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 - 39명의 작가 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안도현.유강희 외 지음 / 모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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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로 시작한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p.4)

 

 

기억이란 사람이나 동물이 경험한 것을 특정 형태로 저장하였다가 나중에 재생 또는 재구성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저장과 재생은 기억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두 가지 요소다.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은 마치 동식물이 퇴적, 암석화 과정을 거쳐 화석이 되듯이 사건의 잔상과 흔적, 진실의 파편 속에서 원형만이 남아 개인의 의식 속에 퇴적되고 암석화된다. 이것이 경험이 저장되는 과정이다. 또한 기억의 결과물은 저장된 경험의 원형들이 어떤 상황 하에서 어떠한 형태로 재생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동일한 체험이 재생, 재구성된 시점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되기도 뼈아픈 추억이 되기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르케스가 삶을 구성하는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닌 기억에 있다고 한 이유는 우리는 경험이 아닌 기억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행복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오스카 레반트의 말도 동일한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이 지나온 삶을 고찰하는 역사가이자 고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찬란하게 빛나던 삶, 그 기억 속으로 답사를 떠난 역사가들이 있다. 전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39명의 작가들은 각자의 삶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삶 속에서 반짝이며 빛난 순간들은 그들 각자가 살아온 삶만큼이나 다양하다. 순수했던 유년, 열병을 앓던 청년기 등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이 있는가 하면 그 시절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잊고 지낸 따뜻한 인연에 대한 고마움도 있다. 또한 떠올리기만 해도 자신만의 추억이 재생되는 특정 장소와 사물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이다. 기억은 우리를 한정된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게 한다. 기억은 한 그릇의 자장면을 시공간을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천리향, 만리향으로 만든다.

 

"자장면은 단순히 맛있는 한 그릇의 음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상함과 배려였고, 인정이고 따뜻함이었다. 어른이 내게 사 주신 자장면 한 그릇은 내 마음에 인정으로 새겨져 향기처럼 머물러 있다.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천리향 만리향처럼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향이 좀체 그치질 않는다. 사람이 남기고 간 향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래오래 남아 맴돈다." (p.130)

 

또한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고동치는 두 번째 심장이기도 하다.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인생의 최대치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최대치를 매일 산다는 것, 몇 시간을, 몇 분을, 몇 초를 그런 시간들을 의식적으로 맞이하는 순간에 우리는 심장이 특별하게 잘 뛰어서 특별하게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장소에서 지금 나와 나 속의 너, 거기 그곳을 다 지나오면 그때는 미처 못 본것들도 보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억의 주머니에 담아갈 것을 만지고 겪으며 최대치의 순간을 살아야 한다. 나중에 꺼내 먹을 수 있게, 그러면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야 말 할 수 있는 시간들이 반드시 딸려 나온다." (p.138)

 

우리는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들을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간다. 이는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행복한 기억들을 화석화하여 영원과 불멸의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고 객관화된 진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사실 (事實) 보다 사연 (事緣)이 중요해지는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라쇼몽 (羅生門)의 대사처럼 진실이란 어차피 그 사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장된 원형이 기억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작가들의 삶 속 반짝이는 순간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서 빛났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도 삶에서 빛났던 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가장 먼저 미소를 짓게 한 아주 최근의 기억이 떠올랐다. 재작년 오랜 시간 기다리던 딸이 태어났다. 새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과 부모가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우리 부부는 새로운 식구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였고, 온 가족과 친척, 지인들도 딸의 출생을 축하해주었다. 딸의 탄생을 기점으로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부모로 성장해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아이가 눈을 뜨고 나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순간, 처음으로 지은 미소, 첫 걸음마, 처음으로 말을 한 순간, 이는 내가 자식으로서 부모님과 공유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가 부모로서 앞으로 내 딸과 공유해갈 기억들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와 내 가족은 삶의 어떤 순간순간들을 공유하며 추억을 만들어나갈까?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보며 방긋 웃어주는 딸의 미소, 안아서 이마를 포갯을 때 전해오는 따스한 감촉, 말없이 내 손가락을 감아쥐던 앙증 맞은 작은 손, 이는 분명 내 삶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순간들이다.

 

 

이제 이 서평을 읽고 있는 당신이 답할 차례다. 당신의 삶에서 유난히 반짝이며 빛났던 순간들은 언제인가? 이는 당신을 위한 질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사람은 내가 아닌 당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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