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구판절판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 문학이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18쪽

칼멘수도원 ~ 못했다.
칼멘수도원의 수녀는 갇혀 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 아니라 바로 자유없는 천사다. 해방전 감옥에는 많은 애국자들이 갇혀 있었다. 그러나 철창도 콘크리트 벽도 어떠한 고문도 자유의 화신인 그들을 타락시키지는 못했다.

거기 조롱속에 ~ 종달새다.
거기 조롱 속에 종달새가 있었다면, 그 울음은 단지 배워서 하는 노래가 아니라 작은 가슴에 뭉쳐 있던 분노와 갈망의 토로였을 것이다. 조롱 속의 새라도 종달새는 종달새다.-26쪽

집에 와서 ~ 서운하다.
집에 왓 꽃 사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꽃병을 보니 미안하다. 그리고 그 꽃 일곱송이는 다 내가 주고 싶어서 주었지만, 장미 한 송이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41쪽

여성의 미는 ~ 구성한다.
여성의 미는 생생한 생명력에서 온다. 맑고 시원한 눈, 낭랑한 음성, 처녀다운 또는 처녀 같은 가벼운 걸음걸이, 민활한 일솜씨, 생에 대한 희망과 환희, 건강한 여인이 발산하는, 특히 젊은 여인이 풍기는 싱싱한 맛,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얼굴에 나타나는 윤기, 분석할 수 없는 생의 약동, 이런 것들이 여성의 미를 구성한다.-43쪽

한 여름 ~ 입을 것이다.
한여름 '나일론' 거리에 문득 하얀 모시 적삼과 파란 모시 치마가 눈에 띈다. 뭇 닭 속에 학을 보는 격이다. 모시는 청초하고 섬세하고 톡톡하고 깔깔하다. 아마 천사도 여름이면 모시를 입을 것이다.
-46쪽

베이스볼 팀의~ .신이 나겠는가?
베이스볼 팀의 외야수와 같이 무대 뒤에 서 있는 콘트라베이스를 나는 좋아한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스케르초(scherzo)의 악장 속에 있는 트리오 섹션에는 둔한 코트라베이스를 쩔쩔매게 하는 빠른 대목이 있다. 나는 이런 유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스 플레이어를 부러워한다.
<전원 교향악> 제3악장에는 농부의 춤과 아?오케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서투른 바순이 제때 나오지 못하고 뒤늦게야 따라 나오는 대목이 몇 번 있다. 이 우스운 음절을 연주할 때의 바순 플레이어의 기쁨을 나는 안다. 팀파니스트가 되는 것도 좋다. 하이든 교향곡 94번의 서두가 연주되는 동안은 카운터 뒤에 있는 약방 주인같이 서 있다가 청중이 경악하도록 갑자기 북을 두들기는 순간이 오면 그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55쪽

도연명의 ~ 지나지 않는다.
도연명의 허실유여한(虛室有餘閑)이라는 시구는 선미(禪味)는 있을지 모르나 아늑한 감이 적다. 물 떠먹는 표주박 하나만 가지고 사는 디오게네스는 아무리 고답한 철학을 탐구한다 하더라도 명상하는 미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화려하여서가 ~ 않을 것이다.
화려하여서가 맛이 아니다. 오래가고 정이 들면 된다. 쓸 수록 길이 들이 길이 들어 윤이 나는 그런 그릇들이 그립다. 운봉칠기, 나주소반, 청도 운문산 오달솥,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 두면 뚜껑에 밥물이 맺히는 안성맞춤 놋주발, 이런 것들조차 없는 집이 많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네 살림살이는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66쪽

맛은 ~ 살아간다.
맛은 감각적이요, 멋은 정서적이다.
맛은 적극적이요, 멋은 은근하다.
맛은 생리를 필요로하고, 멋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
맛은 정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
맛은 그때뿐이요, 멋은 여운이 있다.
맛은 얕고, 멋은 깊다.
맛은 현실적이요, 멋은 이상적이다.
정욕 생활은 맛이요, 플라토닉 사랑은 멋이다.

그러나 맛과 멋은 반대어는 아니다. 사실 그 어원은 같을지도 모른다. 멋있는 것의 반대는 맛없는 것이고, 멋있는 것의 반대는 멋없는 것이지 멋과 맛이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맛과 멋은 리얼과 낭만과 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맛만 있으면 그만인 사람도 있고, 맛이 없더라도 멋만 있으면 사는 사람이 있다.
맛은 몸소 체험을 해야 하지만, 멋은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맛에 지치가 쉬운 나는 멋을 위하여 살아간다.
-71쪽

우리가 제한된 ~ 있는가 한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적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80쪽

일단사 일표음 ~ 불안할 때가 있다.
'일단사 일표음(一簞食一瓢飮, 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막 물)'으로 나는 도를 즐길 수는 없다. 나는 속인이므로 희랍 학자와 같이 자반 한 마리와 빵 한 덩어리로 진리를 탐구하기는 어렵다.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물론 마음의 자유를 천만금에는 아니 팔 것이다. 그러나 용돈과 얼마의 책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여 마음의 자유를 잃을까 불안할 때가 있다.
-84쪽

내가 아까 ~ 생각해 본다.
내가 아까 읽고 있던 노신의 글 <아버지의 병환>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연부인은 경문 사른 재를 종이에 싸서 아버지 손에 쥐어 드리며 나보고 "아버지"하고 불러 드리라고 재촉하였다. "어버지는 이제 숨을 거두실 거다. 어서!" 했다. 나는 "아버지! 어버지!" 소릴 내서 불렀다.
"더 크게, 어서."
"아버지! 어버지!"
평온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되고 눈이 약간 움직이며 괴로워했다.
"아 어서 또, 빨리!"
나는 "아버지!" 또 계속해 불렀다. 최후의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금도 오리려 그때의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문득 그것이 내가 어버지에 대한 최대의 잘못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엄마가 의식이 있어 내가 꼬집는 줄이나 아셨더라면 '나도 마지막 불효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하고 생각해 본다.
-106쪽

나는 남들이 ~ 행복한 부분이다. 안톤슈나크<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나는 남들이 술 마시느라고 없앤 시간, 바둑 두느라고 없앤 시간, 돈을 버느라고 없앤 시간, 모든 시간을 서영이와 이야기하느라고 보낸다. 아마 내가 책과 같이 지낸 시간보다도 서영이와 ƒˆ이 지낸 시간이 더 길었을 거이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내가 산 참된 시간이요,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은 물론, 내 생애에 가장 행복한 부분이다.-115쪽

한편, 과학자에게는 ~ 되기 바란다.
한편, 과학자에게는 철학 공부가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현재 과학은 광맥을 파 들어가는 것과 같이 좁고 깊은 통찰 깊은 통찰은 할 수 있으나 산 전체의 모습을 알기 어렵고 산 아래 멀리 전개되는 평야를 내려가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시간을 아껴 철학과 문학을 읽고, 인정이 있는, 언제나 젊고 언제나 청신한 과학자가 되기 바란다.
-125쪽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추천에 갔다 오려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137쪽

"말은 은이요 ~ 말로 깨어졌다.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침묵은 말의 준비 기간이요, 쉬는 기간이요, 바보들이 체면을 유지하는 기간이다. 좋은 말을 하기에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요,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말은 은같이 명료할 수도 있고 알루미늄같이 가벼울 수도 있다. 침묵은 금같이 참을성 있을 수도 있고 납같이 무겁고 구리같이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금강석 같은 말은 있어도 그렇게 찬찬한 침묵은 있을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말로 이루어지고 말로 깨어졌다.
-205쪽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222쪽

돈화문까지 나오다가 ~ 인식하지 못하였을거다.
돈화문까지 나오다가 꾀꼬리 소리가 한번 더 듣고 싶어서 나는 반도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기다리기도 전에 저 리리 폰스보다 앳되고 더 명쾌한 꾀꼬리 소리가 들려왔다. 리리 폰스는 두 번 앙코르에 응해 주고는 그 다음에는 절을 몇 번씩 하고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의 꾀꼬리는 연달아 울었다. 비는 내리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노란 꾀꼬리는 계속 울었다.
나는 다시 꾀고리 소리를 스무 번이나 더 들었다.
내가 본 무대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아직 오월이 멀었는데 병든 남편은 뻐꾸기 소리가 듣고 싶다고 한다. 아내는 뒷산에 올라가 뻐꾸기 소리를 낸다. 남편은 그 소리를 들으며 운명한다.
폐를 앓는 젊은 시인 키츠는 한밤중에 우짖는 나이팅게일 소리를 들으면서 고통없이 죽는 것은 풍유하리라 하였다.
나는 오월이면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비원에 가겠다.
비원은 창덕궁의 일부로 임금들의 후원이었다. 그러나 실은 후세에 올 나를 위하여 설계되었던 것인가 한다. 광해군은 눈이 혼탁하여 푸른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요. 새소리도 귀담아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숙종같이 어진 임금은 늘 망므이 편치 않아 그 향기로운 풀냄새를 인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237쪽

예전 내 책상 앞에는 ~ . 다시 다가오곤했다.
예전 내 책상 앞에는 날마다 한 장 씩 떼어 버리는 달력이 있었다. 얇은 종잇장이라 금요일이되면 바로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파란 토요일이 비친다. 그러면 나는 금요일을 미리 뜯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희망에 찬 토요일은 다시 다가오곤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 토요일이 있는 것이다.
결혼식을 마치고 퇴장하는 신부의 하얀 드레스는 금방 퇴색이나 된 듯하다. 사실 그 쑥스러운 상견례를 할 때, 그리도 기다렸던 결혼식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허무도 잠깐, 그의 앞에는 새로운 희망이 있다. 행복할 가정, 태어날 아기, 시간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에 인색하지 않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언제나 다음 토요일이 있는 것이다.-242쪽

보스턴 근처에 있는 ~ 영국어머니의 통곡소리
보스턴 근처에 있는 콩코드(Concord)라는 고요한 읍은 미국 독립 전쟁의 발상지다. '콩코드 강'을 사이에 두고 격전이 일어났었다. 여기 하늘을 가리키고 서 있는 뾰족한 기념비는 미국과 독립과 자유의 상징이다. 그리고 애머슨의 <콩코드 찬가>는 숭고한 애국 충정의 표현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자유의 존엄성을 체험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적에 대한 적개심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동정이 깃들어 있다.
또한 감격하게 하는 것은 그 기념비 가까이 놓여 있는 영국 병사들을 위한 조그마한 비석이다. 여기에도 미국 국민의 아량과 인정미가 흐르고 있다. 작은 그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다.

영국 병사의 무덤

그들은 3천 마일을 와 여기서 죽었다.
과거를 옥좌위에 보존하기 위하여
대서양 건너 아니 들리는
그들의 영국 어머니의 통곡소리-258쪽

인생은 사십부터 ~ 늙음도 괜찮다.
"인생은 사삽부터"라는 말을 고쳐서 "인생은 사십까지"라고 하여 어떤 여인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요 사십까지도 아니다. 어느 나이고 다 살 만하다.
백발이 검은 머리만은 못하지만, 물을 들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온아한 데가 있어 좋다. 때로는 위풍과 품위가 있기까지도 하다. 젊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천하고 추한 것이다.
젊어, 정열에다 몸과 마음을 태우는 것과 같이 좋은 게 있으리오마는, 애욕.번뇌.실망에서 해탈되는 것도 적지 않은 축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은 뒤에 맑고 침착한 눈으로 인생을 관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해 넣으면 늙음도 괜찮다.-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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