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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 中에서 –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에세이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Embrace Fearlessly the Burning World)>을 읽으며 나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렸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망에 믿음을 걸라고 강하게 유혹하는 시대 속에서 배리 로페즈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에서 그 강력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p. 88) 또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속에서 죽기보다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계속해서 과거로 떠밀려 가는 현실의 삶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감으로서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그가 남긴 삶에 대한 아포리즘이다.
“시도하기란 나의 바깥 세계는 물론이고 내 능력의 경계 너머를 탐색하는 일이고, 그의 많은 글이 이 둘의 조합에서 동력을 얻는다. 한편 한편의 에세이는 작가가 애써 시도한 것의 기록이면서 독자들에게 저마다의 탐험에 나설 것을 청하는 초대장이다.” (p. 9)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의 부제는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이다. 서문의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배리 로페즈의 에세이는 그가 살아오며 마주친 자연과 세계에 대한 경이로운 기록이자 내면으로 침잠하여 돌아본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이기도 하다. 마치 거대한 숲을 조망하면서도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마다의 살아온 이력과 역사를 동시에 살피고 있는 것과 같다. 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멀리서 숲을 조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숲 안으로 깊숙히 침잠하여 나뭇잎의 형태와 주위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긴 역사의 연결성도 중요하지만 나무 마다 저마다의 방향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잎맥처럼 삶은 다면적이고 정답을 찾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배리 로페즈의 초대를 받은 독자들은 저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신의 내면으로 떠나는 탐험을 시작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항상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이루며 발전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직선적 사건이 아닌, 별자리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원심형의 배열에 가깝다. 동시대에서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해 있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 번째 심장이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현실적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의 삶이 군집을 이룬 채 살아가는 별들과 서로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 보면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 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필요하다.” (p. 117)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진실'이 다르고, 본능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경계들, 그리고 그 수많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이유를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배리 로페즈의 글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고 구원의 힘에 대한 더 넒은 인식을 직조해낸다는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 개별적 주체인 동시에 서로 신뢰와 사랑을 매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견뎌내고 살아남으려면 우리는 상상력을 더 확장해야 한다. 서로를 신뢰해야 한다. 지금은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든 장소가 녹아 하나의 물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드는 법을 잃어버린 보트를 찾아 헤메고 있다.” (p. 328)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불완전함과 취약성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아닐까? 신뢰와 사랑, 자발적인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구축하고 용기와 위로를 나누는 것은 서로의 결핍과 불완전함을 일정 부분 해소해줄 수 있는 심연과 어둠의 해독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뢰와 공감을 기반으로 진실된 관계를 구축하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계획이나 구상을 ‘청사진 (Blue Print)’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미래를 그리는 행위는 특정 시점의 순간을 박제하는 사진 보다 그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순간의 단면을 정확히 스크랩하는 것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정 시간에 걸쳐 대상을 관찰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걸쳐 변화하는 대상의 입체적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특정 시점에 국한된 대상의 모습을 무엇보다 정확히 포착하는 반면 그림은 일정 시간 동안의 대상의 변화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진이 아닌 그림을 지향하면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책임이 동반된 관계를 그려 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행복과 미래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림 속 불분명한 선들로 이뤄진 한 사람의 형상 그리고 그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구축하며 쌓아온 세월의 궤적은 사진 보다 불분명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의 농축성을 기반으로 안정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질서 너머의 미래 모습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 또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은 배리 로페즈와 그의 세대들이 살아온 세상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에도 우리 후손들의 세상에도 배리 로페즈가 경험했던 세상이 그랬듯이 그 시대만의 일렁임은 어김없이 존재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우리 세대의 열망은 거친 삶의 파도 앞에 좌초되거나 위기를 겪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위기를 맞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연대가 있다는 것 아닐까? 배리 로페즈가 우리에게 남긴 수많은 체험적 진리 중에서 가장 귀중한 유산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삶의 예의로 다시 데려다줄 타인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절망에 믿음을 걸라고 강요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 강력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는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보다 앞에 놓은 가능성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 이러한 인류의 의지는 앞으로 자신의 삶을 헤쳐나갈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계승될 것이라는 것.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죽음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도록,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남김없이 활용하도록 일깨운다. 그리고 스테그너처럼 큰사람의 죽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 하면서도 변변히 행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를 일깨운다. 윌리스 스테그너가 보여준 최선은 충분하고 또 충분하였다.” (p. 151)
우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겪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에 반응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풍랑을 힘겹게 견뎌내야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신뢰와 연대를 통해 하나의 조각(One Piece)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고 지향해야 하는 삶 아닐까? 책 중에서 윌리스 스테그너를 추모하며 남긴 그의 말을 그에게 다시 되돌려주고 싶다. 진실한 관계 구축은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하여 어떤 짐이라도 함께 짊어질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그의 말처럼 삶의 길 위에 설 것이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 흔들림 없이 함께 걸어갈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