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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삶, 인간의 일생이란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인간의 일생을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한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온 매 순간순간의 누적 (accumulation of every single
moment)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일생은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지난한 시간과
역사를 거치며 개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그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이데거가 “인간은 태어나자 마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다.”고 말한
이유는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키로가의 작품들은 쉽게 읽히진 않는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라는 제목처럼 그 안에는 삶이 있고, 죽음이 있고, 삶의 의미를 위협하며 넘실대는 광기와 사랑이 있다. 하지만 탐욕과 공포, 집착 등의 감정들로 점철된 이 괴기스런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아포리즘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감정의 용광로 속을 비집고
드러나는 삶의 체험적 진리를 엿보는 건 마치 만화경 속으로 다채로운 빛깔의 싸이키델릭한 이미지들을 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작 (출생)이 있고, 끝 (죽음)이 있다는 것?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공포가 공존하는 <목 잘린 닭>의 백치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삶은 평범한 사건들이 빚어낸 기적이고 역사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삶의 순간 순간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인생은 누구에게나 값지고 귀한 것이다. 그런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시간과 역사를 이루고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개별적 세계가 빚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일생
중에서 개인의 의지만으로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을 나눈다면 얼마나 될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살인마는 안톤 시거는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살인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동전 던지기를
통해 살인 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동시에 '전부를 걸어야만 전부를 얻을 수 있다.'는 안톤 시거의 말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한번씩 주어진 삶에 임하는 진지한 탐구 자세와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풍경 속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무겁게 흘렀다. 그러나 해질 무렵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깃들자, 그곳만의 장엄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 P. 110, <표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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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가에게도 삶은 예측불가능한 것이었다. 키로가가 스토리텔링의 무대로
정글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글은 인간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는 거대한 세계이자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현실의 공간을 상징한다. 인간은 삶과 죽음을 모두 포용하고 있는 정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절망에 빠져 부정적 파괴욕망을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환경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절망 속에서만 머무르진 않는다. 때론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또 때론 맞서 싸우고 극복하면서 삶을 이어 나간다. 정글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결핍, 아픔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 든다.
“그전 까지만 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삶에서
순수한 추억보다 아름답고, 우리를 단단하게 단련시켜주는 것은 없다.’
네벨은 열 여덟 살 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여태껏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추억이 지금 비탄에 젖은 채, 하녀나 쓰는 허름한 침대
위에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 P. 39, <사랑의 계절>
중에서 –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눈 앞에서 반짝이는 저 별이 누군가, 혹은 자신의 행복했던 과거 같기도 하고, 어쩌면 닥칠 미래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결코 현재의 자신의 것은 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는 소설 속에서
‘사랑’과 ‘광기’로 형상화되고 있다. 키로가의 작품 속에서 낭만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사랑은 지나간 과거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거나, 잡히지
않는 미래의 이상향으로만 존재한다. 현재의 사랑은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의 경우처럼 광기와 집착으로 인한 환각 안에서만 지속될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은 현재의 삶 안에서 고동치는 두번째 심장이자, 미래의
삶에 대한 이정표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될 수도 뼈아픈 추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모더니스트 (Modernist)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역사가
(His own Historian)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남자들이 그림자나 다름없는 여인에게 뜨거운 연모의 정을 느낀다면,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 P. 247 ,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중에서 -
인생을 살아가는 간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 속에서 인간적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존재와 소멸의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절망속이라 해도 함께 있다면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자신의 아픔도 진정시키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과,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인정’ 그리고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다. 그것은
환경의 제약 속에서 타인과 삶의 온도를 맞춰가는 일이며, 상대적 성숙의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삶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흐릿하게 잡힐 듯 떠오르는 희망에
대해, 삶의 온기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키로가가
그토록 잡고자 했던 불분명한 현실의 경계를 너머 표류하고 있는 진실의 조각은 이것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