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게 기사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승리일까.

 


196㎏ 여성, 위 수술·운동 병행해 건강 찾아… "이젠 당당하게 길 물어볼 수 있어"
초고도 비만에 생명 위협까지… 사연 접한 성모병원, 무료 수술

"키 183㎝에 몸무게 196㎏인 여자로 사는 일은 암흑이었습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을 찾은 이정선(37)씨 얼굴에 그간의 설움이 스쳐가는 듯했다. 몸무게 97㎏으로 다시 태어난 이씨는 수십년 만에 뱃살 밑으로 처음 드러난 발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생명까지 위협받는 초고도 비만 환자인데도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며 놀렸다. 2008년 8월 이씨 사연이 한 방송을 통해 알려진 뒤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이 '위 우회술'을 해줬다. 소주잔 크기만 하게 자른 위를 소장과 연결해 음식물 섭취와 흡수를 동시에 줄이는 수술이었다.





2008년 7월 당시 196kg이었던 이정선씨. /이정선씨 제공





몸무게 97kg으로 다시 태어난 이정선씨가 활짝 웃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수술 후에는 남의 눈을 피해 공동묘지에 가서 운동을 했다. 운동으로 체중은 서서히 줄었지만 살이  처지기 시작했고, 접히는 곳마다 습진과 물집이 생겨 의자에 앉기조차 고통스러웠다. 이런 사정을 안 서울성모병원은 지난 8일 12시간 동안 배 주위 처진 살 7㎏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해줬다. 수술비는 모두 병원이 부담했다.

이씨는 생선 노점을 하던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초등학교 때 덩치가 커서 중학생이라고 오해를 받았던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몸무게가 100㎏을 넘었다. 조금만 먹어도 질병 수준으로 살이 쪘다. 1992년 고교 졸업 후 4년간 사무실 경리부터 재봉공장 보조 재봉사까지 수백번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 몸으로 여기는 왜 왔느냐'는 냉랭한 눈빛만 돌아왔다. 1996년부터는 사람을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텔레마케팅(전화영업)으로 보험과 책을 팔았다. 한 달에 100만~120만원을 벌었다.

이씨는 "나를 버리지 않은 엄마를 위해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며 "외모에 신경 쓸 만큼 삶이 녹록지 않았다"고 했다. '성격까지 나쁘면 아무도 상대 안 해준다'는 생각에 활달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어느새 '예스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1년 어머니 회갑 선물로 62㎡(19평) 아파트를 사드렸지만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4년 만에 날려버렸다. 어머니는 종교시설에 들어가고 이씨는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지긋지긋한 살덩어리들을 떼어 버렸다. 이씨는 "다른 사람이 나한테 신경 안 쓰고 무관심한 게 너무 좋다"며 "17년 만에 백화점에 갔는데 이젠 낯선 사람한테 길도 물어볼 수 있고 버스 타도 미안한 생각이 없어졌다"고 기뻐했다.

"75~80㎏ 정도가 최종 목표예요. 자격증도 따고 직장도 얻어 어머니와 살 집을 다시 마련해야죠. 100㎏짜리 족쇄를 벗어던져서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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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고성국 기자의 연재이다. 박근혜가 궁금했다. 김종필도 그렇고,  

 

 사실상 본선으로 여겨졌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석패한지 3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여전히 30%대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다. 혹자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대세론은 없다"고 얘기하고, 또다른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들어 "현직 대통령은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특정인을 대통령이 될 수 없게 할 수는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박근혜는 2012년 대선을 향해 달리고 있는 현 정치판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다. 이명박 정부의 중간 평가라 할 수 있는 6월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정치권이 빠르게 '대권모드'로 정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복잡한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면서 4선 국회의원이자 이미 한번 대권에 도전했던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분석은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박정희의 딸'이라는 배경에 기반한 열광이 아니면 비난이라는 극단의 논설만 존재한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정권교체라는 사건을 두번 경험한 한국정치 현실에서 다시 주목받는 논의가 새로운 리더십리더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바람직한 리더와 리더십을 논함에 있어 이론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의 논의도 중요하지만, 개별 정치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필요하고, 이는 언론이 할 수 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의 '박근혜論'을 연재한다. 이후 야권의 대선주자들에 대한 분석도 준비할 계획이다. 고 박사의 '박근혜論'은 주 2회, 총 10회에 걸쳐 실린다. 편집자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한나라당에 역풍이 몰아닥쳤을 때부터 박근혜는 한국정치의 상수가 됐다. 그 후로 박근혜는 가장 응집력 높은 대중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탄핵역풍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지켜냈고 천막당사를 감행해 '차떼기당'의 이미지를 날려버렸다. 재보궐 선거에서 40:0이라는 굴욕적인 참패를 참여정부에게 안겨준 사람도 박근혜였고 2006년 지방선거를 한나라당의 대승으로 이끈 사람도 박근혜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은 박근혜를 위한 경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는 경선을 예측불허의 초접전으로 끌고 가 경선흥행 효과와 예방백신 효과를 극대화시켰고, '아름다운 승복'을 연출해 전당대회를 한나라당의 축제로 마무리했다. 박근혜는 압도적으로 앞서가던 이명박 후보로부터 국정동반자 선언과 함께 도와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BBK사건'으로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지도 모른다면서 출마를 강행한 이회창의 손을 끝내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이회창의 반란'을 찻잔 속의 태풍으로 가두고 이명박 압승 구도를 최종적으로 확정지어주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현존권력이 군림하는 상황에서도 박근혜의 파워와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정부출범 두 달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친이 직계의 거칠 것 없는 '공천학살'에 맞서 친박진영을 구축해 진지를 고수하고, '공천탈락자들의 옹색한 자구책'이라는 세간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당명으로 내건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연대 출마자들을 30여명 가까이 당선시켜 '공천학살'을 무력화시킨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재보궐 선거와 미디어법 파동을 거치면서 박근혜는 비껴서 있되,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움직여 꼭 필요한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는 '절제의 미학'을 보였다. 그런 박근혜가 세종시 국면에서는 그간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터프한 인파이터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다.

제대로 된 연설이나 대국민담화 한 번 없이, 그 흔한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으면서도 만들어내는 박근혜의 위력적인 파워와 계측하기 어려운 영향력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가?

손학규의 부상…박근혜 '일인독주체제'에 변화 바람 부나?



▲ 지난 9월 8일 열린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 출판기념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박수를 치고 있다. ⓒ뉴시스


다음 대통령 선거는 2012년 12월이다. 아직은 2년이나 남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012년이 밝아옴과 동시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2011년부터 모든 정치역학은 2012 대선구도를 중심으로 다시 짜여질 것이 분명하다. 아니 정치역학의 재편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명박-박근혜의 8.21 비밀회동 후 범여권 내에서 계파 완화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박근혜 대세론이 탄력을 받고 있는 양상도 그렇고, 민주당이 손학규를 내세우면서 한나라당의 김문수, 오세훈과 중원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한 양상도 그렇다. 이명박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정국이 어느 사이엔가 박근혜, 손학규, 김문수, 유시민, 오세훈 등 차기 주자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최근 수직 상승하고 있는 손학규의 지지율이 일시적인 '전당대회 효과'에 그칠지 "잃어버린 600만 표"를 되찾아 올 블루칩에 대한 '지속적인 표 쏠림'으로 연결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손학규의 부상으로 박근혜 일인독주 체제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학규와 유시민, 김문수와 오세훈은 수도권과 중간층의 지지를 놓고 밀고 당기는 길항관계에 있다. 박근혜는 이 중원대결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과 중간층을 둘러싼 경쟁, 이른바 중원쟁탈전이 격화될수록 박근혜의 행보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비록 차이가 많이 나는 2위 싸움이지만 싸움이 있는 한 그 싸움터로부터 너무 주변화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수도권 유권자들과 중간층은 이념지향성보다는 이슈지향성이 강하고 고정성보다는 변동성이 크다. 2007년 대선에서 530여만 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도 이들이고 그 불과 몇 달 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도 이들이다. 6.2 지방선거 때 투표장에 '몰려가' 이변을 만들어 낸 사람들도 이들이며 손학규가 틈만 나면 외치는 "잃어버린 600만 표" 또한 이들이다.

바야흐로 중원싸움이 막 시작되었다. 깃발을 먼저 올린 쪽은 민주당이다. 당연하다. 언제든 도전자가 먼저 링에 오르는 법이니까.

2012년 대선은 박근혜와 '반박근혜'의 쟁투

박근혜는 지금의 구도를 잘 유지, 관리해가려 할 것이다. 10.1 청와대 만찬에서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성공과 18대 국회의 성공을 위해 건배한 것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반면 여당 내 반박근혜 진영과 야당에게 2011년은 '박근혜 절대 우위 구도'를 흔들어야만 할 절대절명의 승부의 시기가 될 것이다.

만약 2012년 상반기까지도 '박근혜 절대 우위 구도'가 유지된다면 2012 대선의 승부는 사실상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지지율이 보여주고 있는 높은 응집력이 '마지막 승부'를 앞두고 갑자기 이완될 것도 아니고 2002년의 노무현처럼 들불과 같이 번져갈 휘발성과 확산성을 갖춘 새로운 후보를 또 다시 기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지키려는 박근혜와 흔들려는 반박근혜 세력 간 쟁투는 우리 정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다소 이른 느낌이 없지 않은 2010년 말에 2012 대선을 전망하는 평론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이렇듯 예상 밖으로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 대권 주자들의 움직임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정치지형을 제대로 읽기 위한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프레시안>의 문제의식 때문이다.

 



/고성국 정치평론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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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반도체 공장' 피해자 열전·②] 김시녀·한혜경 모녀

"웃겨요. 믿을 수 있어요? 내가 장애인이 됐어요."

그녀가 양 주먹을 쥔다. 눈을 질끈 감는다. 경직된 듯 힘이 들어간 몸이 떨린다. 이것이 그녀의 울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뇌종양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눈물샘이 같이 잘려나갔다. 소뇌에 종양이 자리 잡았다.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 몇 달을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의사에게 매달렸다. "우리 혜경이 그냥 내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질 수만 있게 해주세요." 몇 년 전만 해도 수술을 하지 않는 병이라고 했다. 그만큼 위험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에 면회 갔는데 쟤 사지가 다 묶여있는 거예요. 간호사 보고 왜 묶어놨냐니깐,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침대 하나 값이 3000만 원이래요. 그 침대가 부서질 정도로다가 난리를 치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물인간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래, 부셔져도 괜찮다. 식물인간만 아니면 된다. 그땐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요, 너무 좋으니까."

그러나 뇌종양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수술을 하러 간 날, 혜경 씨는 자신을 위해 준비휠체어를 보고 "이걸 내가 왜 타?"라고 반문하며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이 혼자 걷는 마지막 걸음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부축 없이는 혼자 서 있을 수조차 없다. 말은 힘겹게 나온다. 복시로 인해 사물이 4개로 보이는 바람에 한쪽 눈은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 시력도 크게 떨어졌다. 언어, 시각, 보행 1급 장애가 그녀의 상태를 말해주는 단어다.

한혜경 씨의 소원은 건강해져 예전처럼 일을 하는 거다. 월급을 받아 식구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싶다고 언젠가 이야기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어머니 김시녀 씨의 소원은 딸이 숟가락질이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모녀는 매일같이 재활치료원을 찾는다. 그녀가 예전처럼 직장에 다니는 일은 아마 없을 지도 모른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모두가 인정했던 삼성, 하지만…

한혜경 씨는 6년을 한 회사에서 일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일은 힘들었다. 12시간 맞교대가 일상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를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삼성에 다닌다고 그러면 애들이 다 인정했어요."

그녀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간 딸은 김시녀 씨의 자랑이기도 했다. 딸이 집에 오는 날이면 김시녀 씨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정작 혜경씨는 밥 먹을 새도 없이 자기 바빴다. 늘 피곤해했다. 스물 몇 살짜리 얼굴에 빨간 여드름이 가득했다. 생리도 몇 달 넘게 하지 않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여직원들 사이에서 생리불순은 회사에 들어오면 한 번씩은 겪는 절차처럼 얘기되고 있던 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입사한 지 3년이 지나자 아예 생리를 하지 않았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 후에도 어깨나 머리가 자주 아팠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가 싶어 병원을 찾았다. 약을 먹으면 며칠은 괜찮았다. 걸음도 자꾸 뒤뚱거렸다. 뼈를 다친 건가 싶어 X-ray를 찍어보기도 했다. 별 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을 전전하는 사이 몇 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혜경 씨는 신들린 것 마냥 헛소리를 해댔다.

신경과를 찾았다. 진료를 하던 의사가 머리를 MRI 촬영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온갖 병원을 갔지만 머리 쪽에 이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검사 결과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의사는 말했다.

"종양 크기로 보니 7, 8년 쯤 된 거네요."

2005년 수술을 받을 당시로부터 7년 전이면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하던 때였다. 치료하기에 바빠 그 말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재활치료를 받던 중, 혜경씨가 삼성전자에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회복지사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이라는 단체를 알려주었다.

한번 연락이나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돈을 노리고 접근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반올림 이종란 노무사가 찾아왔다. 혜경 씨가 삼성전자에서 한 작업 내용을 듣기 위해서였다.

혜경 씨는 6년 동안 솔더크림을 회로기판에 바르는 작업을 했다. 회로기판열처리 기계에 넣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불량을 검사하는 것도 그녀의 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곁에 두었던 솔더크림의 주성분이 '납'이었다. 납은 발암물질이다. 솔더크림은 종종 피부에 묻곤 했다. 불량품은 육안으로 가려야 하기에 열처리 된 회로기판을 가까이서 봐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판에 묻은 납이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작업장에 납 냄새가 가득했다. 종일 맡다보니 기숙사에 와도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급된 보호장비는 면으로 된 마스크와 비닐장갑뿐이었다.

혜경 씨에게 물었다.

"위험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삼성은 좋은 회사이니까, 당연히 그런 (위험한) 거 안 쓰겠지 생각했나봐요."

겨우 19살에 들어간 회사였다.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작업장에서 버젓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 나이가 아니었다. 회사는 그녀가 사용하는 약품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선배들이 일을 가르쳐주면서 손에 크림이 묻으면 IPA(Isoprophyl Alcohol)로 닦으라고 말한 게 안전교육의 전부였다. 유기용제 IPA조차 중추신경계열에 영향을 주는 독성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작업환경이었다. 그러나 몰랐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일했다.


ⓒ프레시안(김봉규)
"말해줬어야죠. 뭘 쓰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그럼 내가 나 혼자라도 정기검진 받고 병원에 가고 그랬을 거잖아요. 반도체가 그렇게 중요해요? 사람이 이렇게 되지 않게 알아서 해줘야지…."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떤다. 으, 으, 화를 누르는 소리다.

"내가 귀신이 돼서라도…가만히 안 놔두고 싶어요."

"먹어도 맛을 몰라, 슬퍼도 눈물이 안나…"

그러나 그녀의 분노는 인정되지 못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혜경 씨의 병을 산재라 인정하지 않았다.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질병이라고 했다. 삼성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착각이라고 했다.

혜경 씨에게 산재 인정은 억울함을 넘어 생존의 문제였다. 딸의 곁을 떠날 수 없기에 김시녀 씨는 어떤 벌이도 할 수가 없다. 집을 팔고 차를 팔아 치료비를 대고 약값을 댔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김시녀 씨의 근심은 늘어간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덧 진정이 된 혜경 씨가 차분히 말한다.

"내가 갑자기 장애인이 됐어요.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가끔씩 울컥울컥 해요."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혜경이는 종일 집에 있거나 병원에서 운동하는 거 밖에 없어요. 쟤도 예쁜 옷 입은 사람 보면 자기도 입고 싶을 거고, 저도 하고 싶은 거 있을 거잖아요. 뭘 먹어도 맛을 아나. 슬퍼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기를 해. 그렇다고 잠을 편히 잘 수 있나? 밤마다 벌떡벌떡 일어나요…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대체 그녀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는 걸까.

"혜경아, 금방 돼. 될 거야. 너 너무 걱정하지 마…내가 나한테 말해줘요."

그리고 돌아본다.

"엄마가 고생이 많아."

"아니야…엄마잖아…."

"나 나중에 또 병 걸리면 수술시키지 마. 진짜로 약속."


ⓒ반올림
혜경 씨는 팔을 뻗어 엄마의 손을 잡아당긴다. 약속도장을 찍으려는 모양이다. 김시녀 씨는 손을 뒤로 뺀다.

"됐어, 이 지지배야."

"수술시키면 안 돼."

"아유, 재발 안 돼."

그녀가 이번엔 내 쪽을 보며 말한다.

"건강해, 건강할 때 지켜야 해. 건강이 최고예요."

종양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위험부담이 큰 까닭이었다. 남은 종양이 언제 재발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 혜경 씨 어머니 말대로 "재발되면 모녀가 삼성 앞에 가서 텐트치고 살다가 거기서 둘이 죽던지 뭘 하던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올해 4월, 반올림은 한혜경 씨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판정에 맞서 재심사를 요청했다. 8월 초 결과가 나왔다. 불승인이었다. 현재 반올림은 노동부에 재심사청구를 준비 중이다.(☞반올림 카페 바로가기)

 



/희정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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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연재된 글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인권지킴이 반올림'이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목소리를 <프레시안>을 통해 9회에 걸쳐 전달한다. 2007년 故 황유미 씨의 죽음에서 출발한 반올림은 3년이 지난 지금 100여 명이 피해 노동자를 더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것도 노동조합이 없어 노동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어려운 삼성에서다.

반도체 노동자의 노동 조건은 오늘날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수백 가지의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반도체 산업에서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 노출되는지, 인체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한 연구도 거의 진행된 바가 없다. 반도체 산업이 국가 경제의 중추로 자리매김한 탓에 그들의 발병에 대한 의문을 가장 앞서 규명해야할 정부도 소극적인 조사에 그치고 있다.

'반올림'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는 피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하고, 반도체 산업에서 소외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반올림의 활동을 알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고통받는 이들과 연결하려는 목적도 있다. 연재된 글은 여분의 이야기를 보태 2011년 책으로 엮일 예정이다. 본 연재는 <레디앙>, <참세상>, <미디어 충청>, <울산노동뉴스>와 공동 게재된다. <편집자>

그에겐 딸이 있다. 반도체 회사에 입사해 집을 떠난 지 2년 만에 딸은 백혈병 환자가 되어 돌아왔다. 항암치료로 벗겨진 머리와 핏기 없이 창백한 딸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버지 황상기 씨는 생각했다.'왜 우리 딸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10만 명 중 2, 3명이 걸린다는 희귀병이다. 가족 중에 백혈병은 커녕 암에 걸린 사람도 없다. 딸은 겨우 21살이었다. 고3 때 삼성 반도체에 입사한 후로 회사와 기숙사만을 오가던 아이였다.

'일하다가 병에 걸린 건 아닐까?' 막연한 의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 딸과 같은 조에서 일한 이숙영이라는 사람도 백혈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똑같은 곳에서 2인 1조로 일했는데, 똑같은 병에 걸려. 백혈병이라는 게 감기도 아니고 옮겨 다니는 전염병도 아니잖아요? 그 희귀한 병이 둘 다 똑같이 일하다가, 똑같이 걸린다는 건 틀림없이 이상하잖아요. 뭐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그는 딸 유미에게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아픈 딸이 괜한 걱정을 할까봐 조심스러웠다. 지나가는 말로 한번 묻고 며칠 뒤에 다시 묻는 식이었다. 유미는 디퓨전(diffusion) 공정에서 일한다고 했다. 반도체 웨이퍼를 여러 화학약품에 담가 세척하는 일이었다.

"무슨 약품을 쓰는데?"

그가 묻자 유미는 영어로 된 약품 명칭 몇 개를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했다. 딸의 다이어리에는 공정 순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 쓰고 외웠다. 그런 아이가 자신이 매일같이 쓴 용액의 성분을 몰랐다. 화학약품의 이름과 기능은 외우고 또 외워도, 성분은 알지 못했다.

물어볼 곳이 회사 밖에 없었다. 황상기씨는 딸이 다니던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전화를 했다. 산재인 것 같다고 하자, 회사 직원은 펄쩍 뛰었다. 과장과 직장이 집으로 찾아와 퇴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퇴사를 할 테니 산재처리를 해달라고 했다. 회사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치료비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남은 치료비가 4000만 원이었다. 병간호를 하느라 일을 하지 못해 벌이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치료비를 보상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때만 해도 딸이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다 나은 줄 알았다.

몇 주 뒤, 유미가 열이 펄펄 끓었다. 내성이 생겨서 해열제도 듣질 않았다. 애를 들춰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재발이 된 게였다. 마침 회사 직원이 아주대병원으로 찾아왔다. 직원은 약속된 치료비가 아닌 500만 원을 건넸다.

"500만 원을 내밀면서 그것밖에 없데.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싶었는데, 그 돈을 안 받으면 안 되는 거야. 애가 저러고 있으니까."

속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딸의 병이 산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산재다 싶은 거야. 내 눈으로 본 게 있잖아."

회사는 산재라는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으로 꾀고 술수를 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산재'라는 단어도 못 꺼내게 하는 삼성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떤 날은 '개인질병'이라며 윽박지르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마음에 눈물만 흘리다 온 적도 있었다.

고심 끝에 황상기씨는 언론에 이 문제를 알리기로 했다. 먼저 공영방송을 찾았다. <KBS> 방송국에 제보를 하니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힘없는 개인이 증거를 어떻게 찾아요?"

그것도 대기업 삼성을 상대로 증거를 찾아오라니,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다. 그는 딸에게 인터넷 이용법을 배웠다. 작은 언론사를 찾기로 했다. 손에 익지 않아 인터넷 검색이 서툴렀다. 전화번호가 보이기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월간 <말>지의 윤보중 기자와 연락이 됐다. 비슷한 경로로 <수원시민신문> 김삼석 기자와도 만나게 된다. 유미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고(故) 황유미 씨와 부친 황상기 씨. ⓒ반올림

그러나 2년 여의 투병생활 끝에 2007년 3월, 유미는 세상을 떠났다.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황상기씨는 싸움을 결심했다. 근로복지공단에 삼성을 상대로 산재 신청을 했다. 삼성 반도체에 백혈병 환자가 황유미, 이숙영 외에 4명이 더 있다는 말이 기억났다. 삼성 홍보그룹 관계자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환자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이 사건에 관심을 갖는 인권단체들이 있었다. 다산인권센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단체들이 모여 유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위를 결성한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의 시작이었다.

그 후 3년, 황상기 씨 한 명이었던 제보자는 100여 명에 다다랐다. 백혈병뿐 아니라 악성 림프종, 재생불량성 빈혈, 뇌암, 루게릭 등 희귀질병들이 제보되고 있다. 이들은 작업공정에서 벤젠과 납, 방사선 등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모두 대표적인 발암 물질이다.

유미가 세척을 하기 위해 만진 웨이퍼에도 벤젠이 묻어 있었다. 세척약품 중 하나로 사용한 황산은 발암을 촉진시키는 물질이다. 막연한 의심으로 시작했던 싸움이었다. 그러나 점차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발표한 '삼성반도체 사업장 위험성 평가 자문 보고서'도 그의 의심을 뒷받침해준다. 보고서는 반도체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99종의 화학물질 중 삼성이 자체적으로 성분을 확인한 경우는 한 건도 없고, 심지어 10종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성분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제 황상기 씨는 산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그들이 몰랐을까요? 노동자들이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거기에 어떤 유독물질이 있었는지 몰랐을까요? 삼성이 알았다면, 알고도 그대로 두었다면 이건 산재가 아니에요. 살인이에요, 살인."

19살 유미의 다이어리를 봤다. 2003년 10월 6일 <삼성전자 입사>라고 적은 날부터 삼성전자 직원 유미의 생활은 시작된다. 교복 대신 하얀 방진복을 입은 유미는 21일 월급날을 달력에 표시해두었다. 일기에는 날짜 옆에 '월급날 10일이 남았음'이라는 문구가 날씨 마냥 적혀 있었다.

11월에는 수능 날에 표시를 했다. 유미의 친구들은 이날 수학능력시험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은 속마음을 적어두었다.

"입사 초반엔 퇴사하고 싶단 생각 정말 많이 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맨날 울고 엄마한테도 퇴사하고 싶다면서 계속 울었다. 그러면서도 엄마 때문에 퇴사하지 못하고 참고 일했다. 차라리 친구들처럼 대학이나 갈 걸. 싫은데도 참고 일하는 건 엄마한테 미안해서이다. 엄마가 대학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우겨서 이 회사 왔는데, 엄마한테 미안해서 퇴사 못하겠다. 슬픈 책이라도 읽고서 아주 펑펑 울고 싶다."

달력에는 Day(오전 근무) Swing(오후 근무), G.Y(밤 근무)가 표시된 사이사이로 '집에 가는 날'이 적혀 있다.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한 선물 목록에는 내복이 들어가 있다.

일기에는 휴무 때 어떻게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는지를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였다. 방진복에 낙서를 해 혼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정수칙을 어겼다는 이유였다. 용모 단정,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는 수칙도 보인다. 청정수칙을 중시하고 직원들의 복장까지 단속하는 삼성이 수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건강에는 왜이리 무심한 걸까.

유미가 3번이나 옮겨 적은 작업수칙, 품질수칙 10대 항목 어디에도 안전장치나 안전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2004년도 마지막 장에는 다짐서가 있다. 2005년에는 작업할 때 MISS를 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신입사원 유미의 1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다음해 6월, 유미는 백혈병 판정을 받는다.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에서 그녀는 힘겹게 말했다. 말하는 내내 기침이 잦다.

"제가 백혈병이라는 말을 듣고는 많이 울었어요.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골수이식을 받고 회복되던 때였다. 그러나 몇 달 후, 병이 재발한 그녀는 영영 눈을 감았다.

황상기 씨를 만나기 위해 속초에 간 날이었다.

"저기가 울산 바위에요."

속초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앞장서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가 가리킨 곳에 푸른 능선이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산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예, 그러고 말았다. 황상기씨는 다시 앞섰다.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 와서야 유미씨의 유골을 뿌린 곳이 울산 바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터뷰에서 그는 딸을 울산 바위에 뿌린 이유를 이야기 했다.

"유미가 방사선 화학약품 때문에 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주 공기가 맑고 깨끗한 산에서 맑고 푸른 동해바다 바라보면서 있으라고 그곳에 뿌렸어요."

황상기 씨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산재임을 밝혀내겠다고 딸에게 한 약속도 이루어내길 바란다.

故 황유미 씨의 명복을 빕니다.(☞반올림 카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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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중국’의 부활, 어떻게 보아야 할까  

 

최근 영화 ‘공자’가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하지만 흥행 성적이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후진타오까지 나서서 독려하고 아바타 상영을 제한하는 등 당국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중국에서도 상황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러 다른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로 뭘 해보겠다는 목적성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중국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문명국가’ ‘문명중국’이라는 언설이 적잖이 회자된다는 점이다. ‘문명중국’은 정치적으로는 조공체제와, 가치개념으로는 천하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중국 지식인들이 말하는 ‘문명국가’라는 개념은 그들 사이에서는 ‘민족국가’의 대안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명중국’에 관해서 일본의 중국 연구자 다지마 에이이치(田島英一)의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근대의 국민국가 형성은 사(士)·민(民)·이(夷, 소수민족이나 주변국가를 포함) 세 집단을 균질적 국민으로 개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중국 국민국가 창성의 특수성에 주목할 경우 거기에서부터 ‘문명중국’(캉유웨이, 康有爲), ‘혈통중국’(쑨원, 孫文), ‘계급중국’(마오쩌둥, 毛澤東)이라는 세 개의 모델추출할 수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중국’ 모델이 종언을 고하고 ‘문명중국’ 모델이 부흥했다. 이것은 공자를 핵심으로 하는 유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계급중국’ 모델의 종언과 ‘문명중국’ 모델로의 회귀가 중국 내외적으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문명중국’으로 사(士), 즉 지식인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은 인민의 주변화를 의미한다. 사실상 개혁개방 이후 구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인민에 대한 삼중의 주변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문명중국’의 출현은 어떤 식으로든 인민들에게 민주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의 이런 현실에 비추어볼 때, 현재 중국 지식인들이 가장 크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인민의 주변화가 심해지면서 나타나는 대중민족주의의 강화 현상일 것이다.(졸고, 「현대 중국 민족주의 비판」, 역사비평 2010년 봄호)

다음으로는, ‘문명중국’ 안에 자본과 제국에 대한 대안적 의식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 ‘문명중국’ 또는 ‘문명국가’라는 개념 안에 중국의 봉건과 서양의 근대를 극복할 계기로서의 대안문명을 내포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안에 민(民)과 이(夷)의 자리가 있는지, 자본주의의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고민과 더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포함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 존재 여부는 어찌되었든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동아시아 질서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중국’이 종료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 어떤 식으로든 신사(紳士)와 같은 미묘한 계급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실체로서의 계급이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나 생활수준 같은 것에서 생겨나는 계급화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주의를 거쳤어도 수천 년의 계층적 전통을 지닌 나라에서 그것이 다시 되살아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민두기, 「「중국근대사론Ⅰ」, 지식산업사, 1988) 그러나 문명중국을 유교 그 자체의 회귀로 직결시키는 것은 좀 곤란할 수도 있다. 문명중국이라는 것을 사유방식이나 역사적 전통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천하주의에서의 천하도 가치로서의 천하, 그러니까 도덕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또 여기서 문명중국, 유학, 공자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지금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를 구제할 수 있기 때문에 공자를 박물관에서 다시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 혁명을 포함한 근대성에 내재된 목적론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아리프 딜릭, 「역사와 대립되는 문화인가? : 동아시아 정체성의 정치학」, 『발견으로서의 동아시아』, 문학과지성사, 2000) 그러니까 유교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가치 때문에 그것이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믿고 있던 신념에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전통이 과도하게 과장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것을 인정하고 나서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은 중국의 맥락으로 들어갔을 때 유학에 관한 중국 공산당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국가 시스템체질을 고려할 때 공산당의 정책결정과 그 파급의 범주에서 지식인은 아직까지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진부한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공산당이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는 데, 그리고 자신의 정치문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유학을 단편적으로만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전면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공산당의 의지가 어떻든 중국의 지식인들은, 그들이 진정 현실을 사유한다면 유학이든 공자든 그 부활이 ‘괴물 자본주의’와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유학이 과연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좀 더 디테일한 고민을 진행해야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민들의 생활과 유학의 부활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청화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캐나다 태생의 학자 다니엘 벨(Daniel A. Bell)은 그의 북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사회주의는 다만 사회의 통제 수단으로만 활용되고 있으며 더 이상 중국 정치의 미래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런 진단을 바탕으로 앞으로 20년 내에 중국의 공산당을 의미하는 CCP(Chinese Communist Party)가 중국의 유가 정당을 의미하는 CCP(Chinese Confucian Party)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Daniel A. Bell, China’s New Confucianism: Politics and Everyday Life in a Changing Socie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and Oxford, 2008) 다니엘 벨은 중국의 앞으로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이제 유학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공자와 유교의 부활은 단순히 과거 중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긍정하는 것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중국의 인민과 소수민족의 주변화 문제, 그리고 근대성에 대한 대안 등 현안에 관련해서 말이다. 공자를 현대에 살리기 위해서는, ‘유산’으로서만이 아니라 ‘계획’으로서의 공자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영화 ‘공자’는 이런 점에서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재미가 없더라도 작심하고 봐야겠다. 나는 춘추전국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살았던 한 낯선 외국인으로서 공자를 볼 작정이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인터넷에 돌고 있는 공자가 한국인이라는 주장에 자극받아 중국에서 ‘공자’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온다. 공자를 대상화시켜보는 작업은 그래서 중국인에게는 물론 한국인에게도 역시 필요한 것 같다. 중국, 동아시아인이 공자의 가치관을 집단적으로 내재화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공자를 낯설게 또는 외국인으로 보는 작업은 공자를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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