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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비 ㅣ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당신이 살릴 수 있는 한 생명이 있다. 당신이 스스로 당신의 손가락을 잘라내기만 한다면. 혹은 당신의 남편이. 당신은 손가락을 자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먼저 돌아오는 대답은 ‘그 생명이 누구냐에 따라’라는 유보적인 가정이었다. 그 생명이 내가 사랑하는,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면, 생판 모르는 남이라면 나는 내 손가락을 스스로 잘라낼 영웅적인 용기를 차마 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일에 주저하여 내 남편이 자기 손가락을 잘라내려 한다고 해도 나는 필사적으로 말릴 것이다. 그로 인해 남은 날들 동안 그 생명의 무게에 끝없이 짓눌린다 해도, “당신은 언젠가 킹스턴 어폰 템스에서 일어나 당신이 손가락 이상의 것을 잃어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라는 뼈아픈 회한과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릴지라도. 그것이 영웅이 아닌, 자기중심주의에 절어 있는 나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새라는 영웅이었다. 목숨을 위협받는 나이지리아 흑인 소녀 자매, 리틀비와 카인드니스가 손가락을 내어주고 살릴 수 있는 생명으로 갑자기 나타났을 때 새라는 주저 없이 자기 손가락을 날카로운 칼로 내리친다. 그녀가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종용했음에도 남편 앤드루는 끝내 잘라내지 못한 그 손가락을.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새라는 자르고 앤드루는 자르지 못한 손가락 때문에 카인드니스는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리틀비는 언제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불안한 생명을 연장한다. 새라와 앤드루가 봉합하려 했던 그들 사이의 틈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그 기억을 묻기 위해, 혹은 극복하기 위해 각자 자신만의 고독한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므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니까.
그렇다면 리틀비와 카인드니스, 새라와 앤드루는 그날 그곳에서 어떻게 만났을까.
리틀비와 카인드니스는 그들이 목격하지 말았어야 할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누구나 알아야 하지만 무참하게 자행되고 은밀하게 은폐되는 강자들의 만행, 그 ‘불편한 진실’을. 자매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초록 무성한 밀림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고향 땅 아래에 누구나 탐욕스럽게 욕심 부리는 유전이 있는 줄도 모른 채 평화로운 일상을 평범하게 이어 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유전에 대한 이권 다툼이 벌어지고 참혹한 살인으로 그들의 느긋한 일상, 가족의 목숨, 고향, 이름, 꿈, 삶, 미래조차 삽시간에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새라와 앤드루가 그 비극적인 참극이 벌어지는 현장에 끼어들게 된 것은 그들이 하필이면 나이지리아행 휴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먼저 그들은 비공식적으로는 위험천만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안전한 나이지리아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흔하지만 안전한 휴가지 대신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독특한 휴가지로 여행을 떠나려는 오만한 만용을 부렸다.
그날 그 고요한 해변에서 그들은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마을에서 자행된 살인 현장을 목격한 눈과 그것을 말할 입을 영원히 없애기 위해 자신들을 죽이려는 추격자를 피해 그 해변까지 도망친 나이지리아인 자매와, 균열이 가기 시작한 부부 사이를 회복하기 위해 그 해변까지 여행을 떠나온 영국인 부부는 그렇게 자기 목숨을 맡기고 그 목숨을 구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관계로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새라의 손가락 하나로 엇갈린다.
리틀비가 혼자 난민으로 앤드루 앞에 나타났을 때 앤드루는 깊이 절망한다. 그날 그 해변에서 손가락을 잘랐어도 두 소녀 모두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손가락을 자르지 못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자책감과 죄의식을 다독여온 앤드루에게 리틀비의 생존은 너무나 자명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카인드니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그러나 살리지 못했다는 끔찍한 자괴감, 그날 이후 또 다른 리틀비 자매를 구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준비해 왔지만 그것 또한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돌연한 깨달음, 그리고 자신도 더는 살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
새라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한 번 살린 적 있는 리틀비를 영원히 구하기 위해 수많은 리틀비의 이야기를 모으는 앤드루의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서 비로소 앤드루를 이해하고 화해한다. 하지만 리틀비는? 진짜 박해에는 눈감고 거짓 평화와 안전을 들이미는 온 세계가 외면한 여린 소녀 하나를 지켜내는 일은 불가능한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수많은 리틀비들의 이야기는 누구도 외면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힘센 진실이 되어 소녀 한 명을 넘어 무수한 삶을 구할 것이다. 리틀비와 카인드니스가 빼앗긴 진짜 이름은 우도(“평화”)와 느키루카(“찬란한 미래”)다(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들이 빼앗긴 평화와 찬란한 미래를 되찾을 수 있도록, 그 이야기들은 손가락을 잘라내지 못하는 우리가 잊지 않고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