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에세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읽으면서, 내가 하루키의 소설 이상으로 그의 에세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한권 한권 그의 책들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서가의 한 켠이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이번에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서가에 꽂으며 살펴보니 그의 에세이가 생각 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에세이 시리즈 마지막권으로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주간 아사이>에 연재된 에세이 60여편이 수록되어 있다. 20여년이 지난 연재물을 한권의 에세이로 묶어낸 것이라 그의 신작 에세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오히려 이제 막 작가로서의 인지도를 쌓아갈 무렵의 하루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고, 삶과 일상에 대한 빛나는 통찰 등 하루키 에세이 특유의 매력도 여전히 살아 있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표제작인 장수 고양이에 대한 에세이들이다. 장수 고양이의 이름은 ‘뮤즈’다. 당시 하루키의 아내가 푹 빠져 있던 유리의 성이라는 순정만화 속 등장인물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하루키 자신은 야단스러운 이름이 싫어 심히 저항했지만 중과부족에 밀려 고양이의 이름은 끝내 ‘뮤즈’로 정착하고 말았다고 한다. 애묘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하루키는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고양이를 키웠는데, 이십년 넘게 산 고양이는 ‘뮤즈’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본 에세이집에서 장수 고양이의 비밀 몇 가지를 공개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뮤즈’가 하루키의 출세작인 ‘노르웨이의 숲’ 탄생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실은 전작 장편을 하나 써드릴 테니까 부디 이 아이 좀 부탁합니다. 하고 떠안기다시피 했더랬다. 그래도 그때 ‘고양이와 교환’해서 쓴 장편이 결과적으로 내 책 중에 제일 많이 팔린 노르웨이의 숲이었으니, 녀석을 ‘복덩이 고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p. 92)

또 다른 장수 고양이의 비밀은 출산에 관련된 것이다. 고양이는 보통 사람 눈을 피해 어두운데서 은밀히 새끼를 낳고 태어난 새끼도 사람의 손길에 닿지 않게 두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하루키가 길렀던 고양이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고양이는 반려동물로서 인간과 한가족으로 살아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얆은 막 같은 것이 한 겹 끼어 있다고 해야할까? 하루키의 표현대로라면 기분 내키면 응석을 부리긴 해도 ‘나는 고양이, 당신들은 인간’ 이라는 선이 그어져 있는것 같은... 하지만 오직 뮤즈만은 반드시 밝은 데서, 그것도 하루키의 옆에서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서서히 진통이 찾아와 산기를 느끼면 뮤즈는 오히려 야옹야옹 울면서 다가와 하루키의 무릎에 기대어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고 한다. 덕분에 하루키는 고양이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을 구석구석까지 생생히 볼 수 있었고 고양이와 인간의 구분을 넘어서 마음을 교류하는 기묘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의 삶이 있고, 응분의 생각이 있고, 기쁨이 있고, 괴로움이 있었다.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 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고, 그것을 우리가 공유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였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 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사뭇 기묘한 체험이었다.” (p. 140)

어쩌면 ‘뮤즈’의 잠꼬대가 진정한 의미에서 고양이의 비밀일 수 있겠다. 자면서 인간의 언어로 잠꼬대를 하는 고양이라니? 어느날 하루키가 고양이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자고 있었는데 (수사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배게를 나란히 놓고 누워서, 뮤즈는 사람처럼 베개를 베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게 그런 말을 해봤자...”하는 작은 여자 목소리가 귓전에 또렷이 들렸다고 한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뮤즈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더니, 뮤지는 ‘꿍얼꿍얼, 뭐야, 귀찮게’ 하면서, 토라진 아내 같은 태도로 일어나 이불에서 나와 고개를 저으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마치 고양이가 자신의 중요한 비밀을 무심코 사람한테 들켰고, 그것을 대충 얼버무리려고하는 듯이... 또한 뮤즈는 최면술을 걸어 새를 사냥하는 재주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뮤즈는 같이 살기에 매우 이상적인 고양이였다. 예쁘고, 영리하고, 튼튼하고, 숱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었다. 우리와 고양이 사이에는 늘 가벼운 긴장감이 흘렀고, 그건 그것대로 또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고양이는 흔치 않다.” (p. 145)

하루키는 뮤즈를 몇백 마리에 한 마리 있을 귀중한 고양이로, 또 그런 고양이를 만난 것은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루키는 이 책은 세상을 떠난 장수 고양이에게 건네는 소박한 마지막 인사임을 책의 후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뮤즈가 하루키를 생각하는 마음도 동일하지 않았을까?

 


또, 하루키는 세상은 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빨리 변하는지 궁시렁 거리면서도 귀여운 얼리 어답터의 면모도 내비친다. 에세이를 통해 원고지에 만년필로 한자씩 써내려갔던 시절과 팩시밀리의 시대를 거쳐 매킨토시 컴퓨터 키보드와 PC통신 시대에 완벽하게 적응한 하루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문과계와 이과계  두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고 하루키 자신은 원래부터 수학과 물리와 화학이 압도적으로 약한 전형적인 문과계 인간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의 세상은 (1) 남이 프로그래밍한 소프트웨어를 자유로이 구사해 일하거나 노는사람과, (2) 그 프로그램을 부지런히 만들어야 하는 사람, 이 두 부류로 나뉘어가지 않을까?” (p. 312) 라는 전망을 하는 걸 보면, 그는 확실히 기술 지향적인 사람인것 같다. 더군다나 만약 대대적인 연구에 거액의 자금이 필요하다면 특별 세금을 내도 좋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걸 보면 더더욱...

여행과 음악, 책 등 다방면에 걸친 취향 그리고 귀중하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독자에게 건네기도 한다. 외국 바에서 시원한 맥주를 순탄하게 즐기려면 ‘하이네켄 맥주’를 선택하라는 팁을 주기도 하고, (이유는 직접 읽고 확인하시길), 여행과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이거라면 언제 어디서든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만능 책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직접 읽고 확인하시길)

“언제까지고 마음을 울리는 한 권의 책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듯 귀중한 인생의 반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긴 세월이 흐른 뒤 사람의 마음가짐에 큰 차이가 생길 것이다.” (p. 241)

또한, 음악애호가 답게 공연을 관람 중 보이지 않는 화살처럼 똑바로 날아와 마음에 꽂혀 몸의 조성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체험을 한 걸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 때면 마치 열일곱 살로 돌아가 다시 한번 격렬한 사랑에 빠진 기분이다. 그렇게 근사한 체험은 자주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실제로는 몇 년에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기적 같은 해후를 찾아, 우리는 공연장과 재즈 클럽을 드나든다. 실망하고 돌아오는 날이 더 많다 하더라도.” (p. 151)

그렇다고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마냥 즐겁고 유쾌한 에피소드만을 다루고 있진 않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선 작가 답게 “이야기를 쓰는 일, 제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차피 비정한 세계다. 모두에게 웃어주기는 불가능하고, 본의 아니게 피가 흐르기도 한다. 그 책임은 내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수밖에.” (p. 136)라고 작가의 숙명을 언급하기도 하며, “형체 있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언젠가, 어디선가 사라져 없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 (p. 31)이나 “세상엔 실로 갖가지 함정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은밀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아무 일 없이 매일 평온하게 살아가기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 (p. 171) 처럼 하루키 자신만의 아포리즘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생에 있어 결과로서의 형태는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것은 좀더 다른 것이다. 하루키가 책 속에서 밝혔듯이 어쨌든 영원히 이기기만 하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하루키의 에세이의 매력은 읽고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말로 보탬이 되는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