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aire > '발리에서 생긴 일'과 그람시

'발리에서 생긴 일'....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는, 나의 주말 드라마다. 처음에는 네 사람의 심리게임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서 보다가, 요즘에는 '어, 이거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인걸'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감탄하게 하는 대목의 시작은, 일전에 스밀라 님도 메모한 적이 있는 그 대사로부터 출발한다. "니들, 이뻐, 너무 이뻐..." 하는 강인욱(소지섭)의 대사.

강인욱이 이쁘다고 말한 것은, 그 아이들(노래방 도우미 하는 조연 여자애와, 이수정이라는 이름으로 분하고 있는 하지원)의 외모가 아닐 것이다. 그 아이들의 처절한 삶의 투쟁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것은 강인욱에게, 어쩌면 현실감 있는 계급투쟁으로서의 진실한 무게감을 던졌을 터이다.

이후 드라마는 단순한 '사랑의 삼각관계' 드라마라는 트렌디 성격을 넘어서서, 이 사회에서 아직도 건장한, 영원히 건장할 '계급'의 문제로 육박해가는 듯하다. 네 명의 인물군은, 각 계급을 상징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계급에 위치한 두 남녀, 중간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남자, 하위계급의 두 여자... 이 중 가장 복잡한 심리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강인욱이다. 그는 아래와 위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는 자답게 들끓는 욕망의 기제 속에 내던져진 지식인의 형상을 표상하고 있다. 그래선지 사랑 앞에서도, 권력 앞에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지키며, 재는 것도 많다. 그리고 극중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예진이 연기하고 있는 재벌그룹가 딸의 심리상태도 단순히 '이기적'이라고만 매도하기에는 복잡한 데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정재민과 이수정으로 분하고 있는 조인성과 하지원의 캐릭터는 단순 명료하다. 그들은 자기 현실만을 느끼고, 그 현실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순수하다.

드라마는 이렇게 다른 계급의 남녀들의 사랑이 얽히는 구도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지만, 아직 사랑에는 '계급'이라는 무서운 장벽이 남아 있음을, 서늘하게 가르쳐주는 의미심장한 드라마, 그런 드라마답게 이 드라마는 과감하게 이런 대사를 표면에 내민다.

"그람시라고 알아?" 그람시... '헤게모니'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 막시즘을 잘 해석한 정치사상가라고 하는 그... 위의 대사를 하면서 드라마는 그람시의 '옥중수고1(정치편)'를 버젓이 클로즈업하고 있다. 극중의 이수정은 이 책을 강인욱에게 빌려받고, 그 책을 읽은 덕분인지 나중에는 정재민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당신의 헤게모니가 내게 주제파악을 하게 해주었어요..." (정확한 대사는 아님)

찌르르... 전기가 통해왔다. 하지원이 어떤 계급을 선택할지, 혹은 하지원이 이재민과 강인욱이라는 두 계급 모두의 위선을 시원하게 벗겨내줄지... 자못 기대된다. 그리고, 나도 여태 이름만 들어본 그람시의 책을 숙독해야겠다, 많이 늦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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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 2004-02-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 딱 1회 놓쳤을 뿐인데, 그때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나오고, "당신의 헤게모니가 내게 주제파악을 하게 해주었어요" 이런 대사가 등장했다니.. (그러는 거 아니야~.)

<발리에서 생긴 일>에 내가 주목했던 첫번째 이유는 하지원의 그 가난하지만 건강한 '삶의 의지' 때문이었다. 발리에서 정재민 가이드 노릇할 때 부러진 굽을, 딱!딱! 시멘트 바닥에 내치며 구두를 수리하던 모습. 호텔 방에서 정재민이 던지는 돈을 꼭 받아쥐고 "할래?" 하던 그 생존능력 때문이었다.

그 후로, 드라마는 약간 오래 지지부진 하였으나 예쁜 하지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게다가!!!! 나는 이 드라마에서 '소지섭'의 진가를 재발견 했던 것이다. 소지섭은, 그냥 그저 그런 배우이기엔 너무 아까웠고, 그저그런 표정보다는 완벽하게 처량맞은 지식인의 고뇌를 보여주었고, 그리고 인정욕구에 시달리는 잘 나가는 샐러리맨의 자기 긍정과 그러나 늘 자신의 계급성을 환기시켜 주는 누추한 집과 어머니 때문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져야 하는 시지푸스의 고뇌를 여실히.. 여실히 표현했던 것이다.

소지섭을 재발견한 것, 그리고 재벌 2세의 옷차림을 괜찮게 표현하는(그의 옷입는 스타~일을 보면, 눈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 조인성의 모던 룩 때문에, 나는 이 드라마를 챙겨본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한 회 빼먹은 사이에 그람시니, '헤게모니'니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니, 간뎅이가 부어도 무시무시하게 부은 극작가에게, 이제서야 관심이 쏠린다.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digitalwave 2004-02-1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답답해 하면서도 주말에는 발리를 보는 편이죠. 뭐... 어차피 나돌아다니는 걸 안 좋아하는지라(특히나 주말에는 더더욱) 그 시간에 못 볼 이유가 없기도 하고...
발리를 보면서 느낀 건 참 대사들이 없다는 건데요. 그래서 그런지 딴짓거리 하면서 귀로만 드라마를 흘려듣기가 좀 힘든 편이라는 거네요.
아... 그람시, 헤게모니... 근데 이건 저도 못 봤네요... 꼭 중요한 건 못 챙겨지더라... -.-;

Fithele 2004-02-19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엄청 운좋은 사람이었군요 ^^;; 전 그람시 나오는 편만 어쩌다 보니 보았는데...

zooey 2004-02-22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누구냐면 '김기호'래. 알잖아. 전에 우리가 이메일 인터뷰했던. 으, 그때의 악몽이.; (작품: 천년지애, 별은 내 가슴에, 복수혈전, 내일을 향해 쏴라, 햇빛속으로, 뜨거운 것이 좋아, 위기의 남자 - sbs 홈피 참조.) 이 작가 극본이 좀 유치한듯 해도 확실히 잡아끄는 뭔가가 있긴 하더라고. 나야말로 발리를 본 건 최근부턴데, 흔한 트렌디물의 외양을 지니고 있되 그 안에 놓인 캐릭터들이 조금조금씩 비틀려 있는게 썩 재미있더라고. 그리고 순간순간 젊은 배우들이 내뿜는 감정이 '진짜'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확실히 대사도 없고 시퀀스 자체가 적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입하게 되는. 인상적인 드라마. 에, 다들 조인성에 올인하던데 나도 소지섭쪽이 더 좋아. (근데 조인성 옷 예술로 잘입고 나오대.) 조인성 연기는 사실 피아노 때랑 비슷한 거 같고, 하지원은 예전엔 싫어했는데 다모 이후로 점점 더 좋아지고 있음. 요즘엔 인내심이 없어져서 아무리 재밌어도 50분 동안 앉아서 한 프로그램 못 보는데, 발리는 진작부터 볼 걸하고 아쉬워 하고 있음. 여튼 TV 드라마에 그람시가 나오다니. 진짜 놀랍지 않아? 내가 그람시 기획을 해야 한다고 했잖아~ ^^
* 아, 그리고 성혜씨. 꽃보다 아름다워도 지난주에 봤는데 좋더라. 하지만 시청률 안 나오는 이유도 알겠더라. 너무 삶에 가까운 느낌이라 보는게 힘겨워. 쉬고 싶은 모양. 흐흐.

skytosea 2004-02-20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 꽃보다 아름다워는 너무 적나라하다고나 할까...ㅡ.ㅡ;; 그래서 나두 보다 보면 좀 불편해지는 느낌이랄까.... 드라마는 조금은 과장된 면과 오버하는 느낌이 있는게 좋더라...
하여튼 나두 발리는 즐겨봄... 근데 그람시가 언제 나왔대??? 그 편만 안봤나부다...ㅜㅜ

zooey 2004-03-1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리는 이러저러하게 잘 끝났고. 사실 위의 말 하고 나서 바로 다음부터 '꽃보다 아름다워'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아, 정말이지 노희경의 대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