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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의 탄생
김하나.황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인 가구는 원자와 같다. 물론 혼자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면 다른 원자와 결합해 분자가 될 수도 있다. 원자가 둘 결합한 분자도 있을 테고, 셋, 넷 또는 열둘이 결합한 분자도 생길 수 있다. 여자와 남자라는 원자 둘의 단단한 결합만이 가족의 기본이던 시대가 가고 있다. 앞으로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분자 가족'이 태어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가족의 분자식은 W2C4쯤 되려나. 여자 둘 고양이 넷, 지금의 분자구조는 매우 안정적이다." (12쪽)
이들 가족의 분자식을 보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대해 영감을 준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바로 ‘가족의 탄생 (Family ties, 2006)‘이라는 영화다. 이 영화에도 다양한 형태의 분자 가족이 등장한다.
첫 번째 가족의 분자식은 W3다. W3를 세부 분자식으로 표현하면 M2D1 (두 명의 엄마, 1명의 딸)이다. 두 명의 엄마와 한 명의 딸은 모두 혈연관계가 아니다. 두 엄마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이며, 딸은 올케의 전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다. 이들 세 명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남동생이자 남편, 아빠이기도 한 사람은 사라졌지만, 이들은 그들만의 안정적 분자 가족식을 완성해냈다.
두 번째 가족의 분자식은 W1M1다. 얼핏 보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자와 남자라는 원자 둘의 단단한 결합 즉, 부부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배다른 남매지간이다. 언제나 사랑에 올인하는 엄마를 딸은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한 딸은 엄마와 유부남과의 사이에 남겨진 동생을 누나로서 또, 실질적인 엄마로서 끌어안는다.
이들 두 분자 가족은 화해와 공존을 주장하면서도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려는 가부장적 남성들의 태도로부터 생성되었다. 책임감 없는 남자들로 인해 만들어진 모계 가족은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가족의 틀을 파기한다. 나아가 이들은 친족 관계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가족은 아니지만, 혈연으로 얽힌 관계보다 정서적 동질감이 빚어낸 마음의 끈이 더 끈끈할 수 있다는 것, 진정한 가족은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첫 번째 가족의 딸 W와 두 번째 가족의 아들 M은 각자가 속한 가족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격체인 동시에 원자화된 개인이다. 이들이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갈등을 극복하면서 연인이 되고, 새로운 분자 가족 구성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는 대목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영화에서는 이들 가족의 탄생을 축복하는 축포와 함께 음악이 깔린다. 곡목은 ‘사랑은 멀리 있지 않아. (Love is not far)‘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개별 원자들 즉, W2 (하나, 선우)와 C4 (하쿠, 티거, 고로, 영배)에 대한 개인적 역사의 기록이자 동시에 이들이 분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다룬 가족의 탄생사이다. 이들은 내게 가족이 성립되려면 자발적으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 가부장 제도의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을 극복할 경우 행복이라는 화학반응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일이란 생기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거기서 오는 안정감이야말로 가족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가족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서로 기대어, 또 종종 두 배로 기뻐하며 삶의 굴곡을 지날 것이다."(149쪽)
우리는 누군가의 아들 또는 딸로 세상에 태어난다. 또 가족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고 마침내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또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 가정은 정형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형태와 구성은 제각각이지만 하나의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 가족은 더 이상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지는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내게 원자화된 개인이 새로운 형태의 분자 가족을 형성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굴곡진 삶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묵히 지켜봐 주고 지지해 줄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조언 아닐까? 세월의 일렁임을 힘겹게 견뎌내야 할 때 내가 살아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 묵묵히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즉, 가족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이것 이상의 응원이 있을까? 각자가 가진 삶의 조각들이 가족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완전한 조각으로 완성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행복 아닐까?
"누군가와 같이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타인이 강력한 주의 환기 요인이라는 사실이다. 과일 깎아 먹으며 나누는 몇 마디 얘기로도 어떤 울적함이나 불안은 나도 모르게 털어버릴 수 있고, 함께 살면 그 현상이 수시로 일어나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힐 겨를이 없어지기도 한다. 집 안 어디엔가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 같은 것도 있다. 아니, 꼭 집 안에 있을 필요도 없다. 누군가 집으로 항상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248쪽)