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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바둑돌에 영혼을 담아 서로를 읽는 쳰훵 광장은 샨 사의 머릿속 상상 공간이라고 한다. 천 갈래 바람이 일출을 기다리고 눈사람처럼 새하얀 서리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최소한의 미동과 최대한의 집중으로 바둑을 둔다. 바람이 몰려다니는 소리와 화강암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내려놓는 소리가 샨 사의 『바둑 두는 여자』 갈피갈피마다 선명하게, 그리고 청명하게 맴도는 듯하다. 이 매혹적인 공간에 중국인 소녀가 가로 열아홉 줄과 세로 열아홉 줄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점 361개를 품은 정사각형 바둑판을 앞에 둔 채 침묵 속에서 자신의 운명과 대국한다. 그 운명 속에 일본인 장교가 성큼 들어와 마주 앉아서 흑돌과 백돌로 그들의 운명을 그린다.
『바둑 두는 여자』는 20세기 초 일본이 한반도를 짓밟고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에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던 시절, 침략당한 중국인 소녀와 침략한 일본인 장교의 시선으로 번갈아 전개된다. 마치 중국인 소녀가 바둑을 한 수 두면 일본인 장교가 그에 맞서 한 수 두듯이. 좀처럼 교차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시선은 결국 쳰훵 광장의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책장을 한참, 아주 한참 넘겨야 한다.
중국인 소녀는 여자아이의 어린 티를 벗고 여인의 농염한 향기를 품기 시작하는 사춘기의 고혹적인 소녀다. 단아하고 고아해 보이지만 가슴속에 강렬한 정열을 불꽃처럼 품은 소녀는 아이에서 여자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 중국인 소녀에게는 ‘사랑’이 여인으로 성장하는 통로가 되어준다. 중국인 소녀는 자신에게 바둑을 가르쳐준 사촌 류의 청혼을 거절하고 혁명을 꿈꾸는 청년 민과 징 사이에서 치기 어린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여인으로 무르익어간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아니라 셋, 혹은 넷의 사랑은 언제나 그렇듯 서로 엇갈리게 마련이다. 그 감정의 엇갈림으로 인해 질투와 집착과 배신도 움튼다.
일본인 장교는 일본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청년으로 그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명예라고 믿는다. 물론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한 것도 이 청년에게는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중국인 소녀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그에 관한 이런 묘사들을 읽을 때는 화가 울컥 솟구쳤다). 그런 그가 혁명군들을 쫓아 중국인 소녀가 살고 있는 쳰훵에 이른다. 그리고 쳰훵 광장에 모여든다는 혁명군들을 염탐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무명씨로 중국인 소녀의 바둑판 앞에 앉는다. 하지만 그는 중국인 소녀와 바둑을 두는 시간만큼은 자신이 일본군임을 잊은 채 그의 내면에 감춰져 있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의 청년으로 돌아간다. 역사와 나라와 정치라는 외피를 벗으면 누구나 이렇듯 가장 본연의 내밀한 속살이 드러난다.
중국인 소녀와 일본인 장교는 대국을 이어가는 동안 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서로에 대한 감정도 한마디 나누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라는 그 쉽고 흔하지만 영원히 바래지 않는 말도. 그들이 함께 바둑을 둘 수 있는 시간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도, 상대의 진짜 모습을 궁금해하지도 않을 때뿐임을 서로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들은 다만 한 수씩 번갈아 정적으로 내려놓지만 역동적으로 그려지는 바둑돌로 서로를 읽고 자신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샨 사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그 울림이 길게 남는다. 가장 정확한 수를 신중하게 두듯 그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인 문장들로 꽉 짜인 바둑 두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리고 그들 절정의 비극적인 조우와 마주치면 숨은 한순간 멎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