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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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98)

 

 

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수많은 등장인물과 동식물, 사물들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본 84편의 조각글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설을 처음 접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360쪽 분량의 소설이 평균 4쪽 남짓의 독립된 챕터로 분리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본작 <태고의 시간들> 뿐만 아니라 2018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방랑자들>도 각각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촘촘하게 엮어 하나의 장편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방식은 마치 작은 천을 이어붙여 조각보를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여 패치 워크 (patch work)’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이러한 소설의 독특한 구성이 패치 워크 (patch work)’ 보다는 성좌(星座, Constellation)’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좌 즉,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에 별자리가 정해진 이후 수천년의 시간 동안 거의 별자리의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것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사실이 숨겨져 있다.

 

 

<태고의 시간들>을 읽으며 개별화된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이 마치 별들이 모여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은 미하우와 게노베파 부부, 이들의 자식인 미시아와 이지도르, 그리고 미시아의 딸 아델카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니에비에스키 가족들과 이들의 이웃과 외지인들, 동식물과 사물, 망자와 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체들을 이야기의 대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을 가진 이들 다양한 개체들의 개별적인 삶은 단선적인 스토리를 위해 봉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거대한 시간의 간극을 빈틈 없이 수놓아 결국 소설 전체를 구성하는 큰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치며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지 않은가?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다양한 개체들이 생성, 변화, 소멸하는 태고라는 무대는 소설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소설도 태고라는 공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태고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하루면 족히 돌 수 있을 정도로 작고, 평범한 시골 마을로 묘사된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태고의 위치와 폴란드어로 프라비에크(prawiek)’, 즉 아주 오래된, 원시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명은 태고가 담고 있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태고는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면서 태초의 시간을 의미하는, 즉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정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고의 시간들>20세기 폴란드라는 한정된 시공간을 조망하는 이유는 변화와 소멸을 반복하는 인류 역사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전쟁의 참혹함을 이성만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마술적 리얼리즘 (Magic realism)’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저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답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저자는 의식이 닿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을 다루고, 이성을 벗어나 세계의 심연에 도달한다. 신화적 방법론을 통해 반복되는 역사를 설명하고, 삶의 원형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역사가 비켜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환상을 통해 현실의 회색지대를 조망하여 진실을 보게 하는 것,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될 수 없었던 소수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건 문학이 담당해야할 중요한 역할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인간을 타자화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동식물과 사물, 망자들의 시선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인간의 진실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과 세기로 빛을 비춘다.

 

 

인간들은 동물이나, 식물, 사물 보다는 자신이 훨씬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식물과 사물보다는 스스로가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여긴다. 식물들은 사물보다는 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꿈꾼다. 그런데도 사물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강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52)

 

 

소설에서는 붉은 털을 가진 개 랄카를 통해 세상을 향한 동물의 시선을 투영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 그 끊임없는 변화의 시간들을 내면화한다. 따라서 시간은 인간의 정신 안에서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된다. 반면 동물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적용을 받는다. 동물에게는 시간의 흐름을 걸러내는 장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들은 단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며 항상 현재를 살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 놓는다. 과거 때문에 고통 받고, 그 고통을 미래로 끌고 가기도 한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절망을 창조한다.” (309)

 

 

작품에는 식물의 시선도 등장한다. 보리수는 나무의 꿈에는 동물의 꿈과 달리 감정이 없고, 인간의 꿈과 달리 이미지가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대자연 속 식물의 삶을 통해 삶의 원형의 회복을 꿈꾼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버섯균의 시간이다. 후손들은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개별적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버섯균의 삶은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해온 인간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버섯균은 아이들을 선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버섯에게 생장 에너지와 홀씨를 퍼뜨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어떤 버섯에게는 향기를, 또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재능을, 또 어떤 버섯에게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태를 허락해준다.” (225)

 

 

망자들의 시간도 있다.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이다. 현실에서 조명되지 않거나 애써 외면해왔던 전쟁과 학살의 현장을 저자는 망자의 시선을 통해 슬프고 아프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잊히고 찢겨진 삶에 위로를 건넨다.



영혼은 정말 많았다. 수백, 아니 수천이었다. 자심 새벽바람의 얆은 막 사이에서 이러저리 흔들리던 영혼들은 곧 끈을 놓친 풍선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204)

 

 

미시아의 그라인더처럼 사물들의 시간도 존재한다. 사물들은 자신에게 머물었던 손길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지금은 차갑게 식었지만 한때 절절하게 끓던 열기를 기억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카는 태고를 떠나며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천천히 돌린다. 이전세대의 어떤 순간에 명멸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머금고 있는 그 커피 그라인더는 그 감정의 온기를 다음세대에게 전할 것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54)

 

 

태고는 태초의 시작이자 결말이 되는 곳, 인간과 자연, 신을 포함한 모든 시간들이 흐르고 쌓이는 곳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태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며, 동시에 그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조금씩 퇴보하고 소멸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종국적으로 남게 되는 건 채울 수 없는 야망과 끝내 이루지 못한 꿈뿐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생의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다. 이는 매초 무()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으면서도 의미 없는 존재란 없음을,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빛을 내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마치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작은 싹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무거운 흙의 무게를 이겨낸 후 땅 위로 몸을 내미는 순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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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3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잭와일드 2019-11-23 16:28   좋아요 0 | URL
좋은 소설 덕분인듯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