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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ㅣ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평점 :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은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일견 행복으로 충만해 보이는 삶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두려움과 고통, 삶에 대한 ‘비의(悲意)’가 내포되어 있다는 삶의 내밀한 속성을 잘 포착해낸 체험적 진리라고 생각한다. 앤터니 비버의 역작 '베를린 함락 1945 (Berlin : The downfall 1945)'을 읽는 내내 나는 찰리 채플린의 이 말을 계속 곱씹었다.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 (leaf vein)'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고, 그러한 삶들의 집합체가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 보다 신중하게 다양한 시각과 사실 검증을 거쳐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 우리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숲 안으로 깊숙이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에도 주목해야한다.
"비버는 전략적 상황의 큰 그림과 현장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들의 의미를 솜씨 있게 결합시킨다. 이 책의 강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놀라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사건들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 있게 풀어놓는다는 것이다." - 애덤 시스먼 (『옵서버』)
독소전쟁이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독소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단일 전쟁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는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이 3할이 넘는 인구를, 소련은 4할이 넘는 인구를 오로지 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동원하였다. 세계사를 통틀어 단일국가가 전쟁 수행을 위해 이렇게 많은 인구를 동원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양 국가의 인명피해는 3,000만명이 넘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전체 인명 피해의 절반가량에 해당한다. 이념대립, 자원확보, 전쟁상황하의 전략적 선택 등 독소전쟁 발발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지만, 게르만족과 슬라브족간에 벌러진 정복전쟁을 넘어 상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절멸전쟁이었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이유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도적 행위와 온갖 비인간적인 만행들은 이러한 비극적 선택으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2차 대전과 독일의 몰락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관심사, 사상적 배경, 고민과 감정들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 또한 명시적으로 표명된 것과 이와 반대로 암묵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관례와 도덕, 관습과 가치까지도 되짚어봐야 한다. 또한, 고통스럽고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진, 어두운 이면들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 이는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사건이자 미래의 형성에 일정부분 영향을 주는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는, 2차 세계대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발발하고, 범죄와 재난상황이 일어나면 처음에는 뭐가 뭔지 혼란스럽다가 점차 명료하게 전모가 밝혀지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다. 사실관계가 파악되고 모호한 면이 걷히면 정확한 그림이 잡힌다. 그리고 대중이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려진 그림은 진실과 무관할 때도 많다. 대중들이 연표로만 기억하고 쉽게 오해하거나 쉽게 지나쳐버리고마는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렇다. 전쟁 당시에는 현실로 존재했을 이데올로기의 망령과 그로 인한 살인과 공포는 먼 훗날에도 사건의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못하고, 이해관계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만 존재하는 사례가 많다.
"비버는 복잡한 군사적 움직임들과 여기에 책임 있는 사령관들의 논리를 대단히 명확하게 서술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전쟁의 실제 희생자들에게도 섬세하게 신경을 쓴다. 어른용 철모에 불안한 얼굴이 가려진 소년들, 여러 번 윤간을 당하는 사이사이 가까스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성들, 가족 농장이나 배우자의 무덤을 떠나고 싶지 않아 지옥의 한가운데에 놓인 노인들. 그 결과 현대 역사서의 걸작이 탄생했다." - 마이클 벌리 (『가디언』)
앤터니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 (Berlin : The downfall 1945)'이 학계와 언론에 이르기까지 걸작 논픽션으로 오늘날까지 언급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베를린 전투는 1945년 4월 16일부터 5월 2일까지 2주에 불과한 기간 동안 벌여졌지만, 작가는 베를린 함락과 독일이 몰락에 이르는 과정을 베를린 전투 발발 이전부터 시공간을 오가며,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비버는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베를린 전투가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대적 상황부터 이를 둘러싼 주요 인물들의 심리상태까지 독일과 소련의 입장을 균형있게 다루며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록보관소 자료, 일기, 회고록을 바탕으로 수백만 명의 경험을 재구성해내고 있다. 마치 영화를 방불케하는 시공간의 변화와 교차편집 방식,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롱샷이 반복되는 서술은 독자들의 혼을 빼놓으며 당혹스럽고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를 입체감 있게 다양한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일전에 읽었던 '봄의 제전 (Rites of Spring: The Great War and the Birth of the Modern Age)'에서 저자 모드리스 엑스타인스는 1차 세계대전의 의미에 대해 다룬 수많은 저술서 중에서 만족스러운 저작들은 대부분 시인과 소설가, 문학 비평가들한테서 나왔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역사는 이성이 살아 있던 18세기와 19세기 합리주의 시대에 널리 지지를 받았지만 1차 대전 이후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세기의 감수성에 적응하지 못했고, 전쟁의 배경과 그 참혹한 현실, 전쟁의 의미에 상응하는 설명을 찾는데 실패했다는 의미에서다. 에곤 프리델은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고,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도 '집단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회 환경과 접점을 잃어버린 개인적 반응, 꿈과 신화만이 있을 뿐'이라며 역사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시켰다. 앤터니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 (Berlin : The downfall 1945)'을 읽으며, 모드리스 엑스타인스의 말에 다시 한번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자세와 시각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앤터니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 (Berlin : The downfall 1945)'이 뛰어난 역사서로 평가 받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균형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나치 독일은 절대 악이라고 평가하고 낙인을 찍는다. 물론 나치 독일이 벌인 수많은 전쟁범죄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나치 독일에서도 인류와 인간애를 지키기 ㅟ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고, 소련이 나치의 침략에 저항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규모 강간 등 그 ‘신성한’ 성취를 더럽히는 행위도 있었음을 저자 비버는 언급하고 있다. 전쟁에서는 누구도 해당자의 역할 또는 정복자의 역할만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 깨닫는다.
수천만 명이 죽고 부상당하고 나서야 2차 세계대전전쟁은 끝이 났다. 경제는 파탄이 났고, 각 국에서는 분쟁이 발생했다. 패전국은 거리를 배회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위장하였고, 승전국은 이겼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자유, 존엄, 정의는 전쟁이 초래한 막대한 희생을 생각할 때 공허하기만 했다. 옛 권위와 전통 가치는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옛것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권위와 가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전쟁에 들인 막대한 노력, 특히 강렬한 정서적 헌신은 평화를 달성하는 작업에서는 도저히 유지될 수 없었고 유럽은 엄청난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유토피아적인 사회적 꿈은 전쟁 후 닥친 인플레이션과 실업, 빈곤, 인플루엔자 유행병으로 잔인하게 지워졌다. 결국 평화에 뒤이어 불가피하게 환멸과 허무가 찾아왔다. 전쟁이 그런 희생을 치를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끔찍한 생각에 직면하자 사람들은 한동안 그런 생각 자체를 묻어버리고 삶의 의미를 순간의 생생함 속에서 찾고 향락과 나르시시즘에 빠졌다.
앤터니 비버의 역작 '베를린 함락 1945 (Berlin : The downfall 1945)'를 읽으며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se)’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머리를 맴돌았다. ‘사덴’은 상처를 주는것, ‘프로이데’는 환희라는 뜻으로 ‘샤덴프로이데’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줌으로서 느끼는 환희를 의미한다. 우리 중 누구도 한번쯤은 스탈린이나 히틀러처럼 세상의 정복 또는 멸망을 꿈꾸거나 자살충동을 느끼는 등 부정적 파괴욕망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이 처하게 되는 고난적 상황을 기뻐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 기제는 어떠한 상황하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너무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 나라는 자기정체성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만이 깃든 상태에서 악은 발현될 수 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악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불평등한 격차가 역전의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회, 개선의 가능성, 그 여지 조차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불안과 허무를 느낀다. 그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 고통과 고뇌의 원인 조차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의 거대한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 개인이 세계와 단절되고 사회와 유리되었을 때 악은 발현되는 것이다.
"극도의 고통, 심지어 타락조차 인간 본성의 최악의 모습뿐 아니라 최선의 모습을 끄러낼 수 있다. 많은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의 민간인들을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이데올로기로 인간성이 파괴된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세계에서 뜻밖의 다정함과 희생에 가까운 몇몇 행동은, 만약 그조차도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이야기에 작은 등불을 밝혀준다." (p. 57)
물론 완벽한 이념은 없다. 이데올로기는 적절한 방법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지나친 경쟁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악이 매력적인 이유는 악은 오로지 자기자신과 자신의 방식을 믿는 확고한 신뢰가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만 옳고 나만 믿을 수 있다라는 생각은 나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점차 파편화되고 원자화되는 신자유주의의 세계 속에서 악은 번성한다. 악을 극복하는 방법은 신뢰와 연대를 통해서 가능하다.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공존하며 살아 갈 수 있다.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계에 절망하며 무릎 꿇지 않고 같이 신뢰, 공감, 연대하며 상호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사소한 변화와 미약한 성공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2022년 봄, 유럽에선 또 다른 '봄의 제전'이 펼쳐졌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리는 본서에서 다룬 바와 같이 그동안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서 시작되어 명분과 목적 없는 전쟁이 결국 황폐함과 절망만이 남게 되는 참혹한 결과를 지켜봐왔다. 유발 하라리는 국가는 스토리 위에 만들어지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앞으로 어두운 시대가 끝나고 난 후, 윗세대가 아랫세대에게 전할 스토리를 늘려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나는 대피할 곳이 아닌 탄약이 필요하다며 끝까지 수도에 남아 항전 의지를 전한 대통령, 항복하라는 러시아 함대 앞에 '엿이나 먹어 버려라'하며 굴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한 13명의 스네이크 섬의 수비 대원들, 맨 몸으로 러시아 탱크를 막아내려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라리는 국가는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태어나며 장기적으로, 이 이야기들의 힘은 탱크보다 강하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우크라이나에 하루 속히 봄이 찾아오길 바란다. 우크라이나의 국가 '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의 가사처럼 적들이 아침 태양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 우크라이나의 영광과 자유가 지켜지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