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 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 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리마 작가의 워크인은 가까운 미래의 암울한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온갖 화려하고 복잡한 과학기술들이 수식하고 있는 미래는 시간의 흐름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저마다가 직면한 세상에 맞서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만이 남는다. 리마 작가가 그리는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그 아득한 시간의 간극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한 누군가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와 공존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과학기술의 현실에서의 구현과 관련된 갈등을 보면서 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면 나머지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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