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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김지혜 작가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평등'과 '정의'를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 보일듯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을 본질적으로 가르는 차이란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보편성을 공유하지만, 서로가 가진 정체성과 상황에 따라 다양성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 다양성은 때론 우리를 빛나게 하고 우리 존재가치를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차이와 차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차이에 대해 주목하고 표면화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차별의 이야기는 단지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로 표상되는 특정집단에 한정되지 않는, 우리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은 드러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선량한 시민이고,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작가가 이 책의 제목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도 명명한 이유이다. 지금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수많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상처와 피해를 주고 있다. 이러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다음은 내가 차별과 부조리에 대해 인식하게 된 하나의 사례이다.
"당신 정말 육아휴직 갈꺼니?"
딸이 태어났을 때 축하인사 다음으로 회사의 경영지원부문 임원이 내게 건넨 말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위해 회사는 남성육아휴직을 지원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안정적으로 정착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인사와 복지정책을 총괄하는 경영지원부문 임원의 농담인 듯 진담인 듯 건넨 말 한마디는 내게 항거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 약속,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말을 일상에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이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는 것의 고충을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가시화되고 권력화된 악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악의 없는 무심함, 선의로 포장된 무례가 누적된 결과가 아닐까?
나는 다른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로서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지가 주어지길 바란다. 딸이 성장해나가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될 질문 중 하나는 꿈과 장래희망에 대한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 꿈이 무엇인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건 상당히 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딸이 성장해가면서 '너는 도화지와 같아서 어떤 그림으로든 완성될 수 있단다. 너의 무한한 가능성을 맘껏 펼쳐보렴'에서 "이제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 정해야 하지 않겠니?"로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자인 네가 그걸 한다는 게 가능할까?"로는 변질되지 않길 바란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여성들은 일상의 부조리 앞에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살아왔다. 기득권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를 잃을까 전전긍긍할 때 피해자인 여성들은 삶의 전부를 잃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로와 보복, 무력감 속에서 괴로워해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의 작은 순간들이 누적되어 한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듯 세상의 변화도 생각보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사에 남성 육아휴직을 신청하였다. 이는 물론 태어난 아이를 위해 앞으로 일정부분 여성이 아닌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아내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 또 다른 여성으로서 살아갈 내 딸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이 조직 구성원들의 부정적 인식을 전환시켜 육아휴직제도가 안정화되고 나아가 조직문화가 개선되는데 미약하나마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소수자이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정신이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p. 190)
쉽사리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신뢰하고 연대하며 협력과 공생의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것이 비록 사소하고 미약한 성공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아내와 엄마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삶이 빛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은 그러한 곳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작지만 끊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우리 모두를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임을 믿는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엄마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들의 삶에 행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