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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된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ㅣ 큰 스푼
민병덕 지음, 강화경 그림, 이성섭 감수 / 스푼북 / 2024년 1월
평점 :
오늘은 아이와 읽으려고 신청해서 받은 <불꽃이 된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을 읽고 리뷰해 보려 해요.
이 책을 신청했던 이유는 제가 평화 활동으로 지난달 윤봉길 기념관을 다녀와서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요.
단순하게 물통 폭탄을 던져 애국한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바라보면서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 아픔을 공감하게 되고 그 기개에 감동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럼 윤봉길 의사의 자취를 살펴볼까요?
1부. 일본을 꾸짖는 아이
선생님, 조선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왜 나쁜 일입니까?
그리고 일본이 조선에 은혜를 베푼다면
왜 사람들이 만세 운동을 할까요?
우리를 위한다면서 왜 수업은 안 하는 것입니까?
윤봉길 의사는 먹고살기에는 무리가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지원으로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웠다고 해요. 그러다가 열 살이 된 후에는 덕산 공립 보통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에 학교에서부터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요.
다음 해 3.1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시민들이 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독립에 대해 자각한 윤봉길 의사는 학교를 그만두고 성삼록의 후손이던 성주록 선생님이 운영하는 오치서숙에서 학문을 쌓게 됩니다. 이때 윤봉길의 나이는 11세인데요.
10세, 11세는 너무 애기잖아요. 그런데 그 나이에 벌써 일본인들에게는 더 이상 학문을 배우지 않겠다고 하고 학교를 그만둘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니 정말 놀라웠어요.
오치서숙에 다니면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와 <시경>, <서경>, <역경>을 배웠고 이미 그 당시에 시를 쓰는 수준이 상당하였다고 해요.
2부. 농촌 계몽에 나서다.
오치서숙에는 18세까지 다녔다고 하는데요. 이미 학식이 스승을 뛰어넘은 윤봉길에게 성주록 선생은 '매헌'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하죠.
그 이후 윤봉길 의사가 농촌 계몽에 나서게 된 것은 하나의 사건 때문인데요.
후에 '묘지 팻말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무지렁이였던 한 농민이 자신의 아버지 묘를 찾겠다고 동네 온 묘지의 팻말을 다 뽑아 오는 바람에 모든 묘지들의 주인을 찾는 게 어려워진 사건이었다고 해요.
무지가 죄로다.
이것은 이 청년 한 사람의 통곡이 아니라 글을 모르는 이 나라 국민의 통곡 소리다. 일본 침략자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것이다. 51p
이 사건을 토대로 윤봉길은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문맹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고 해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교재를 만들어 1927년 <농민독본> 세 권을 완성하였는데 농민독본은 한글을 교육하기 위한 1권 <조선글>, 기초 학습 자료이면서 일반 상식을 알려주는 2권<계몽>, 3권 <농민의 앞길>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해요.
윤봉길은 농촌 부흥 운동에 감동받은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토지를 증여받아 본격적으로 1928년에는 부흥원이라는 학교 건물을 완공하였고, 이후, 증산 운동, 마을 공동 구매 조합 운영, 국산품 애용, 부업, 생활 환경 개선을 장려하고 농민계몽을 위한 '월진회'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즉 윤봉길은 독립운동가이기 이전에 교육자이자 문학가 그리고 계몽운동가로서 그 역할을 뛰어나게 해내던 인재였어요.
하지만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 각성한 윤봉길은 감옥을 다녀오고 결국 중국으로 떠납니다.
이 당시 윤봉길에게는 두 돌을 갓 넘긴 아이와 임신한 아내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발 걸음이 떨어지기 힘들었을까요...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으로 집을 떠나면서 '사나이가 한 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뜻의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유명한 문장을 써 두고 집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때가 윤봉길 의사가 스물한 살이었다고 해요
3부. 독립운동가의 길로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윤봉길이 아이들에게 남긴 시
중국으로 향하던 길,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고초를 당하고 만주로 향했지만 그곳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로 가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지사들을 만나게 되죠.
당시 일본은 중국인과 한국인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서로 싸우게 만드는 등 날이 갈수록 더 악랄해지고 있어 독립지사에서는 김구 선생님의 주도 하에 '일본의 주요 인사를 죽이거나 중요 시설을 파괴할 목적'으로 '한인 애국단'을 만들었다고 해요.
이때 첫 독립투사가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였어요. 이봉창이 던진 폭탄은 위력이 약했기 때문에 일왕이었던 히로히토 시해에 실패하고 말죠.
그러던 중 일왕의 생일을 맞아 홍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점령 기념식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 윤봉길 의사는 자원을 하는데요. 그 유명한 물통 폭탄으로 일본군 사령관, 일본인 거류민단장, 일본군 사령관 노무라 중장이 사망하고 육군 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어요.
폭탄 시해가 끼친 영향
폭탄으로 일본군 몇 명 시해한 게 무슨 큰일일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실제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요.
윤봉길의 의거는 '상하이 사건', '홍커우 공원 의거'라고 불리며 중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당시 중국의 최고 통치자인 장제스의 감동을 이끌어 냈는데요
중국인 백만 대군과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한 명이 해냈다. - 장제스
이로 인해 장제스는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과 예우를 약속하게 되었고요.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 대표가 모여 일본이 패배하면 그 뒤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를 할 때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탄했던 장제스가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 결과 '카이로 선언문'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라는 특별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해요.
윤봉길 의사는 가족들도 모르게 사형이 집행되고 시신이 매장되어 결국 독립 후 어렵게 찾았는데요. 유해를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통로에 매장해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만들었었다고 해요. 나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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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봉길 의사는 1946년 발굴 후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지금의 효창 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던 나이가 스물넷이었으니...,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이 있게 해 주신 윤봉길 의사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봉길 기념관은 양재시민의 숲 역 바로 앞에 있더라고요.
방학기간 이용해서 아이들과 다녀오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책과 함께 추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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