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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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기 위해 막 집을 나섰을 때 아내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의 친한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자식들이 임종도 지키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 자신 조차 예상하지 못한 이별 앞에서 먼저 떠난 이는 삶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도 갖지 못했다. 남겨진 이들은 되돌릴 수도, 잊을 수도, 없던 일은 더더욱 될 수 없는 준비 없는 이별의 슬픔을 견디며 삶을 살아 갈 것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있다. 이우는 가장 소중한 친구 태이를 사고로 잃었고, 이삐 할미는 세 명의 아들을 바다에서 차례로 잃었다. 천국은 도서관일 거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믿는 정모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판도는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 이들의 슬픔의 중심에는 상실과 결핍이 존재한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터무니 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된다는 (p.130) 소설 속 정모의 말처럼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의 경험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녹아 든다. 하지만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킨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 시키기 때문이다.

 

절벽 아래엔 동굴이 하나 있다. 만 번 또 만 번의 파도가 저 동굴을 만들었겠지. 넌 모르겠지만 내 안에 저만한 구멍이 있어. 내 몸보다 더 커. 휑하고 휑해서 나는 가끔 내가 없는 것 같아. 그 구멍이 언제 생겼는지. 너한테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무리 네가 못 듣는다 해도. 구멍이 생긴 순간, 그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거든. (p. 136)

 

아직도 태이의 크레파스처럼 쨍한 파랑색 베스파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고, 바다에서 눈을 감으면 태이의 숨결이 묽은 콘크리트 반죽처럼 몸을 휘감는다는 이우의 고백처럼 그들은 눈앞에서 펼쳐진 눈부신 자연을, 지금 이 순간의 살아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한다.

 

먼 하늘에 별 몇 개가 가까스로 돋아났다. 저 별빛은 지푸라기로 변한 누군가가 놓쳐버린 행복의 순간일 수도 있고 스쳐갔으나 잡지 못한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지상의 음악일 수도. (p.194)

 

그들은 눈 앞에서 반짝이는 저 별이 누군가의 행복했던 과거 같기도 하고 어쩌면 미래에 들을 수 있을지 모를 지상의 음악 같기도 하지만 결코 현재의 내 것은 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게 슬픔은 그들을 하나의 섬으로 만든다. 이우가 언급한 슬픔은 깎다 만 사과라는 시 구절처럼 그들 각자는 맑은 슬픔, 헛헛한 슬픔, 차가운 슬픔, 말간 슬픔 등을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각자가 겪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그들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그들은 삶의 흔적, 슬픔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게 된다.

 

저기 섬과 섬 사이. 유난히 빛나는 한점. 거기 어디쯤 네가 있는 듯하다. (p. 105)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정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슬픔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슬픔의 따뜻함에 대해 긍정하고 진정한 위로의 경험을 얻는다.

 

슬픔이라는 그릇에 담긴 따뜻함이라면 그 힘으로 당분간은 팔을 돌리며 달려갈 수 있지 않겠나 (p. 135)

 

소설 속 정모의 말처럼 그들은 소금꽃을 닮았다. 짜디짠 기운으로 제 슬픔을 절이다 못해 하얗게 엉겨드는섬을 떠났으나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출발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친 삶의 흔적들과 슬픔을 간직한 채 섬에서 만난다.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했던 건 말 못하는 판도가 이우의 손바닥에 적었던 따스함, 시력을 잃어가는 정모를 위한 이우의 약속이었다.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가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 타인의 온기를 느낄수 있다는 것,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위로가 있을까?

 

그냥 소금이잖아!, 꽃이 별거냐. 징하게 모인 기운이 터져나오면 그게 꽃이다. (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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