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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처럼 하나님은
도널드 밀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글의 비밀

베스트 셀러라는 책의 뒷 면에 추천글이 줄서서 기다린다. 추천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 추천글을 사람들이 믿을까?’ 사실 나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저 선전을 위해 좋은 말을 늘어놓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결국 추천글을 믿는다. 많이 팔리고 유명한 사람이 추천하는 책을 먼저 집어들게 된다. 심지어 별로 관심이 없는 분야의 책도 추천글이 화려하면 찾아보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름을 지으러 역술인을 찾는 사람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역술인이 믿는 ‘운세’를 믿지 않지만 결국 역술인이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보통 많이 팔리는 책의 저자를 나는 모른다. 그 책을 추천한 사람도 모른다. 추천한 사람이나 작가를 잘 모른다면 나는 왜 그들의 말을 그렇게 잘 믿을까? 그들이 유명하다면 책을 읽기도 전에 그들의 말을 믿어버린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들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들을 믿는게 아닐까? 내 친구는 이런 의심에 힘을 실어준다. 가끔씩 내 글을 읽고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한다. 그들은 나를 잘 모른다. 단지 내 글이 좋기 때문에 칭찬을 하는 것 같다. 반면 오랫동안 사귄 친구는 내 글을 읽어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글을 보여주고 생각을 물어도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 친구는 내 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나는 그가 내 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글을 보는 감각을 기른다면 내 글의 가치가 보일 거라고.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다르다. 친구는 나만큼 글을 보는 눈이 있다. 단지 글의 가치는 그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그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글의 가치는 그에게 달라진다.

베스트셀러의 작가를 잘 알면 그 책의 가치도 달라지지 않을까? 재즈처럼 하나님은 이란 책을 쓴 도널드 밀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명성이 높다. 내가 그를 잘 알아도 명성이 나에게 살아있을까? 이 책을 읽은 사람은 하나같이 칭찬을 늘어놓는다. 나의 이론에 따르면 이런 칭찬은 거리를 전제한다. 독자는 도널드 밀러를 잘 모른다. 그렇다면 그를 잘 안다고 가정하고 책을 읽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둘째 아들 증후군

둘째 아들 증후군은 영성의 형태를 뜻한다. 많은 사람이 따르려고 하는 영성이 있다는 뜻. 그러면 둘째 아들이란 누구인가? 잘 알다시피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다. 재산을 소비해버리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의 은총을 바라게 된다. 자존심, 체면 모조리 버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벌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심정으로.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둘째 아들의 행동을 영성의 모형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서 패턴을 끄집어 낼 수 있다. 먼저 익숙한 환경을 떠난다. 지금과 다른 새 것을 추구하기 위해 떠난다. 다른 곳에서 정말 뭔가를 깨닫는다. 둘째 아들은 다소 부정적인 경험을 했지만 떠남이 반드시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후 예전과 다르게 산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간증은 둘째 아들 증후군과 잘 들어맞는다. 뭔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보고 저렇게 살아봤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등등.. 놀랍게도 도널드 밀러 역시 둘째 아들 증후군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그는 교회 사역자로서 섬기다 점점 답답함을 느낀다. 결국 사역을 잠시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 그랜드 캐년의 멋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등등..

둘째 아들 증후군을 접할 때마다 묘하게 불편하다. 나는 둘째 아들 증후군과 같은 영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뭔가를 깨닫기 위해 떠나지도 않았고 가슴 찡한 경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신앙을 배웠다. 학원에서 수학을 배우듯이. 그런데 교회에서, 선교단체에서 내가 경험한 신앙을 좋게 평하지 않았다. 신앙을 배우고 학습한 신자는 가슴이 냉랭하다. 그들은 교회에 꼬박꼬박 나오지만 열심은 없다는 것. 하지만 둘째 아들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종종 칭찬을 받았다. 간증집회를 하면 둘째 아들 증후군은 단골손님이고 새로 회심한 사람도 주로 둘째 아들 증후군을 따랐다. 심지어 배우고 학습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노련”하다며 아예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둘째 아들 증후군이 모범으로 추천을 받을수록 배우고 학습한 신앙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웃의 쾌락을 내 쾌락처럼 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렇게 살짝 바꿔보자. ‘이웃의 쾌락을 내 쾌락처럼 사랑하라’ 정말 말씀의 뜻이 이렇다면 큰 일이다. 이웃의 쾌락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을 펼 때마다 야식을 시켜놓고 떠들기 시작하는 이웃을 생각해보자. 가끔 이런 사람에게 잠 좀 자자고 호통을 치고 싶다. 그런데 이웃 사랑이 이웃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도널드 밀러는 유티테리언 교회에 가서 매우 평화로운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동성애도 인정하며 여성주의를 외치기도 한다. 밀러는 이것을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그들과 있을 때 오히려 편했다고 한다. 그들은 밀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밀러는 그 교회에 계속 다니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받은 인상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밀러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의 행태를 꼬집는다.

하지만 밀러는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밀러가 불편했을까? 그들이 있는 그대로 남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밀러가 불편했을까? 밀러를 진정 불편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쾌락이다. 밀러가 그들의 쾌락에 초점을 맞췄다면 결국 그들과 험하게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밀러는 이웃의 쾌락을 잠시 제쳐둔다.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당연히 이들과 평화롭게 지내려면 그들의 쾌락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밀러가 동성애를 걸고 넘어졌다면 과연 그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따라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밀러는 지금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의 핵심을 외면하라고 권한다. 동성애자를 사랑하기 위해 동성애를 잠시 제쳐두라. 그러나 동성애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동성애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쾌락이 동성애라면? 유감스럽지만 밀러는 한 발 물러선다. 밀러는 이웃의 쾌락을 내 쾌락처럼 사랑할 수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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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위한 선언 - 백의신서 42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백의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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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하면,,,

철학이 뭔지도 모르고 철학 공부하는 사람 많다. 너무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 수학이 뭔지 모르고 수학 잘하는 사람 많다. 단지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한다. 철학이 뭘까? 더구나 철학자가 어디 한 둘인가. 물리학은 그래도 걸출한 몇 명만 알면 맥을 잡지만 철학은 그렇지 않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속하는 사람만 5명도 넘는다. 거기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까지 합하면 수가 만만치 않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철학자마다 하는 얘기가 조금씩 다르다. 이 사람은 이게 철학이라 하고 저 사람은 .. 등등. 저마다 다르게 철학을 읊조리니 헷갈린다. 철학의 본질이 있기는 있나? 그냥 각 시대에 유명한 사람을 잘 알고 있으면 되는 건가? 또한 철학의 가치도 문제다. 철학이 과연 지식에 도움이 되나.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나? 실제로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물론 선진국은 가르친다고 하더라만] 철학을 배우더라도 지식을 얻지는 못한다. 대체로 철학은 방법, 생각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 같다. 확실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에 그런 냄새가 풍긴다. 반면 실제 지식은 과학이 준다. 그리고 삶의 유용성을 위해서 기술공학이 있다.

정말 곤란하게 됐다. 철학의 본질도 모호하다. 지식을 직접 주지도 않는다. 생활에 도움도 안된다. 한마디로 허무하다. 철학이 정말 이런 것인가? 폼 잡으려고 철학하나? 철학하면 멋지게 보인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 하다. 여기서 여러분이나 나나 용감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철학의 본질과 사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것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철학적 경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우리는 지금의 철학을 평가하는 개념을 하나 얻게 된다. 철학의 사명이나 목적이 모호하게 보인다면 당신은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어떤 철학이 철학의 목적과 사명을 부정하면 당신은 그에 맞서는 철학을 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세운 가정을 통해 비로소 철학을 논할 수 있다. 성서이야기를 보자. 성서는 단순한 사실이라기 보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메타 담론]를 제시한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비로소 우리 자신과 역사를 이해한다. 그게 없으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말을 하나? 막막하기만 하다. 철학의 개념[철학에 대한 메타담론]이 그래서 중요하다.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은 바로 철학의 개념을 위한 책이다. 사실 나도 긴가 민가 하면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나의 기본적인 확신- 철학의 본질이 있다-을 바디우의 책에서 다시 확인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무작정 공부하는데 지친 사람은 꼭 [철학을 위한 선언]을 붙드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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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 9.11과 그에 관련된 날짜에 관한 다섯 가지 논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종주 옮김 / 인간사랑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리뷰를 쓰는 사람은 영화 먼저 보고 친구에게 평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 영화 어떻더라.. 이렇게 한 마디 하면 영화 못본 사람은 영향을 많이 받죠. 보려고 했는데 안 볼 수도 있구요. 기대했는데 실망할 수도 있고,,, 물론 직접 봐야 실체를 알겠지만. 리뷰도 분명 그런 영향을 주지요. 신문에 추천평이 한번 나면 사람들이 그 책을 많이 사보죠. 갑자기 엠비씨의 느낌표가 떠오르네요.

그래서 리뷰를 쓰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네요. 리뷰보고 혹시 책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가지지 않을까..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먼저 번역입니다. 매우 나쁩니다. 원문과 대조하기 전에 한글 문장이 안되는 것도 많습니다. 저는 번역자인 김종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지젝 번역에서 손 떼십시요. 김종주님은 환상의 돌림병도 이미 번역을 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책제목인 환상의 돌림병은 김종주님에게 적용됩니다. 김종주님은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지젝을 제대로 번역하고 있다는 환상' 이것이 바로 환상의 돌림'병'이 아닐까요. 또한 출판사도 책임을 면하기 힘듭니다. 적어도 한글 문장이 안되면 그걸 고쳐서 책을 내야 하지 않을지..

번역이 좋지 않아 감히 책을 사보라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얻을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수능친 고등학생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 마다 '내가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다시 점검받는 기분입니다. 그만큼 짜릿하고 , 얼얼하기도 합니다. 9.11 사건에 대한 당신의 통념을 시험해보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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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운 글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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