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 성경은 인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데이비드 거쉬 지음, 서원교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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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에게 오래된 고민이 있다. 어떻게 온전한 기독교인이 될까?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속인과 비슷하게 산다. 그래서 일요일마다 비슷한 고백의 기도를 듣는다.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선을 행할 의지는 있으나 행하지 않았다. 혹은 알지만 의지가 약하다. 이런 분열로 기독교인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럼 답은 없을까?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강한 영성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은혜를 받으려면 기도를 열심히 해야겠지. 이렇게 우리는 어렴풋이 연습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즉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영성을 키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재미있게도 입시전문가가 답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 말을 믿기 힘들게다. 일단 그의 말을 보자. 학원 발가벗기기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을 읽을 만큼 공부에 관심있는 학생이라면 다짐과 실천, 포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하면서 공부해왔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든 학원이든 과외든 수업의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공부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분명 신학적 울림이 있다. 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의지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다. 학습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공부법을 모른다. 그래서 공부를 못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도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겠다. 의지가 약해서, 유혹이 강해서, 사탄이 매번 방해하니까. 이것 모두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다. (물론 조금 영향을 주겠지만) 선(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모르므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다. 아주 간단하고 깔끔한 답이 아닐까. 그 비법을 아는 사람은 빨리 가르쳐주세요.

‘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인(데이비드 거쉬 지음, 살림, 2008)’의 저자도 같은 주장을 한다.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 있다. 선을 “내 것으로” 삼아 늘 실천하라. 그렇게 하려면 선을 “습관”처럼 행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이 내 몸에 들어 앉아야 한다는 것. 습관이 생기려면,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아니다. 연습으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삶을 완성한다.

고루한가?. 그런데 오늘날 이 윤리는 매우 인기가 있다. 여자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이런 책의 저자는 사실 매우 엄격한 규율을 독자에게 권한다. 성공하고 싶은가? 그러면 이 법을 따라라. 그런데 독자는 그 명령을 엄한 규율로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흔쾌하게 명령을 따른다. 저자가 권하는 규율은 자기 규율이다. 즉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하는 규율이다. 예를 들어 집중하라. 계획을 세워라. 자신감을 가져라… 이런 명령은 남이 나에게 강제로 부과한 명령이 아니다. 그래서 독자는 강제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법일 뿐

놀랍게도 기독교에서도 자기-규율은 유행이다. 몇 일전 나는 유명한 교수이자 기독교인의 특강을 들었다. 그 분은 성공비결을 간단하게 요약했다. 너무 간단하고 깔끔해서 따르고 싶었다.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겨라. 5년동안 집중해서 열심히 하라. 그러면 당신은 성공의 길로 들어선다. 비전을 세워라. 목적을 정하라.’ 이 조언은 막연하게 들리지만 자기 삶에 적용하면 매우 강력한 규율이 된다. 비전을 세웠나? 5년동안 집중해서 열심히 일했나? 솔직히 나도 하나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성공을 못했구나!! 하여간 이것도 자기 규율의 윤리다. 내가 나에게 규칙을 부여하고 꾸준히 연습하면, 성공한다. 혹은 행복한 삶을 산다.

어떤 분은 여기서 강하게 반대할 것이다.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핵심을 제대로 봐야 한다. 지금 이 교수는 “성공”이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성공하기 위해 비전을 세워라. 그런 뜻은 아니다. 당신이 기독교인으로 산다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산다면, 성공은 덤으로 따라온다는 것. 어떤 신학적 이유를 대며 이것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이미 많은 기독교인이 이 주장의 매력을 인정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감과 비전을 갖고 일해서 엄청난 사업을 일으켰다고 하자. 그럼 사장(혹은 CEO)이 기독교 이상인가? 불우한 신체를 타고 났으나 놀라운 정신력으로 세계적 음악가가 되었다. 그럼 세계적 음악가가 기독교 이상인가? 분명 ‘틈’이 있다. 자기 규율의 윤리에 따라 노력했을 때, 성공할 수 있다. 그 성공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기독교 이상에 부합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따라서 다소 묘한 결론이 나온다. 자기 규율의 윤리는 “선악의 너머”에 있다. 그것은 중간에 있다. 그 윤리가 가져오는 결과는 다양하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자기 규율의 윤리는 “성공의 원동력”이다. 과연 기독교인은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렇게 물어보자.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자. 성공하고 싶은가? 이 질문도 불편하다면,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지금 당신 모습을 바꾸고 싶은가? 그러면 자기 규율의 윤리를 실천하라. 당신은 바뀔 것이다.”

누가 이 제안을 물리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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