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주변 사람들에게 중국을 배우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여전히 중국은 별로 매력적인 배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을 가 보면, 적어도 뉴스에서 쏟아지는 기사의 방향을 가늠해보면 중국을 배우지 않는 것은 현재 상황을 무시하는 일일 뿐이다.
나는 어느 강의에서 의도적인 무지, 무시가 함께 작동한다고 말했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면서도, 눈 앞에 수많은 중국인이 오가는데도 중국에 대한 이해는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다수 사람들의 고개는 여전히 우향우 동쪽의 태평양을 동경하고 있다. '미국 어디까지 가 봤니?' 그러나 고개를 왼편으로 돌릴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왼쪽 - 서쪽은 전혀 바라보지 않고 있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중국에 대한 담론, 고민은 매우 일천한 상황이다.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하던 중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본시 글을 쓰다 졸음이 밀려와 책장에 있는 책을 무작정 집어 든 것이었다. 제목은 <중국의 충격>. 2004년 일본에서 발간한 책을 2008년 번역한 거다. 저자의 이름을 보고 무작정 구입해둔 기억이 난다. 10년 만에 읽는 책인 셈. 저자는 미조구찌 유조. 책으로만 읽었지만 깊이 존경하는 학자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혜안이 담긴 책들을 아끼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의 충격'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비단 일본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인은 아직까지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 우월, 중국 = 열등'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인에게 있어서 '중국의 충격'이다. 충격으로 자각되지 않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일본인에게 심각한 것이다. 일찍이 청말의 '서양의 충격'이 '중화=우월, 오랑캐=열등'이라는 낡은 구도에 사로잡힌 중국지식인에게 자각되지 않았었던 것처럼. 정부 당국자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도 둔중한 충격.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일러두자면, 나는 여기에서 '중국 위협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국 위협론'은 첫째, 문제를 배타적인 국민국가의 틀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 둘째, 중국을 국제질서 바깥의 특수 국가로서 전제한다는 점, 셋째, '위협'이라는 발상 자체가 멸시의 반대 개념으로, 이 역시 역사적인 차별구조의 산물이라는 점 등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오히려 나는 지난 세기 이와 같은 편견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충격> 23~24쪽.
여기의 '일본인'을 '한국인'으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꾸어도 될 것이다. 나는 어느 강의에서 중국을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문제'라 했는데, 비슷한 맥락이다. 현재의 중국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관심을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국은 하나의 문제로 육박해오고 있으며, 거꾸로 이는 단기간에 해결되거나 소거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지만 이를 해결하기는커녕,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조차 모르고 있다.
중국은 대국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은 틀렸다고 본다. 중국은 어떤 대국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이 적절할 것이다. 중국은 이미 대국이며, 다만 남은 문제는 어떤 식으로 관계 맺을 것인가의 문제. 여기서 미조구찌 유조는 오랜 역사관을 꺼내는다. 그리고 그 긴 안목 속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보겠다고 한다. 뒤늦게 그의 책을 들춰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 틈틈이 읽어야지.
* 책은 절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