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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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생인 작가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린 연배라면 사회, 문화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온몸으로 함께 겪은 세대일 것이다. 문화는 한없이 길었던 이념 논쟁과 민주화-2010년을 앞둔 지금 다시 저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를 거쳐 개인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국내 젊은 작가들의 복제품 같은 소설들마저 즐겨 읽었다. 공감하고 싶고 공감할 수 있는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또 어떠한가? 이기호는 전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도 그랬지만 『사과는 잘해요』 역시 박범신의 말처럼 80년대 ‘거대 담론’과 90년대 ‘미시 담론’을 독자로 경험한 작가가 그려낸 또 다른 방향이다. 이제 곧 마흔-혹은 그 이상이거나-이 되고 자신의 책을 읽는 나이가 훨씬 더 어린 독자들에게도 ‘젊은 작가’라고 불리는 것은 더 이상 특정짓기가 불가능해진 그들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시설에서 만나 친해진 진만(나)와 시봉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으며 복지사들의 폭력에 시달린다. 복지사들은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네 죄가 뭔지 아냐’고 이야기한다. 폭력을 피하기 위해 거짓 사과를 한 우리는 마음이 편하기 위해 거짓 사과를 했던 죄를 저지른다. 죄를 짓고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먼저 하고 죄를 저지르는 이 역설적인 모습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핵심이다. 이후 경찰에 의해 시설이 폐쇄되고 둘은 시봉의 여동생인 시연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 둘이 시작한 것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과를 대신 해 드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과 대행업을 시작한 그들은 죄지은 사람들을 찾아 사과를 대신해 주는 일로 살게 된다. 하지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죄를 먼저 지어야 하는 법, 둘은 사과를 하기 위해 죄를 먼저 찾기 시작한다. 타인에게 죄를 강요했던 복지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진 두 사람은 또 어떤 죄를 찾아 나설까.

불합리한 폭력에 굴복해 죄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하고 부자나 권력자 대신 죄를 강요 받는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흔하디 흔한 이야기 아니던가. 하지만 이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면 대개 사회가 가진 불합리성이나 피해자가 겪게 되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이야기는 우울해지고 어둡게 되기 마련인데 이기호의 경우 주된 관심사를 ‘사과’에 맞추어 진행해 간다. 재미있는 우화 같은 이야기면서도 지독히 현실성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때로는 그 죄를 잊으며 살아간다. 죄를 지었으나 사과를 하기는 싫고, 죄를 잊었으니 사과를 할 수도 없다. 이기호는 인간이 가진 죄에 대한 본질적인 속성을 나와 시봉의 ‘사과 대행’이라는 행동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머스럽고 진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재미있으면서도 뒷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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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스토리
A.S. 바이어트 지음, 윤희기 옮김 / 프레스21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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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 바이어트의 『마티스 스토리』는 20세기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세 편이 들어 있는 소설집이다. 바이어트의 『소유』를 사랑하게 된 후, 꽤 오래도록 찾았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날 너무나도 갑자기, 이토록 쉽게 이 책과 나의 연이 닿을 줄 몰랐다. 책과 만나는 일도 인연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메두사의 발목

나는 미용실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머리 모양도 ‘미(美)’에 대해서는 최대한 밀쳐둔다. 그저 나 편한 대로가 좋달까. 내 머리를 남에게 여러 시간 맡기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고,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고, 무엇보다 미용사가 이런저런 말을 붙여오는 것이 싫다. 구태의연한 휑한 말에 적당하게 맞장구칠 만한 대답을 찾기가 힘겹고 성가시다. 그래서 자꾸만 자라는 긴 머리칼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겠다 싶을 때만, 한 해에 한 번 정도 싹둑 자르러 미용실에 잠깐 들르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미용실에 갈 일은 아직은 좀처럼 없다. 좀더 나이 들어 포니테일로 묶은 치렁치렁한 머리가 흉하게 느껴질 때쯤이면 미용실에 가는 길이 덜 싫을까.

고전학자인 중년의 수잔나 부인은 젊음의 자연스러운 생기를 잃어가면서 푸석푸석하게 윤기를 잃은 머릿결과 세월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미용실에 드나들게 되었다. 파란 타일 위에 누워 있는 분홍 나부가 그려진 마티스의 「장밋빛 누드Pink Nud」가 인상적인 미용실은 온통 핑크와 화이트로 단장되어 있어, 그곳에서는 잠시 자신이 잃어버린 젊음을, 거짓이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되찾을 수 있었다. 미용사 루시언이 뜬구름 잡는 말들을 건네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적당한 대답을 돌려준다. 어쨌거나 루시언은 부인의 마음에 꼭 들도록 젊음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지도록 머리칼을 매만져주니까.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에 나가기 위해 다시 그 미용실을 찾았을 때 그곳은 온통 은색과 적갈색, 회색, 검정색 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미용실은 더 이상 부인이 잃어버린 젊음을 되찾아주지 못했고, 다. 오히려 젊음의 생기를 잃고 늙어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의 주름과 검버섯을 감춰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생기를 되찾기 위한 진한 화장과 과장된 머리단장은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럽기만 하다. 부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내던져 미용실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케이블TV에서 봤던가, 소위 ‘얼짱’이라 불리는 어느 아이는 미용실에 들르지 않고는 어떤 만남도 갖지 않는다고 강박적으로 말했다. 그 아이를 얼짱으로 변신시키는 곳이 바로 미용실이었다. 인위적인 가공 과정을 거쳐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얼짱이 된다고 한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자신의 멋진 외모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까. 오히려 끝내는 자기 멸시에 이르지 않을까. 자기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는 얼짱으로 결코 나설 수 없을 테니까. 부인은 더 이상 억지스러운 젊음을 되돌리기 위해 미용실에 발걸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기만적인 아름다움이 필연코 흘려놓는 모욕의 허방을 딛고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절감했으니까.


예술작품

이 단편은 마티스의 그림 「집안에 깃든 정적」의 색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메두사의 발목」에서 수잔나 부인과 미용사 루시언이 마티스의 그림에 대해 나눈 대화 중에 언급됐던 로렌스 고윙Lawrence Gowing의 『마티스Matisse ; World of Art』(1985년 4월)가 다시 등장한다. 이런 작은 장치를 찾는 것은 독자로서 소소한 즐거움인데, 이 책이 실제로 존재했다! 어쩌면 바이어트는 고윙의 이 책을 통해 이 단편집의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 잡지의 편집 기자쯤 되는(이 책에는 ‘디자인 편집자’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녀가 하는 일로 짐작해 보건대) 데비는 색채에 대해 확연히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한다. 한 사람은 화가인 그녀의 남편 로빈으로, 그는 색채의 배열과 그것이 빚어내는 조화에 대해 아주 결벽적이다. 색깔의 이론적인 법칙에 따르지 않는 색채들의 집합을 참지 못한다. 또 한 사람은 데비가 자기 대신 가사를 보살펴줄 가정부로 고용한 브라운 부인으로, 그녀는 자연의 모든 색깔은 서로 어떻게 배열되어 있어도 조화롭다고 생각한다. 폭력적인 남편을 두고 두 아들을 양육해야 하는 브라운 부인은 남들이 쓰다 버린 폐품이나 잡동사니, 헌옷 등을 모아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손수 만들었고, 그렇게 만든 자기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누구의 눈길이든 단번에 잡아챌 만큼 그 알록달록한,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색채의 향연으로 지나치게 화려해 보이는 것들을.

여기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질문은 다음 단편인 「중국산 바닷가재」에서도 이어진다. 「예술작품」에서는, 데비가 “뭔가 있는 모양이야”라고 말할 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남편 로빈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 위해 알선한 칼리스토 화랑이 로빈이 아니라 브라운 부인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어렴풋하게 보여준다. 데비는 취재차 화랑을 찾았다가 화랑의 불빛 아래 전시되어 있는 강렬한 작품들을 만나고 마음이 온통 뒤흔들린다. 곧 그녀는 그 작품들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이 눈에 익고, 그것이 자기가 브라운 부인에게 버린 것들임을 눈치 챈다. 그리고 그녀는 가정부 브라운 부인이 아니라 ‘시바 브라운’이라는 여성 예술가의 이름과 마주한다.


중국산 바닷가재

「중국산 바닷가재」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좀더 직접적인 대담을 펼쳐 보인다. 이 대담의 발단은 페기 놀렛이라는 여성 미대생이 자신의 지도교수인 페레그린 디스를 편협한 지도 방식과 성희롱으로 고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담을 펼치는 두 사람은 그 고발장을 받은 게르다 힘멜블라우 박사와 고발 대상자인 디스 교수로, 그들은 페기의 고발 내용, 가장 중요하게는 그녀의 세계가 예술인지, 예술이 아니면 무엇인지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페기와 페레그린은 마티스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페기는 마티스가 일종의 적의를 가지고 여성을 왜곡하여 표현했다고 주장하면서 마티스의 그림을 해체하여 원래의 의도(그러니까 여성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도록 재구성하는 패러디 작품을 선보인다. 그러나 마티스를 추종하는 페레그린은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단 보고 나니까 본다는 것이 정말 순수한 힘으로 가득 찬 것”임을 깨닫고 생명의 힘을 얻은 사람이다. 당연히 그는 페기의 주장을 (페기가 모멸감을 느낄 만큼) 무시하고 페기의 작품을 “배설물”, 혹은 “똥을 뿌린 행위”에 불과하다고, 곧 절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왜 하필 마티스입니까?”라고 울분을 토한다.

나는 예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예술작품」에서는 시바 브라운에게 내 마음이 기울었다. 이 단편에서는 마티스의 그림들 중 몇 점은 아주 사랑하고 페기처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페기의 손을 들어주었다가(마티스라고 해서 성역이 될 수는 없으니까), 페레그린의 손목에 그어진 흉터를 엿보는 순간 그에게는 마티스가 생명의 힘을 다시 불어넣어준 성역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예술일 수도, 똥일 수도 있으니까. 이래서 주관이 개입되는 문제는 머리가 아프다. 머리를 굴리기 전에 심장을 따라야 한다. 그게 의외로 내게 꼭 맞는 정답일지도.


A. S. 바이어트는 결코 글을 쉽게 쓰는 작가가 아니다.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일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지금 내 감상은 그녀의 섬세하고 치밀한 소설적 장치들을 무수히 놓치고 가장 눈에 띄는 파편만 건져올린 것이다.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이 소설은 제 모습을 무수히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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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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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은 여러 가지 맛이 혼합된 요리처럼 미묘하게 다가온다. 하나하나 따지면 분명히 어디선가 맛 본 익숙한 것인데 이것이 버무려져 독특한 맛을 내고 있다. 아니,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분명 『헝거 게임』의 생존 투쟁은 영화 <배틀 로얄>을 생각나게 한다.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에 <배틀 로얄>, 그리고 여러 가지 인기 있는 설정을 버무린 맛이라고 하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더해 자신의 맛을 첨가해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북미 대륙에 판엠이라는 독재 국가가 건설된다. 수도인 캐피톨과 13구역이라는 주변 구역으로 이루어진 판엠은 독재국가라는 특성답게 모든 부와 권력은 수도인 캐피톨에 집중되어 있다. 가난과 불평등, 굶주림에 시달린 13번 구역 주민들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무력하게 진압되고 캐피톨은 공포정치를 시작한다. 13번 구역을 폐쇄하고 남은 12구역에서 십대 소년소녀를 뽑아 24명이 서로를 죽이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만 살려 주는 ‘헝거 게임’을 개최한 것이다. 더욱 가혹한 공포정치의 수단으로 이 모든 상황은 리얼리티 TV쇼로 생중계되며 생존자를 대상으로 하는 도박을 할 수 있게 한다. 지배자들에게는 그저 여흥의 대상이지만 12구역의 소년소녀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혹한 곳. 12구역에 사는 소녀인 캣니스 애버딘은 사냥으로 엄마와 동생을 부양하고 있는 소녀가장이다. 동생 대신 헝거게임에 뽑혀 생존경쟁에 뛰어든 그녀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 <배틀 로얄>(첨가하여 <트루먼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이 작품은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남겨 주고 있다. 헝거 게임을 개최하는 개연성 있는 설정-공포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 살아남기 위한 소년소녀들의 모습은 이 이야기를 더욱 사실적이며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마치 현대의 연예인들처럼 스폰서를 구하고 스타일리스트에게 손질을 받고 개막식까지 진행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이를 희석하기 위해 캣니스와 티파의 사랑 이야기 같은 로맨스를 첨가했지만 어두운 이야기의 느낌에 녹아 마냥 즐거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치 TV쇼를 시청하고 있는 캐피톨의 주민같은 느낌이 들어 우울한 느낌을 더한다.

폭력적인 내용 전개에 십대 취향의 로맨스처럼 뻔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휴머니즘과 풍자를 첨가해 균형을 잡는 것을 보고 있으니 참 영리한 작가구나 하는 느낌이다. ‘나는 대중소설을 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인기를 끌만한 퓨전 음식 요리사, 수잔 콜린스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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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브 2
모리 에토 지음, 오유리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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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든(사토 다카코의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 미우라 시온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야구든(아사노 아쓰코의 『배터리』), 다이빙이든(모리 에토의 『다이브』) 몸을 움직여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고 그 한계조차 초월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가닿는 운동은 솜씨 좋은 이야기꾼의 입담을 통하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을 생기 있게 되살린다. 운동을 소재로 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호흡, 긴장감, 전율, 쾌감, 그리고 한 걸음 크게 도약하는 성장의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다. 이런 소설들을 읽으면 실제로 달리고 싶다든가 하는 욕구가 솟구치는데, 독서는 아무래도 정직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머릿속 가상 행위에 지나지 않으니 못내 아쉽기 때문이 아닐까.

모리 에토의 『다이브』는 다이빙에 자신의 꿈과 세계를 건 소년들의 성장기다. 수영 종목 중에서도 꽤 낯선 다이빙은 높은 곳에서 물속으로 잘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사실 텔레비전으로 아주 가끔, 그나마도 잠깐만 채널을 멈춘 채 다이빙 경기를 보고 있을 때, 중력을 어쩌지 못하고 순식간에 곤두박질치는 그 짧은 찰나에 저들은 무엇을 얼마나 다르게 보여줄 수 있을까 싶었다. 외부인의 시선은 이렇듯 철저하게 무심하지만, 운동을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이 모리 에토가 그려내는 다이빙의 세계는 외부인의 무관심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긴장감과 섬세한 움직임으로 가득 차 있다. 다이빙은 높이 10미터, 시속 60킬로미터, 플랫폼에서 도약하여 물속으로 스며들기까지 공중에 머무는 시간 1.4초로 집약된다. 하지만 다이빙 선수들은 아찔한 높이에서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면서 그 짧은 순간 인간의 육체 구석구석에 뻗어 있는 자잘한 근육까지 모두 제어하여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다이브』의 이야기 구조는 다른 스포츠 소설들과 비슷하다. 존폐의 기로에 선 클럽, 클럽의 존속을 위한 어려운 과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거나 잠재력이 충만한 소년들, 물론 그저 평범한 보통의 아이들도,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고민, 그 고민을 극복하는 데 힘이 되어주는 우정, 그 모든 것을 밑거름으로 하는 성장,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렇다고 이야기 자체가 구태의연한 것은 아니다. 이 익숙한 얼개에 달리기든, 야구든, 다이빙이든 운동의 새로운 매력이 더해지면 매혹적인 성장담으로 변한다. 다이빙을 묘사하는 모리 에토의 표현들 중 가장 멋지다고 감탄했던 글귀는, 다이빙은 “땅을 떠나 하늘을 우러르다 물로 귀환하는 본능”을 품은 이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 본능대로 『다이브』의 소년들은 끊임없이 하늘로 치솟아 있는 다이빙대 ‘콘크리트 드래곤’에 오르고 사각 풀의 물속으로 날아 내리길 반복한다.

다이빙 선수였던 부모의 핏속에서 태어나 타고난 재능과 엄청난 노력으로 정교한 고난도 기술을 연기하는 후지타니 요이치. 안전한 풍어를 위해 높은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집안의 혈통 속에 전설적인 다이빙 선수 할아버지의 손자로 사람들의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연기를 펼치는 오키쓰 시부키. 동체 시력이 탁월한 다이아몬드 눈동자와 뛰어난 유연성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빠르게 끌어올리며 한계를 모르는 다이빙을 보여주는 사카이 도모키. 그리고 다이빙에 별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농구에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료. 역시 다이빙에 재능은 없지만 자신만의 성장 속도를 따라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가며 다이빙을 사랑하는 마루야마 레이지. 엄마에게 끌려와 엉겁결에 다이빙을 시작했지만 서포터로서 다이빙을 사랑하게 된 사치야까지. 『다이브』의 소년들이 어우러져 자신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한계를 뛰어넘어 훌쩍 성장하는 과정은 가슴 콩닥이는 풍경이다. 성장소설 속 주인공의 나이가 어떻든 건강한 성장을 마주하면 무기력한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이브』를 읽고 나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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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살인 사건
크리스티나 쿤 지음, 박원영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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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이 소재가 된 장르문학의 경우 작가보다는 그 내용이 문제가 되거나 원고의 행방 등이 이야기의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우연히 발견된 원고에서 비밀 메시지가 발견되거나 중요한 원고가 사라지는 것 같은 이야기 말이다. 예술작품이 가진 특성-위작이나 미발표 작품, 작품 해석상의 문제 같은 것들-들 때문에 특히 추리소설에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 좋은 소재가 된다. 하지만 이것이 독자에게는 사소한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데 특정 작품을 주제로 했을 경우 해당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뭐 걸림돌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말이다. 크리스티나 쿤의 『카프카 살인 사건』 역시 카프카를 읽고 난 후라면 독서의 즐거움이 더욱 배가 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낡은 건물에서 헬레나라는 이름의 젊은 발레리나가 금속 채찍에 맞고 과다출혈로 죽었다. 특이한 점은 어떤 반항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며 목에는 어떤 표식을 보여주는 듯한 칼로 새겨진 K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곧이어 발견된 희생자는 카프카 연구의 권위자인 밀란 허스 교수의 제자로 산채로 입이 꿰메진 채 굶어 죽었다. 목에는 K라는 동일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살인이 발생할 때마다 프라하의 고서점에 메일로 <서커스 관람석에서>와 <단식광대>라는 카프카의 미발표 초고가 도착한다. 이 단편이 카프카의 방식과 매우 흡사하며 그 내용이 두 살인 사건과 살해 방식과 동일하다는 점, 살해된 사람들의 목에 있던 표식이 카프카의 K라는 점, 그리고 보낸 메일의 주소가 밀란 허스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수사팀은 유력한 용의자로 밀란 허스 교수를 체포한다.

크리스티나 쿤의 『카프카 살인 사건』에서 작가는 오히려 카프카에 집착한다. 카프카가 발표한 작품은 물론 카프카의 삶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특히 카프카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이 작품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근간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독선적인 아버지에게 늘 강요당하며 문학에 대한 아들의 열정을 비웃던 아버지와는 결코 화해할 수 없었다. 이는 결국 카프카 문학 전반에 영향을 끼쳐 아버지를 증오와 콤플렉스의 대상인 동시에 타협하고 뛰어넘으려는 대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미리암 검사의 모습 역시 카프카의 삶을 닮아 있다. 과거에 대한 아픈 기억으로 결혼 생활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카프카가 자신을 결혼 무능력자라고 불렀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이야기 전반에 투영된 카프카의 모습과 크리스티나 쿤의 카프카에 대한 색다른 해석, 카프카와는 달리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 범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이 작품의 가장 큰 흥미로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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