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원고를 펑크냈다. 얼마 뒤 나올 모 계간지에 '장르소설'에 대한 가벼운 글을 하나 써주기로 했는데, ........결국은 못쓰고 말았다. (*** 담당자님껜 정말 죄송.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진짜 죽고 싶다. ㅠ.ㅠ)
지난 주말 내내, 약속도 안 잡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도 쓸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개요가 떠오르고 필이 딱 꽂혀야 글을 쓸 수 있는 타입, 한번 감이 안 오면 절대로 풀리지가 않는다. 그럴 땐 억지로라도 자리에 앉아서 끄적끄적 썼다 지웠다 해야 실마리가 보이는데, 이번엔 정말 써지지가 않더라. 청탁 받았을 때 바로 처리할걸, 너무 오래 묵혀두었던 탓도 있다.
원고의 주제는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어떤 경로를 통해 내게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SF/판타지/추리 소설을 몹시 좋아한다. 좋아하는 이유? 재미있으니까, 라고 답하면 무성의할까. 근데 그 이상의 답이 없다. 나는 그런 종류의 책들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는다. 대략 어느 시점부터인지는 기억나지만.
추리소설이 제일 먼저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주 얇은 문고본으로 나온 홈즈 시리즈가 있었다. 기억에 검은색 표지였던 거 같은데, 우리 집엔 없었고 친구네 집에 있어서 놀러갈 때마다 빌려서 열심히 읽곤 했다. 중학교 때는 단연 애거서 크리스티였다. 동네 상가 대여점에서 300원에 한권씩 빌려 읽었는데 빨간색 해문판 80권을 다 읽었을 때의 희열이란! (그시절 띄엄띄엄 골라 읽었던 자유추리문고가 훗날 이렇게 희귀해질줄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챙겨 읽었을텐데. ㅠ.ㅠ)
판타지를 만난 건 대학 때였다. 대학교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도서관 서가를 뒤지던 나는 정말 우연히 <반지 전쟁>(예문판 3권짜리)을 발견했다. 톨킨이 누군지 이게 무슨 책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읽었고, 너무도 당연하게 단숨에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SF가 제일 늦게 왔다. 읽기는 <파운데이션>, <로봇>, <듄> 시리즈를 먼저 읽었는데 진심으로 SF에 매료된 건 도솔에서 나온 SF 단편집 2권을 읽으면서였다. 흔히 SF의 세계를 처음 접한 독자들의 감정을 '경이감(Sense of Wonder)'라고 표현하는데, 진짜 그당시 내 감정이 딱 그랬다. 그 책을 읽고 아, 이런 종류의 소설도 있을 수 있구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기분. 그때부터 한권 한권씩 닥치는 대로 사서 읽으면서, 열악한 SF 출판 환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누가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하면 화를 내는 평범한 SF 팬이 되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내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사랑하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 (음, 사실 설명 가능한-짐작가는 부분이 있긴 한데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쓸 기회가 있을듯.) 아, 사실 진짜 좋아하는 거에 대해선 뭐라 말을 보태기가 너무 어렵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그저 그 사람 이름만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 아무 생각 안나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원고를 못썼다고 애써 자위해본다. 변명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