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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 무라카미 류의 요리와 여자 이야기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읽고싶은 때가 있다. 그것은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소설의 묘한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시니컬한 일본 소설을 읽고싶은 생각에 서점에 들렀다가 집어올린 것이 바로 <달콤한 악마가 내 안에 들어왔다>.
같은 일본작가 하루키의 인간형과 류의 인간형과는 천지차이를 보인다. 분명 작가의 캐릭터가 소설의 캐릭터로 투영되는 것이 틀림없는 이 차이점이란 것은 소설의 스타일과 줄거리마저 바꾸는 힘이 있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외롭고, 재즈를 들으며, 양사나이를 만나도 놀라지 않을 그런 내성적인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무라카미 류의 남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마약을 하고, 여자를 탐닉하고,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쾌락에 몸을 맡기는 외향적이고 화려한 양/아/치들인 것이다. Livin' La Vida Loca!
<달콤한 악마가 내 안에 들어왔다>를 읽으면 바로 이런 무라카미 류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 그는 매력적인 여자들에게 유혹당하며,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들을 온몸의 세포로 먹으며, 전세계의 훌륭한 호텔을 떠돌아다닌다. 다분히 작가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그래서 읽고나서 이 책이 소설이었는지 에세이였는지도 헷갈리게 만드는 그런 캐릭터다.
소설가에 영화감독에 세계미식가협회의 임원이라는 초강력낭비남 류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 경제의 엄청난 거품시절에 해외에서 많은 돈을 낭비했다고. 그러나 거품이 가라앉고 일본 경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지금, 자긴 아직도 그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매일 호화로운 호텔에 머물렀고, 별 세 개짜리 레스토랑을 수도 없이 제패하고, 이동할 때는 헬리콥터를 이용할 정도로.
그리고 그는 말한다. `돈은, 써버리면, 거품 따위 일어날 수 없다. 더 벌자, 더 저축하자, 라는 서글픈 농경민적 가치관이 거품경제와 디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렵민은 낭비 밖에 모른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낭비는 미덕인 것이다.'라고. 과연... 비틀린 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예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가 뭔 짓을 하든 그걸 행복해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데야 무슨 할말이 있냐 말이다.
암튼 그의 낭비생활 와중에 씌여졌다는 이 책에는 `무라카미 류의 요리와 여자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역시 먹는 것을 인생에서 무지하게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나인지라 23개의 에피소드들을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다. 거기 나오는 요리들은 트뤼프나 캐비아 같이 유명한 것들 말고도 듣도보도 못한 것들도 많고, 그 속의 사람들은 요리와 결부되어 떠오르는 인생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음식을 먹을 때의 순간을 묘사하는 그의 이미지이다.
`처음에 먹은 대합 수프의 따스함은 몸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백포도주와 게로 차가워진 내장의 감각 때문에, 나는 점점 사치스런 결핍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가운 게살은 침묵을 강요한다...'
차가운 게살은 침묵을 강요한다... 뭔가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 든다. 그 게살을 나도 내 혀에 얹고 목구멍에 넣어서 그 감각을 느끼고 싶다. 내 몸의 세포들에게 그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고 싶다. 머나먼 곳의 조용히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공기를 조용히 뒤흔드는 어떤 매력적인 남자와 함께 와인잔을 부딪히고 싶다....
암튼 미국이나 코트다쥐르에 갈 일이 있으면 이 책을 쥐고 비행기에 오르고 싶다. 뉴욕에 있다는 차이나카페도 가보고 싶고, 입 안에서 녹아서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는 코트다쥐르의 무스 쇼콜라도 먹어보고 싶다. 오감이 녹아드는 것 같은 쾌락은 죄악에 가까울까? 그렇담 기꺼이 죄를 지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