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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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퐁당'”


하이쿠(俳句)를 이야기할 때 흔히 언급되는 대표적인 시다. 지은이는 마츠오 바쇼 (1644∼1694)로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하이쿠 시인이며, 하이쿠를 문학의 한 장르로 완성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하이쿠는 일본의 문학 장르로 3행 17음절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가리킨다. 서술을 극도로 아낀 채 최소한의 상징어와 여백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하이쿠의 특징이다. 막상스 페르민의 『 눈 』에서 유코 아키타는 오직 두 가지 주제에 대한 열정을 보유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바로 삶의 아포리즘이 응축되어 있는 '하이쿠'와 삶의 희노애락과 삶의 근본적 속성을 대변하는 듯한 '눈(雪)'이다.


'하이쿠'와 '눈(雪)'은 투명하며 즉각적이고 친숙한 느낌과 때로는 섬세함을 때로는 산문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한, '눈(雪)'이 천사들의 흰빛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면, '하이쿠'는 시적 영혼에게 신성한 빛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유코 아키타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한편의 시는 한편의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시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대해 유코 아키타는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이쿠'와 '눈(雪)'에 대한 열정이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 자세를 가졌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외줄타기 곡예사처럼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삶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 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과 마주칠 때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모범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던지는 시험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른 시험에 응하고 있다는 것을 종종 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답을 모방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모범답안을 찾는 것으로는 세상이 던지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다. 각자가 보유한 인생 법칙들은 모두 ‘질서’와 ‘혼돈’, ‘의미’와 ‘책임’이라는 키워드로 대변될 수 있고,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법칙들을 적용하고 변주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눈(雪)'은 아이들의 소중한 친구였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빠, 엄마, 친구들과 눈사람을 만든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순간이 지나면 피할수 없는 이별이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눈(雪)'을 통해 배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른이 된 우리는 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눈은 그저 눈일 뿐이고,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건 어른의 시각이다. 상식에 매몰되어 있는 나에게 『 눈 』 은 잊고 지냈던 어린 날의 기억, 아름다운 추억과 동심을 상기시켜주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눈에 대한 또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눈은 솜사탕처럼 깨끗하고 찰나의 아름다움을 내포한 ‘하얀’ 눈이 아닌 아닌 슬픔과 고독,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배어 있는 ‘흰’ 눈으로 보였다. 저 내리는 눈이 세상을 정화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공중에서 제각각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들은 지면에서 서로의 냉기를 견디며 하나가 되고 공기 입자들을 덜어내며 단단해진다.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연약하고 쉽게 증발해버리는 것이지만... 결국 피할 수 없는 이별을 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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