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으면서, 내가 하루키의 소설 이상으로 그의 에세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한권 한권 그의 책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서가의 한 켠이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번에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서가에 꽂으며 살펴보니 그의 에세이가 생각 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에세이 시리즈 마지막권으로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주간 아사이>에 연재된 에세이 60여편이 수록되어 있다. 20여년이 지난 연재물을 한권의 에세이로 묶어낸 것이라 그의 신작 에세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오히려 이제 막 작가로서의 인지도를 쌓아갈 무렵의 하루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고, 삶과 일상에 대한 빛나는 통찰 등 하루키 에세이 특유의 매력도 여전히 살아 있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표제작인 장수 고양이에 대한 에세이들이다. 장수 고양이의 이름은 ‘뮤즈’다. 당시 하루키의 아내가 푹 빠져 있던 유리의 성이라는 순정만화 속 등장인물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하루키 자신은 야단스러운 이름이 싫어 심히 저항했지만 중과부족에 밀려 고양이의 이름은 끝내 ‘뮤즈’로 정착하고 말았다고 한다. 애묘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하루키는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십년 넘게 산 고양이는 ‘뮤즈’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본 에세이집에서 장수 고양이의 비밀 몇 가지를 공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뮤즈’가 하루키의 출세작인 ‘노르웨이의 숲’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실은 전작 장편을 하나 써드릴 테니까 부디 이 아이 좀 부탁합니다. 하고 떠안기다시피 했더랬다. 그래도 그때 ‘고양이와 교환’해서 쓴 장편이 결과적으로 내 책 중에 제일 많이 팔린 노르웨이의 숲이었으니, 녀석을 ‘복덩이 고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p. 92)
또 다른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출산에 관련된 것이다. 고양이는 보통 사람 눈을 피해 어두운데서 은밀히 새끼를 낳고 태어난 새끼도 사람의 손길에 닿지 않게 두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하루키가 길렀던 고양이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고양이는 반려동물로서 인간과 한가족으로 살아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얆은 막 같은 것이 한 겹 끼어 있다고 해야할까? 하루키의 표현대로라면 기분 내키면 응석을 부리긴 해도 ‘나는 고양이, 당신들은 인간’ 이라는 선이 그어져 있는것 같은... 하지만 오직 뮤즈만은 반드시 밝은 데서, 그것도 하루키의 옆에서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서서히 진통이 찾아와 산기를 느끼면 뮤즈는 오히려 야옹야옹 울면서 다가와 하루키의 무릎에 기대어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하루키는 고양이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구석구석까지 생생히 볼 수 있었고 고양이와 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마음을 교류하는 기묘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삶이 있고, 응분의 생각이 있고, 기쁨이 있고, 괴로움이 있었다.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 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고, 그것을 우리가 공유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였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사뭇 기묘한 체험이었다.” (p. 140)
어쩌면 ‘뮤즈’의 잠꼬대가 진정한 의미에서 고양이의 비밀일 수 있겠다. 자면서 인간의 언어로 잠꼬대를 하는 고양이라니? 어느날 하루키가 고양이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자고 있었는데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배게를 나란히 놓고 누워서, 뮤즈는 사람처럼 베개를 베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게 그런 말을 해봤자...”하는 작은 여자 목소리가 귓전에 또렷이 들렸다고 한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뮤즈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더니, 뮤지는 ‘꿍얼꿍얼, 뭐야, 귀찮게’ 하면서, 토라진 아내 같은 태도로 일어나 이불에서 나와 고개를 저으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마치 고양이가 자신의 중요한 비밀을 무심코 사람한테 들켰고, 그것을 대충 얼버무리려고하는 듯이... 또한 뮤즈는 최면술을 걸어 새를 사냥하는 재주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뮤즈는 같이 살기에 매우 이상적인 고양이였다. 예쁘고, 영리하고, 튼튼하고, 숱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우리와 고양이 사이에는 늘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고, 그건 그것대로 또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고양이는 흔치 않다.” (p. 145)
하루키는 뮤즈를 몇백 마리에 한 마리 있을 귀중한 고양이로, 또 그런 고양이를 만난 것은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루키는 이 책은 세상을 떠난 장수 고양이에게 건네는 소박한 마지막 인사임을 책의 후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뮤즈가 하루키를 생각하는 마음도 동일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