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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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또는 ‘이즘 (Ism)’이란 사고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신념의 체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즘은 역사적, 사회적 입장이 반영된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즘’은 현실 속 욕망들이 투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론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이즘’은 현실의 문제들을 온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조국독립, 남북분단, 경제성장, 민주화를 거쳐 발전해 온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실현을 억압하였고, 개인을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이념에 종속시켰다. 또한 자유주의는 원칙과 기준을 잃고 표류하였다. 그것은 비정상적 과정을 통한 성장이었고 이는 결국 자유의 부재로 이어졌다. ‘이즘’의 존재 이유는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가치를 지키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것이지만 ‘삶’은 역설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충돌 과정에서 빛을 잃어갔다.


"저 녀석이 내 아들인 이상 남들처럼 평범한 삶은 어림도 없어." (p. 109)

"우리 혁이 대학 졸업하믄 미국 유학 갈라 카는데 못가면 어예니껴? 5촌 걸리는데 6촌이라고 괘안켔니켜?" (p. 187)


2016년 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김이정 작가의 <유령의 시간>에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대가로 삶의 기반 자체가 무너져버린 한 인간이 등장한다. 작가는 한 인간이 자신이 가진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을 겪으며 정체성이 분열되는 과정, 나아가 이로 인해 빚어진 수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작가 부친의 이야기를 그린 자전적 소설인 <유령의 시간>은 "한국 현대사가 흘린 남겨진 진실, 진정성 등을 수습하는 문학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국의 역사에서 좌우 이념 대립은 지나간 과거의 얘기가 아니다. 현재에도 그 시절을 겪어낸 직간접 체험자들이 사회구성원으로 공존하고 있고, 여전히 우리 사회 갈등의 가장 큰 축으로 기능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즘이라는 것은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새로운 구속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인간이 이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념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된,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인간이 희생되었던 사례를 많이 지켜봐 왔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칭송 받는 민주주의도 이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현실적이지 않은 제도로 여겨져 주목 받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도 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사상에 매혹되고, 우리는 왜 사상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 (p. 277)


앞서 언급한 대로 이념은 현실의 순수한 열망이 빚어낸 결정체다. 각각의 사상에는 열망의 실현을 약속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욕망을 꿰뚫고 있는 시대적 사상들에 인류가 매혹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사상의 발전사는 인류의 욕망과 희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인류에 의해’ 탄생하였지만, 사상 중에서는 ‘인류의 사상’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것들이 많았다. 사상이 ‘현실’의 일면만을 반영하거나, ‘인간’을 담지 못하고 변질되고, 때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인류를 사로잡았던 사상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에 대한 냉철한 이해야말로 좋은 변화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상은 갈 길 모르는 인류에게 앞날을 비추는 횃불이다. 맹목적으로 하나의 횃불만 따라가지 않는다면, 또한 여러 방면에서 타오르는 불빛들을 냉정한 눈으로 가늠할 수 있다면, 사상은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인도할 수 있다.



시인 헤르더의 말처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통하는 단 하나의 사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때로는 계몽주의에 기반한 냉철한 이성과 과학적 판단이, 때로는 낭만주의의 열정과 의지가, 또 어느 순간에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시대를 발전시켜왔다. 해체주의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옳고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다만 인간의 생각과 언어로서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또한 실존주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을 스스로 만들고 개척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매순간의 결단이 어느 누구도 빼앗지 못할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체주의의 교훈을 수용하면서, 실존주의적 실행력을 갖추는 것 아닐까? 초점이 맞지 않은 한장의 시진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 여러 장이 쌓이고 모이면, 본연의 의미가 입체적으로 형상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소외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이름 없는 민중들, 수많은 '김이섭'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의 페이지에 그들의 몫도 있을까? 우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들을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들의 번민과 희생, 고통이 우리의 현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세상의 진보를 위해 고독한 걸음을 내디딘 이름 없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빈껍데기만 남은 '유령'의 삶이 아닌 삶의 온기가 느껴지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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