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 -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로저 올슨 지음, 박세혁 옮김 / 살림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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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장(market)은 하나님을 좋아해

시장은 참 얄궂다. 우리는 시장을 욕하지만 시장은 우리를 욕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사고가 터져 많은 사람이 직업을 잃었다고해보자. 누구 책임인가? 시장 책임은 아니다. 시장이 처음부터 그런 사고를 계획하지 않았으니까. 시장은 계획하지 않는다. 피해를당한 사람은 우연을 욕할 수 밖에. 하지만 시장은 개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비록 우연히 사고를 당했지만, 개인은 스스로 노력하여어려움을 극복하라. 시장은 우연히 사고를 내서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 당신은 운이 나빴을 따름. 그러니시장을 욕하지 말고, 그 시간에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보라. 너무 멋진 철학이다. 그런가?

재미있게도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을 쓴 로저올슨은 하나님의 성품을 비슷하게 묘사한다. 악한 일이 터졌다. 아니 아주 고약하고견디기 힘든 일이 터졌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 우리가 이렇게 고통당할때. 로저올슨은 일단 하나님이 고약한 일을 계획하지않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어.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지. 즉하나님은 악한 일을 막지 않으셨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 우리가 할 일은 없나? 비록 악한일을 당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 악한 일을 이기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악한 사람을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부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 있다. 움푹 파인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더라도.

여기까지 시장과 하나님은 같다. 하나님도 시장처럼 나쁜 일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난다. 단지 수습이다르다. 시장은 아주 냉정하게 우연을 들이민다. 시장에서 실패했나? 그렇다면 받아들여라. 당신이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시장에서우연히? 재앙이 당신에게 떨어지니까. 시장은 당신에게 무심하다. 당신을 괴롭히지도 위로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당신은 스스로우연을 똑바로 바라보라. 그리고 당신의 운명을 개척하라.

하나님은 시장과 다르게 따뜻하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나님도 이미 고통당한 자니까. 그가 하나님을찾는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만난다. 아마 그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이미 그와 함께 있을지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복지국가의 신이다. 로저올슨은 복지국가가 그리운 모양이다. 시장은 개인이 철저하게 우연과 직면하도록 밀어붙인다. 그러나 하나님은사랑한다. 고통당한 자를 돌보려한다. 복지국가는 개인을 돌본다. 적어도 시장에서 실패했을 때 생활을 보장해준다. 복지국가 덕분에개인은 냉혹한 우연을 조금 견딘다. 하나님은 물론 복지국가보다 더 따스하다. 당장 생활비를 하늘에서 내려주지는 않지만.

시장이 냉정한 아버지라면, 하나님은 엄마같은 아버지다. 그런데 시장과 하나님의 공통점은 계획이 없다는 것. 설계가 없다. 하나님은악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시장도 우연한 파국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여기서 짓궂은 가정을 세워보자. 하나님이 미리계획한다면, 하나님이 계획을 하고, 계획을 밀어붙이고, 심지어 계획이 실패하여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면, 그래도 하나님은계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로저올슨은 이런 하나님을 상당히 두려워한다. 계획하는 하나님은 공산주의자를 닮았다. 혁명가는 계획을세우고 밀어붙였다. 엄청난 파국을 미리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기꺼이 대가를 치를 각오!  공산주의자 하나님은 아무래도북미에서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아무래도 시장을 닮은 하나님이 덜 부담스럽다.


2.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 우리가 나쁘지...

영화 매치 포인트에서 불쌍한? 남자는 겉모습 유지에 정신이 없다. 심지어 겉모습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 도대체무슨 사연일까? 솔직히 이해가 안간다. 아마 여자는 남자 주인공을 패주고 싶을 것이다. 하층계급이지만 명민한 남자는 우연히상류계급의 여자를 만난다. 무슨 인연인지 상류계급 여자는 한눈에 남자에게 반한다. 여자는 몸이 달아 한 걸음에 남자에게 안기고,남자도 여자가 싫지 않은 모양. 이렇게 행복하게 계급갈등은 해소되나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와 행복한 결혼을 시작하면서 다른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여기서 남자는 상류계급의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 아내와 아내의 가족은 남자의 부정을 모른다. 여자의 가족은 더없이화목하다. 장인과 장모까지 남자를 지원한다. 우습게도 남자는 바람피는 여자에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아내와헤어지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그러나 남자는 이상하게도 화목한 가정이란 겉모습에 매달린다. 아내와 아내 가족은 남자의 부정을 모른채 계속 화목해야한다.

겉모습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다 결국 남자는 바람핀 여자를 죽인다. 남자의 세계는 두 개로 쪼개졌다. 한편에 아내가 있다. 여기는모든 일이 형통하고 가정도 화목하다. 하지만 남자의 사생활은 부정과 쾌락, 갈등으로 가득하다. 남자는 은밀한 쾌락을 위한배경으로서 화목한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 내가 즐길 때, 순진하게 속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더없이 순수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사람이 있어야 한다.

로저올슨도 불행한 주인공처럼 화목한 겉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여기에 온갖 죄악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선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악을 계획하지 않았다... 로저올슨이 처음 고민한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그렇게 선하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당할 때 무엇을 하셨나?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고 인간을 사랑한다. 여기서불행한 주인공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주인공은 거짓말을 반복하며 화목한 가정이란 겉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물론 계속 바람을피면서. 로저올슨은 매우 끈질기게 하나님의 선함을 유지하려 한다. 물론 이 땅에 고통은 여전하지만. 누군가 '선한 자'가 있다.


3. 용서하기 쉬운 이유

용서는 사실 쉽다. 역설이지만, 타인을 용서하려는 자는 스스로 용서하려는 자가 되려고 한다. 이것이 함정이다. 용서하는 자에서용서하지 않는 자로 변신해보라. 놀랍게도 쉽게 용서가 된다. 이런 역설은 쏘우라는 영화에 나온다. 로저올슨은 소설 오두막을문화현상으로 중요하게 다루지만, 영화 쏘우는 보지 않은 것 같다. 쏘우에 로저올슨이 고민한 용서의 비법이 숨어있는데.

쏘우 3 (아마도)에서 주인공은 매우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다. 주인공의 딸은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사고의 책임자들(책임이 있다고보이는 자들까지)이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한다. 한 명씩 만날 때마다 주인공에게 기이한 기회가 생긴다. 주인공은 이들을 고문에서구출하거나 죽게 내버려둘 수 있다. 주인공에게 죄인을 구원할 권한이 주어졌다. 주인공은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딸을 죽게 했으니그들도 대가를 치르게 내버려뒀겠지. 주인공이 부닥친 세계는 엄격한 정의와 자비가 실행되는 세상이다. 벌을 받을 자는 벌을받는다. 하지만 피해자가 직접 그들을 구할 수 있다.

놀랍게도 주인공은 사고 책임자가 당하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즉 그들이 벌받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주인공은 결국몇 명을 구해주려 한다. 주인공은 자기의 보복환상을 견딜 수 없었다. 보복환상이 정말 실현되자 주인공은 환상에서 물러난다.피해자가 용서하려고 할 때, 피해자는 보복환상으로 시달린다. 피해자는 은밀히 가해자의 고통을 원한다. 하지만 환상이 정말 현실로나타나선 곤란하다. 피해자는 현실이 된 환상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용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환상이 이렇게 기능한다면, 우리는 로저올슨처럼 생각하기 어렵다. 로저올슨이 제시한 길은 용서에 보탬이 안된다. 예를 들어하나님에게 용서할 힘을 구한다고 해보자. 용서할 힘을 구하는 자는 지금 용서하려는 자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되면 보복환상이더욱 괴롭힐 것이다. 보복환상을 다시 하나님에게 넘기면 어떨까? 하나님이 보복하실 거야! 하지만 인간은 용서해야지. 그러나보복환상에 시달리는 것과 보복을 하나님에게 떠넘기는 것이 그렇게 다른가? 우리 대신 하나님이 보복을 한다면, 보복환상의 주인공이하나님이란 뜻이다. 환상의 주인공만 바뀌었다.


4. 공포가 필요해

로저올슨은 복지국가를 어렴풋이 바라본다.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자. 적어도 시장체제에서 사는 사람에게조금은 위로가 되는 말이다. 그러나 로저올슨은 화목한 겉모습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그래서 시장 신학을 넘지 못한다. 시장은하나님처럼 위로하지 않지만, 하나님처럼 책임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고통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가 모든 것을 바꾸지도 못한다.그렇다면 차라리 복지국가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보복하는 국가를 상상하면 어떨까? 보복하는 하나님을 상상하면 어떨까? 로저올슨은정확히 여기서 상상을 포기한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지 않고, 그를 보복하는 자로 다시 부를 때, 진정한 공포가시작된다. 우리에게 공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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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 성경은 인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데이비드 거쉬 지음, 서원교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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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에게 오래된 고민이 있다. 어떻게 온전한 기독교인이 될까?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속인과 비슷하게 산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비슷한 고백의 기도를 듣는다.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선을 행할 의지는 있으나 행하지 않았다. 혹은 알지만 의지가 약하다. 이런 분열로 기독교인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럼 답은 없을까?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강한 영성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은혜를 받으려면 기도를 열심히 해야겠지. 이렇게 우리는 어렴풋이 연습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즉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영성을 키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재미있게도 입시전문가가 답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 말을 믿기 힘들게다. 일단 그의 말을 보자. 학원 발가벗기기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읽을 만큼 공부에 관심있는 학생이라면 다짐과 실천, 포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하면서 공부해왔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든 학원이든 과외든 수업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공부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분명 신학적 울림이 있다.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의지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다. 학습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공부법을 모른다. 그래서 공부를 못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도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의지가 약해서, 유혹이 강해서, 사탄이 매번 방해하니까. 이것 모두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다. (물론 조금 영향을 주겠지만) 선(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모르므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다. 아주 간단하고 깔끔한 답이 아닐까. 그 비법을 아는 사람은 빨리 가르쳐주세요.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데이비드 거쉬 지음, 살림, 2008)’의 저자도 같은 주장을 한다.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 있다. 선을 “내 것으로” 삼아 늘 실천하라. 그렇게 하려면 선을 “습관”처럼 행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이 내 몸에 들어 앉아야 한다는 것. 습관이 생기려면,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아니다. 연습으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삶을 완성한다.

고루한가?. 그런데 오늘날 이 윤리는 매우 인기가 있다. 여자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이런 책의 저자는 사실 매우 엄격한 규율을 독자에게 권한다. 성공하고 싶은가? 그러면 이 법을 따라라. 그런데 독자는 그 명령을 엄한 규율로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흔쾌하게 명령을 따른다. 저자가 권하는 규율은 자기 규율이다. 즉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하는 규율이다. 예를 들어 집중하라. 계획을 세워라. 자신감을 가져라… 이런 명령은 남이 나에게 강제로 부과한 명령이 아니다. 그래서 독자는 강제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법일 뿐

놀랍게도 기독교에서도 자기-규율은 유행이다. 몇 일전 나는 유명한 교수이자 기독교인의 특강을 들었다. 그 분은 성공비결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너무 간단하고 깔끔해서 따르고 싶었다.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겨라. 5년동안 집중해서 열심히 하라. 그러면 당신은 성공의 길로 들어선다. 비전을 세워라. 목적을 정하라.’ 이 조언은 막연하게 들리지만 자기 삶에 적용하면 매우 강력한 규율이 된다. 비전을 세웠나? 5년동안 집중해서 열심히 일했나? 솔직히 나도 하나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성공을 못했구나!! 하여간 이것도 자기 규율의 윤리다. 내가 나에게 규칙을 부여하고 꾸준히 연습하면, 성공한다. 혹은 행복한 삶을 산다.

어떤 분은 여기서 강하게 반대할 것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핵심을 제대로 봐야 한다. 지금 이 교수는 “성공”이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성공하기 위해 비전을 세워라. 그런 뜻은 아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으로 산다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산다면, 성공은 덤으로 따라온다는 것. 어떤 신학적 이유를 대며 이것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이미 많은 기독교인이 이 주장의 매력을 인정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감과 비전을 갖고 일해서 엄청난 사업을 일으켰다고 하자. 그럼 사장(혹은 CEO)이 기독교 이상인가? 불우한 신체를 타고 났으나 놀라운 정신력으로 세계적 음악가가 되었다. 그럼 세계적 음악가가 기독교 이상인가? 분명 ‘틈’이 있다. 자기 규율의 윤리에 따라 노력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그 성공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기독교 이상에 부합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따라서 다소 묘한 결론이 나온다. 자기 규율의 윤리는 “선악의 너머”에 있다. 그것은 중간에 있다. 그 윤리가 가져오는 결과는 다양하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자기 규율의 윤리는 “성공의 원동력”이다. 과연 기독교인은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보자.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자. 성공하고 싶은가? 이 질문도 불편하다면,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지금 당신 모습을 바꾸고 싶은가? 그러면 자기 규율의 윤리를 실천하라. 당신은 바뀔 것이다.”

누가 이 제안을 물리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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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 - 통념을 깨는 윤리학
이한 지음 / 미토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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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대로 살라고!! 말은 좋지. 세상이 어디 그렇나! 윤리를 입에 올리면 대뜸 이렇게 대꾸한다. 윤리대로 살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윤리대로 사는게 어렵다. 그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왠지 궁색하다. 어떤 규칙을 지키기 어렵다고 해서 그 규칙을 마냥 거부하나? 시험을 잘 치려면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규칙을 지키기 힘들더라도 사람들은 기꺼이 지킨다. 윤리라고 뭐가 다른가. 윤리도 시험 잘 치는 규칙처럼 지키기 어렵다 해도 노력하면 된다.

윤리를 지키기 어렵다고 할 때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 윤리적 삶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을 보니 장애가 무엇인지 알겠다. 먼저 사람들은 ‘사고’하지 않는다. 윤리에 맞는지 제대로 따지지 못한다. 행위의 근거를 대보라고 하면 남한테 들은 이야기를 한다. 또한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분위기가 없다. 대장이 하라는 대로 우루루 따라가는데 혼자 윤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힘들다. 윤리적 사고가 힘을 얻으려면 쓸만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대안이 없어도 윤리적 판단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대안없는 평가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윤리적 판단에 머물지 말고 행할 수 있는 대안까지 주면 많은 사람이 윤리적 사고를 하도록 도울 수 있다.

저자. 세 가지 장애 가운데 두 가지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실제 사례를 하나씩 짚어가며 사람들이 얼마나 사고하지 않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단지 사고하지 않는다고 꾸중하지 않는다. 왜 이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논증한다. 논증을 따라가다 보면 얼마나 사고하지 않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윤리는 힘이 없음을 잘 안다. 그래서 대안까지 제시한다. 특히 징병제와 매춘 문제의 해법을 보라. 저자의 대안에 귀가 저절로 솔깃해진다.

한 가지가 빠져서 안타깝다. 윤리적으로 사고하는 분위기. 이건 저자가 마음대로 만들 수 없다. 사회 분위기가 책 하나로 금방 바뀌나. 그러나 이런 책을 써서 사람들의 생각에 도전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저자는 책을 써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는 셈이다. 이 책이 이미 분위기 만들기에 한 몫한다. 이렇게 저자는 세 가지 장애를 훌륭히 치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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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복제한다면
알린 주디스 클로츠코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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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부모가 태아라면..

복제 윤리를 다루기 위해 먼저 무엇을 물어야 할까?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한다. "당신이 복제되었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은 복제품이다. 그런데 당신 부모가 낙태된 태아라면 어떨까?" 이 질문은 상당히 뜻깊다. 보통 복제 윤리를 따질 때 나를 쏙 빼놓고 질문을 한다. 복제 아이를 입양했다면? 이런 질문도 어디까지나 나는 복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내가 복제 인간이라면 어떨까? 그 때 기분이 어떨까? 특히 내 부모가 사실 낙태된 태아라면? 낙태시킨 태아의 세포핵을 사용하여 나를 만들었다면?

보통 영화를 보면 부모를 모르는 아이는 늘 부모를 찾는다. A.I 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요정을 찾아나선다. 복제인간 역시 나중에 부모를 찾을지 모른다. 그가 우리처럼 교육을 받고 자란다면 자연스레 부모가 누구인지 물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복제인간에게 탄생의 비밀을 말할 수 있을까? 탄생 이야기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탄생 이야기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그것이 하나 밖에 없는 정답은 아니지만. 

우리가 복제인간을 우리와 똑같이 키운다면 복제인간도 탄생이야기를 궁금해할 것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요? 그런데 복제인간은 우리와 같은 탄생 이야기를 가지기 힘들다. 어떤 복제인간은 아버지/어머니가 없으며 다른 복제인간은 갓난 아이가 부모이다. 이럴 때 그들은 탄생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일까? 아니면 정체성에 손상을 입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양된 사람을 잠시 생각해보자. 그들은 유별난 탄생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그렇다면 복제인간도 이런 상처를 받기 쉽겠다. 내가 복제인간이라고 상상해보면 과연 나는 나의 탄생이야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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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처럼 하나님은
도널드 밀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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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의 비밀

베스트 셀러라는 책의 뒷 면에 추천글이 줄서서 기다린다. 추천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 추천글을 사람들이 믿을까?’ 사실 나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저 선전을 위해 좋은 말을 늘어놓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결국 추천글을 믿는다. 많이 팔리고 유명한 사람이 추천하는 책을 먼저 집어들게 된다. 심지어 별로 관심이 없는 분야의 책도 추천글이 화려하면 찾아보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름을 지으러 역술인을 찾는 사람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역술인이 믿는 ‘운세’를 믿지 않지만 결국 역술인이 말하는 대로 행동한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보통 많이 팔리는 책의 저자를 나는 모른다. 그 책을 추천한 사람도 모른다. 추천한 사람이나 작가를 잘 모른다면 나는 왜 그들의 말을 그렇게 잘 믿을까? 그들이 유명하다면 책을 읽기도 전에 그들의 말을 믿어버린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들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들을 믿는게 아닐까? 내 친구는 이런 의심에 힘을 실어준다. 가끔씩 내 글을 읽고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한다. 그들은 나를 잘 모른다. 단지 내 글이 좋기 때문에 칭찬을 하는 것 같다. 반면 오랫동안 사귄 친구는 내 글을 읽어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글을 보여주고 생각을 물어도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 친구는 내 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나는 그가 내 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글을 보는 감각을 기른다면 내 글의 가치가 보일 거라고.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다르다. 친구는 나만큼 글을 보는 눈이 있다. 단지 글의 가치는 그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그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글의 가치는 그에게 달라진다.

베스트셀러의 작가를 잘 알면 그 책의 가치도 달라지지 않을까? 재즈처럼 하나님은 이란 책을 쓴 도널드 밀러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명성이 높다. 내가 그를 잘 알아도 명성이 나에게 살아있을까? 이 책을 읽은 사람은 하나같이 칭찬을 늘어놓는다. 나의 이론에 따르면 이런 칭찬은 거리를 전제한다. 독자는 도널드 밀러를 잘 모른다. 그렇다면 그를 잘 안다고 가정하고 책을 읽어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둘째 아들 증후군

둘째 아들 증후군은 영성의 형태를 뜻한다. 많은 사람이 따르려고 하는 영성이 있다는 뜻. 그러면 둘째 아들이란 누구인가? 잘 알다시피 누가복음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방탕한 생활을 한다. 재산을 소비해버리고 비참한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의 은총을 바라게 된다. 자존심, 체면 모조리 버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벌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심정으로.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한다. 둘째 아들의 행동을 영성의 모형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서 패턴을 끄집어 낼 수 있다. 먼저 익숙한 환경을 떠난다. 지금과 다른 새 것을 추구하기 위해 떠난다. 다른 곳에서 정말 뭔가를 깨닫는다. 둘째 아들은 다소 부정적인 경험을 했지만 떠남이 반드시 부정적일 필요는 없다.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후 예전과 다르게 산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간증은 둘째 아들 증후군과 잘 들어맞는다. 뭔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보고 저렇게 살아봤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등등.. 놀랍게도 도널드 밀러 역시 둘째 아들 증후군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그는 교회 사역자로서 섬기다 점점 답답함을 느낀다. 결국 사역을 잠시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 그랜드 캐년의 멋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등등..

둘째 아들 증후군을 접할 때마다 묘하게 불편하다. 나는 둘째 아들 증후군과 같은 영성을 경험하지 않았다. 뭔가를 깨닫기 위해 떠나지도 않았고 가슴 찡한 경험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신앙을 배웠다. 학원에서 수학을 배우듯이. 그런데 교회에서, 선교단체에서 내가 경험한 신앙을 좋게 평하지 않았다. 신앙을 배우고 학습한 신자는 가슴이 냉랭하다. 그들은 교회에 꼬박꼬박 나오지만 열심은 없다는 것. 하지만 둘째 아들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종종 칭찬을 받았다. 간증집회를 하면 둘째 아들 증후군은 단골손님이고 새로 회심한 사람도 주로 둘째 아들 증후군을 따랐다. 심지어 배우고 학습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노련”하다며 아예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둘째 아들 증후군이 모범으로 추천을 받을수록 배우고 학습한 신앙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웃의 쾌락을 내 쾌락처럼 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렇게 살짝 바꿔보자. ‘이웃의 쾌락을 내 쾌락처럼 사랑하라’ 정말 말씀의 뜻이 이렇다면 큰 일이다. 이웃의 쾌락만큼 짜증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을 펼 때마다 야식을 시켜놓고 떠들기 시작하는 이웃을 생각해보자. 가끔 이런 사람에게 잠 좀 자자고 호통을 치고 싶다. 그런데 이웃 사랑이 이웃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도널드 밀러는 유티테리언 교회에 가서 매우 평화로운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동성애도 인정하며 여성주의를 외치기도 한다. 밀러는 이것을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그들과 있을 때 오히려 편했다고 한다. 그들은 밀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았다. 밀러는 그 교회에 계속 다니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받은 인상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밀러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의 행태를 꼬집는다.

하지만 밀러는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밀러가 불편했을까? 그들이 있는 그대로 남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밀러가 불편했을까? 밀러를 진정 불편하게 만든 것은 그들의 쾌락이다. 밀러가 그들의 쾌락에 초점을 맞췄다면 결국 그들과 험하게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밀러는 이웃의 쾌락을 잠시 제쳐둔다.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당연히 이들과 평화롭게 지내려면 그들의 쾌락을 논하지 말아야 한다. 밀러가 동성애를 걸고 넘어졌다면 과연 그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까? 따라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밀러는 지금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의 핵심을 외면하라고 권한다. 동성애자를 사랑하기 위해 동성애를 잠시 제쳐두라. 그러나 동성애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동성애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쾌락이 동성애라면? 유감스럽지만 밀러는 한 발 물러선다. 밀러는 이웃의 쾌락을 내 쾌락처럼 사랑할 수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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