규

곳간

2024.1.31.



《우리말꽃》을 펼친다. 겉 종이에 '꽃' 글씨 하나가 꽉 찼다. 눈에 확 띄게 썼을까. 궁금해서 얼른 여는꽃을 읽는다. 글쓴이는 책이름처럼 ‘여는말’이 아닌 ‘여는꽃’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여는꽃’을 읽으니, 글쓴이가 걸어온 길이 죽 흐른다. 어릴 적에 인천 바닷가에서 놀며 들은 말에,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추스르면서 이웃에서 만난 연변사람 말씨를 들은 하루에, 이제 전남 고흥 시골로 옮겨서 새·풀꽃나무·비바람·흙·별을 동무하는 삶을 말빛 하나로 옮긴다고 한다.


여는꽃 다음으로 닫는꽃도 읽어 본다. ‘여는꽃’이 여는말이듯, ‘닫는꽃’은 닫는말이다. 무슨 책을 맨앞과 맨뒤부터 읽느냐고 할 수 있지만, 열고 닫는 말이 글쓴이 마음을 스스로 간추려서 들려준다고 여겨서 둘을 먼저 읽어 버릇한다.


《우리말꽃》을 쓴 사람은 ‘국어학’이라는 일본말을 쓰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우리 말글로 담을 적에 스스로 꽃처럼 피어나리라 여겨 ‘우리말꽃’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나 같아도 ‘국어학’이라고 하면 너무 어렵겠다. 우리말꽃, 여는꽃, 닫는꽃, 이런 이름은 어린이도 문득 눈을 반짝이면서 “무슨 이야기일까?” 하고 궁금하게 다가설 수 있구나 싶다.


책을 천천히 읽어 본다. 나도, 둘레 사람들도,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은 거의 일본말씨에 옮김말씨(번역체)에 한자에 길들었구나 싶다. 어느 모임과 얽힌 일을 떠올려 본다. 예전에 어느 모임에 글을 낸 적 있는데, 내가 쓴 글에서 쉬운 우리말을 편집부에서 한자말로 고쳐 놓았더라.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고, 그 모임에서 내놓는 책을 받아보고서야 뒤늦게 알아서 놀란 적이 있다. 편집부에 전화를 걸어 '나는 이런 말씨를 안 써요' 하고 따진 적이 있다. 


나도 적잖이 일본말씨에 물들었겠지. 그러나 문학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씨에 물든 줄 잘 모르는 듯하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를 뉘우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데, 우리로서는 일본한테 식민지를 살면서 물들거나 길든 말은 아직 뉘우치지도 씻지도 않는다. 일본 그늘에 억눌리면서 억지로 써야 하던 말이 어느새 다들 몸에 굳고 마음에 뿌리내린 듯하다.


우리 짝이 얼마 앞서 ‘내용증명’을 쓴 적 있는데, 어려운 한자말에 ‘-으로부터’ 같은 말을 잔뜩 써놓더라. 옆에서 이 내용증명을 읽어 보다가, 우리는 이렇게 쓰지 말자고 했는데, 짝꿍은 이런 말씨를 써야지, 받는 쪽에서 말귀를 알아먹는다고, 쉬운 우리말을 쓰면 말힘이 안 난다고 하더라.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짝은 ‘내용증명’에는 “니가 쓰는 글결로 쓰면 말이 여려서 안 돼” 하고 덧붙이더라. 왜 안 되냐고 되물었지만 고치지 않았다. 


나는 틈틈이 시를 써 본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삶글도 써 본다. 둘레에서는 한자로 ‘수필’이라 하거나 영어로 ‘에세이’라 하는데, 나는 둘 다 내키지 않아서 ‘삶글’이라는 이름으로 내 하루를 글로 적어 본다. 그런데 시를 쓰는 여러 이웃들은 한자말을 넣어야 문학이 깊다고 힘주어 말한다. 일본말씨나 옮김말씨를 쓰지 않으면 문학맛이 안 난다고들 한다.


다시 《우리말꽃》을 읽는다. ‘구체적’(217쪽)을 다루는 꼭지를 눈여겨본다. ‘구체적’이라는 일본말씨를 쓰기 때문에 오히려 말도 글도 ‘구체적’이지 않다면서, 어떤 우리말로 차근차근 짚고 풀어낼 수 있는지 하나하나 들려준다. 그러고 보면 ‘구체적’이라 할 적에는 오히려 또렷하지 않다. ‘구체적’을 쓰지 않고 어느 무엇을 콕 짚어서 말할 적에 환하게 드러난다. 낱낱을 밝히면 될 텐데, 두루뭉술하게 글을 써서 문학이라고 내세우려니까 ‘구체적’ 같은 말씨를 못 버리는 듯하다.


《우리말꽃》은 우리 말밑(어원) 이야기도 곳곳에서 들려준다. 글쓴이는 국어사전을 쓰는 일을 하면서 말밑도 캐낸다고 하는데, 우리말 '가시내'는 시내와 뫼(갓)를 품은 큰말이라고 들려준다. 여태 생각도 해보지 못한 대목이다. 그냥그냥 쓰고 듣는 말로만 여겼는데, ‘가시내’도 ‘머스마’도 말밑과 말결이 깊구나. 겨울이 저물 무렵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들꽃은 ‘봄까치꽃’이 아닌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이라는 대목도 곱씹는다. 왜 ‘까치’라고 하는지 알쏭했는데, 수수께끼를 풀었다.


나답게 살자는 말을 곧잘 외쳤다. 누구나 누리고 싶은 '자유'일 텐데, '나답게 나다움 나는 나'처럼, 바로 이 ‘나’와 ‘날개’가 한자말로 ‘자유’를 나타내는 줄도 곱씹는다.


《우리말꽃》은 글쓴이가 내 앞에서 이야기하듯 눈으로 읽는데 쩌렁쩌렁하게 들린다. 시나 문학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바로 하지 말고 에둘러 말하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담 너머 구경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 에둘러 말할 수 없을 만큼 바르게 말을 한다. 에둘러 가다 보면 엉뚱하게 샛길로 빠지기 쉽겠지. 빙빙 에두르기 때문에 오히려 내 생각에 따라가지 않으면서, 불구경을 하듯 나를 잊을 수 있겠지.


나는 가끔 고개를 갸웃하거나 멍하다. 문학을 하는 분들은 으레 시와 글을 다르게 가르는데 왜 갈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시를 쓰려면, 이름난 분들이 내놓은 시를 읽어야 하는 듯 여기고, 이름난 잡지에 실린 시를 알아야 하는 듯 여기고, 이런 이름난 잡지와 책에 실린 시를 따라가야 하는 듯 여기더라. 그렇지만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시는 ‘시를 쓴 분들 이름값’은 아니라고 본다.《우리말꽃》을 쓴 분은 “어린이는 이름값을 따지지 않고 줄거리에 빠져 이야기를 즐긴다.(174쪽)”고 들려준다. 그렇다. “이름값을 안 보면서 읽어야 마음에 눈을 틔운다(174쪽).”라는 대목을 새롭게 되새겨 본다. 


2024년 2월은 여러모로 바쁘다. 여태까지 열한 해를 해온 가겟일을 접기에 힘들고 바쁘다. 쌓인 짐을 들어내고 쉴새없이 일하는데,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가던 어린이들이 빠끔히 들여다보면서 묻는다. "아줌마, 여기 왜 이래요?" 나는 어떤 말을 하면 이 어린이들이 바로 알아들을까 어림하면서 눈알을 돌리다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아이 눈높이를 맞추면서 “응, 이제 우리 여기서 가게를 그만하거든. 그래서 가게를 치우느라고 이렇게 좀 어지럽고 바쁘단다.” 하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쓰고 읽을 글도 이렇게 늘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쓸 적에 빛날 텐데 하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마음을 담은 말을 사랑스럽게 혀끝에 얹어서 소리를 내어 보면, 내 목소리를 나부터 내 귀로 듣는다. 문학도 비평도, 모든 글도, “다섯 살 어린이한테 말하듯이 글을 써야 말결이 살아난다.(347쪽)”라고 들려주는《우리말꽃》은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든든히 잡아 주는 길잡이 같다. 우리말로 담아내는 낱말 하나가 무엇인지, 이 낱말을 엮어서 글을 쓰는 길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새롭게 돌아본다. 두루 길을 터주는구나. 


이제 책을 덮는다. 글쓴이는 남들이 쉬이 가지 않는 길을 뚜벅뚜벅 홀로 걸어온 분 같다. 숲을 사랑하고, 새가 내려앉는 나무를 쓰다듬고, 해와 별을 헤아리며 깃드는 조용한 마을에 살면서, 이 모든 마음을 글에 녹인 듯하다. 말더듬이였던 어린 날이었기에 우리말을 쉽게 살리는 길을 걸었고, 썩 쉽지 않은 길을 호젓이 걸어서 함께 나누려는 글을 내놓는구나 싶다. 


우리 짝은 시골에 계신 어버이 말씀을 잘 듣는다. 말을 잘못하면 바로 꾸지람을 듣는다. 《우리말꽃》 글쓴이도 우리 아버님처럼 타이른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한테는, 틀리면 바로잡아 주는 틀이다. 남 눈치 살피지 않고 말한다. 길잡이가 하는 말이요, 글잡이가 되도록 이끈다. 참사랑을 담은 말과 글은 사랑을 듬뿍 받지 싶다.



2024. 2. 2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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