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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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생인 작가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린 연배라면 사회, 문화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온몸으로 함께 겪은 세대일 것이다. 문화는 한없이 길었던 이념 논쟁과 민주화-2010년을 앞둔 지금 다시 저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를 거쳐 개인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도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국내 젊은 작가들의 복제품 같은 소설들마저 즐겨 읽었다. 공감하고 싶고 공감할 수 있는 철저히 개인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또 어떠한가? 이기호는 전작인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도 그랬지만 『사과는 잘해요』 역시 박범신의 말처럼 80년대 ‘거대 담론’과 90년대 ‘미시 담론’을 독자로 경험한 작가가 그려낸 또 다른 방향이다. 이제 곧 마흔-혹은 그 이상이거나-이 되고 자신의 책을 읽는 나이가 훨씬 더 어린 독자들에게도 ‘젊은 작가’라고 불리는 것은 더 이상 특정짓기가 불가능해진 그들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시설에서 만나 친해진 진만(나)와 시봉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으며 복지사들의 폭력에 시달린다. 복지사들은 아무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두르며 ‘네 죄가 뭔지 아냐’고 이야기한다. 폭력을 피하기 위해 거짓 사과를 한 우리는 마음이 편하기 위해 거짓 사과를 했던 죄를 저지른다. 죄를 짓고 사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먼저 하고 죄를 저지르는 이 역설적인 모습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핵심이다. 이후 경찰에 의해 시설이 폐쇄되고 둘은 시봉의 여동생인 시연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해 둘이 시작한 것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과를 대신 해 드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과 대행업을 시작한 그들은 죄지은 사람들을 찾아 사과를 대신해 주는 일로 살게 된다. 하지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죄를 먼저 지어야 하는 법, 둘은 사과를 하기 위해 죄를 먼저 찾기 시작한다. 타인에게 죄를 강요했던 복지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진 두 사람은 또 어떤 죄를 찾아 나설까.

불합리한 폭력에 굴복해 죄를 인정한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하고 부자나 권력자 대신 죄를 강요 받는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흔하디 흔한 이야기 아니던가. 하지만 이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면 대개 사회가 가진 불합리성이나 피해자가 겪게 되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이야기는 우울해지고 어둡게 되기 마련인데 이기호의 경우 주된 관심사를 ‘사과’에 맞추어 진행해 간다. 재미있는 우화 같은 이야기면서도 지독히 현실성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때로는 그 죄를 잊으며 살아간다. 죄를 지었으나 사과를 하기는 싫고, 죄를 잊었으니 사과를 할 수도 없다. 이기호는 인간이 가진 죄에 대한 본질적인 속성을 나와 시봉의 ‘사과 대행’이라는 행동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머스럽고 진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재미있으면서도 뒷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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